재가불자들이 꿈꾸던 개화된 세상의 발자취
재가불자들이 꿈꾸던 개화된 세상의 발자취
  • 황찬익
  • 승인 2014.12.08 1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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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황찬익의 ‘須彌行脚’-3

▲ 인왕사 위 선바위. 사진=황찬익ⓒ2014 불교닷컴

북한산 마지막 늑대
서울에 살면서 북한산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인구 천만이 넘는 대도시에 맑은 공기를 불어 넣어주는 허파 같은 산이요, 서울 어디서든 한 시간 안에 가닿아 어디로 오르든 그림 같은 경치를 펼쳐 보여주는 산이 북한산이다.

서울 사람이 등산을 처음 시작하고 어느 산으로 갈까 고민하다가 쉽게 발길이 향하는 산이 또한 북한산이다. 버스며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편이 쉽게 데려다 떨궈주고 인파를 따라 걸어 오르면 길을 잃을 위험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수차례 이쪽저쪽 등산로를 오르내리며 싫증도 나고 다른 산에 대한 욕심도 생기면서 경기도 인근의 다른 산으로 옮겨 붙었다가 지방의 명산도 가보고 인적 드문 외진 산을 찾아다니게도 된다.

지방의 산을 다닐 만큼 다니고 나서 문득 다시 돌아오게 되는 산이 북한산이다. 다시 찾은 북한산을 바라보며 열이면 여덟, 아홉은 새삼 깜짝 놀라게 된다. 이만큼 넉넉하고, 수려한 산이 그 동안 다녔던 산 가운데 또 몇 군데나 있었던가!

서산대사께서 금강산은 수려하기는 하지만 넉넉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넉넉하기는 하지만 수려하지는 못한데 묘향산은 수려하기도 하고 넉넉하기도 해서 가장 머물 만하다고 했다 하는데, 북한산은 서산대사의 기준으로 볼 때도 수려하기는 금강산, 설악산에 못지않고, 넉넉하기는 지리산, 한라산에 버금하는 산이다.

▲ 삼성암 나반존자.사진=황찬익 ⓒ2014 불교닷컴
한성백제 500년, 고려 500년, 조선 500년의 도합 1천5백여 년의 도읍지 언저리였기에 너무 친근해져버린 북한산. 그 높이와 그 품 그대로 조금만 도읍에서 떨어진 곳에 있었다면 아마도 국립공원 1호의 영광은 북한산에 돌아가지 않았을까?

지금으로부터 불과 50여 년 전인 196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서울의 북한산에 노루가 뛰어놀고 늑대가 어슬렁거렸다면 믿을 수 있을까? 시인이자 산악인이었던 동국대학교 김장호 교수의 회고를 보자.

“불과 30년 전 그러니까 1950년대 후반, 그 전까지만 해도 후미진 산자락이었던 수유리, 가오리에 이웃에 살던 노인은 그가 소싯적에 북한산에서 분명히 호랑이를 보았다고 말했다. 나도 1958년 겨울에 대성문 쪽에서 노루를 보고, 또 65년의 언젠가는 대동계곡 지릉에서 마지막 늑대를 만났었다.

조선조 말기, 일제 초기에 별다른 기록이 없고, 쭉 내려와서부터 비로소 북한산에 근대적인 등산의 흔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인수봉이 처음 그 정수리를 사람의 발을 올려놓은 것은 1926년의 일이란 것이 공인된 기록이다. 당시 경성 주재 영국 총영사관의 부영사였던 C.H.아처라는 영국인과 임무(林茂) 등이 자일 등 근대적 장비를 갖추고 암벽등반으로 인수봉에 오른 것은 서북면 C코스였다. 그후 1935년에 이르러 동남면 B코스가 김정태, 엄홍섭 등에 의하여 열리더니 다시 이듬해에 오우찌, 박순만 등에 의해서 동면의 A코스가 뚫렸었다. 일제 때 한국산악계는 대개 일본인 거주자들에 의한 조선산악회와 한국인만으로 조직된 백령회가 서로 경쟁 하는 꼴이었는데, 이 B, A 코스의 개척도 바로 그런 구체적인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 사이 현 백운산장과 인수산장 관리인 형제의 조부 이해문이 1924년에 백운대에 처음 올랐을 때, 인수봉 정상에 이미 불단(佛壇)과 석탑이 차려져 있었다고 전하고, 또 25년에는 미국인 원한경 일행이 올랐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 김장호,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중에서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북한산에 호랑이가 살았고, 1960년대 중후반까지 노루며 늑대가 뛰놀았다는 증언이다. 1924년 백운대를 처음 올랐던 이해문이란 사람이 인수봉 꼭대기에 불단과 석탑이 차려져 있었다는 기록은 근대적인 암벽산행으로 인수봉에 인적이 찍히기 이전에 옛 스님이나 불자들이 도보로 그곳에 올라 탑을 세우고 불단을 만들었다는 자취를 증언하는 일이다.

마음 답답한 날
환속 전에 북한산 보현봉 아래 일선사 주지를 살았던 시인 고은 선생의 회고록인 <나, 고은>에도 북한산에 대한 도보 등정의 기억이 담겨 있다.

“내 산의 편력은 보현봉 일대뿐 아니라 북한산 전체로 망라되기 시작했다. 마음 답답한 날, 내 앞에 허물 수 없는 어떤 벽이나 닫힌 문이라도 있는 것 같은 날이면 으레 나는 그것들을 밀어붙이는 심정으로 걸음을 빠르게 재촉한다. 내 검정고무신은 찢어진 데는 굵은 실로 꿰매었으므로 그것이 자주 실밥이 떨어져서 헐떡거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양말 채로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빈 인수봉이나 그 벼랑 위의 북한산 꼭대기에까지 올라갔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짐승 때문에 ‘너 이놈!’하고 큰 소리를 질러 내 공포를 쫓아내야 했다. 이런 북한산 편력이 어지간히 버릇이 되자 이번에는 저 건너 오봉이나 도봉 쪽으로 눈이 갔다.”

마음 답답한 날, 내 앞에 허물 수 없는 벽이 있는 날이면 찢어진 검정고무신을 신고 자일이나 헬멧 등의 등산장비도 없이 인수봉을 올랐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종종 산악인 가운데 숨은벽 릿지 쪽으로 자일 없이 인수봉을 오르는 사람이 있는데, 이해문 선생이 봤던 석탑과 불단을 조성한 옛 사람이나 고은 선생이나 그렇게 인수봉을 올랐던 모양이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처럼 써진 고은 시인의 또 다른 기록을 보자.

“시인이여
먼 산들을 좋아하지 말자
6백리 산맥으로 이어지는 어둠조차
저 기나긴 어둠의 힘조차 알고 있다
우리에게 고난이 온다
우리에게 재난을 찬미할 때가 온다
그 어떤 사악한 것도
거룩한 것이라고 말해야 할 때가 오고 있다
시인이여 이제 먼 산들을 좋아하지 말자
아무리 자손만대로 이어지는 산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자랑일지라도
흐르는 사이 마음 에어내는 안성천이
그토록 서러이 독실할지라도
우리에게 또 재난이 다가오고 있다
해 넘어간 아산만도
평택의 무른 들판도 안다
재난 속에서 그때 너에게 무엇이 시이겠느냐
시인이여 먼 산으로부터 눈을 돌리자
마침내 시인이여 결단하자
너에게 올 초토를 거부하며 쓰러질 것을
너에게 올 또 하나의 악령을 타도하며 솟아날 것을
젊은 시인이여”
- 고은, <차령산맥(車嶺山脈)> 중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이자 가장 가슴 벅찬 근현대사의 현장인 서울의 진산이 북한산이다. 먼 산에서 눈을 돌려 발 딛고 바라봐야 할 산…. 몇 번이고 거꾸러졌던 젊은 시도들이 좌절해서 돌아가 칩거하다가 다시 어기영차 어깨를 맞대고 광화문 복판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산이 북한산이다.

개화당과 불교
조선 말, 기울어가는 나라를 어떻게든 다시 일으켜 세워보려고 젊은 선각자들이 고종 임금을 피신시키고 수구대신을 죽이고 몰아낸 후 문벌과 신분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14개조에 달하는 개화당의 정강정책을 발표했다.

지금의 조계사 앞마당 우정국에서 시작된 혁명은 딱 3일 동안 세상을 호령하고 그쳐서 ‘3일천하’라는 조롱으로 사람들 입가에 머물다 지워졌지만, 준비과정에서 젊은 선각자들을 한데 묶기도 하고 그들 가슴 속에 깊이 드리운 생각의 원천은 불교였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개화당 여러 젊은이들의 스승이자 정신적 구심이었다. 박규수는 이미 불교에 깊이 심취했던 추사 김정희를 스승으로 삼아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이미 어려서부터 땅바닥에 불탑과 불상을 그리고 놀았을 만큼 불심이 깊었다고 한다. 외가의 할아버지뻘이던 류화가 일곱 살 때 그런 박규수를 지켜보며 시를 지어 남겼다. “네가 석탑을 그릴 때/ 한 층 한 층 높아지듯이/ 성자가 되는 일도 평범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네게 가르치나니 독서법은 이것이다.”

박규수가 열여섯 살 때 일이다. 도봉산 정상에 올라 시 한 수를 읊었는데 다음과 같다. “세 개의 커다란 알약이 허공에 떠 있다/ 하나는 스스로 빛나서 밝고/ 다른 하나는 덕성이 고요하여 그저 생명을 자라게 할 뿐이구나/ 또 다른 하나는 컴컴하기가 거울과 같아서/빛을 빌려 비추어줄 뿐이네” 각기 해와 지구 그리고 달을 비유한 것으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의 과학책을 이미 읽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박규수에게 평생을 함께 했던 도반이 바로 오경석과 유대치다. 둘 다 중인 출신으로 도승지, 공조판서, 예조판서, 평양감사, 우의정까지 올랐던 박규수와는 신분상의 차이가 있었지만 박규수는 자신 아래 모여들었던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박영교, 김윤식 등 양반가의 젊은 인재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이들을 스승으로 삼아 나랏일을 도모하라고 이른다.

▲ 인왕산 국사당.사진=황찬익ⓒ2014 불교닷컴

실제 박규수가 죽자 이들은 청계천 유대치의 집과 화계사, 봉원사, 보문사 등등을 전전하며 오경석과 유대치에게 개화사상을 본격 학습한다. 이 가운데 화계사는 조선왕조 마지막 도총섭이었던 홍월초 스님이 주지로 있었다.

홍월초 스님은 순종 임금이 황태자였을 때 시름시름 앓게 되자 고종 임금의 부탁으로 운문사 사리암까지 내려가서 백일기도를 정성껏 올려 병을 쾌차하게 했던 스님이다. 이때 세운 공으로 고종 임금의 신임을 얻어 서오릉 수국사를 중창하기도 하고, 동대문 밖 창신동에 조선불교의 새로운 구심체였던 원종(圓宗)과 원흥사를 창건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또한, 지금의 동국대학교 전신인 명진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이운허, 김성숙 등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스님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150여 명의 승려를 동원해서 이 운동에 적극 결합하게 했던 깨어있는 스님이었다.

양반가 출신 인재들이 개화당을 만들 즈음 불교 내부에도 이동인, 탁정식, 차홍식, 이윤고 등이 개화당에 발맞춰 모임을 조직하고 개화운동의 한 축을 맡았다. 아마도 유대치나 오경석의 또 다른 공부모임이었을 것으로 보여지는데, 사료에 드러나는 것은 없지만 이 네 명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오경석이나 유대치 주변에 모여들어 함께 일을 도모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게 된다.

국사당 재건과 재가불자
조심스럽지만 그런 추측에 상상력을 더하게 하는 사찰들이 바로 북한산 삼성암과 인왕산 인왕사다. 이동인 스님은 통도사 출신으로 개화파의 드러나지 않은 핵심이었다. 신촌 봉원사에 머물며 오경석, 유대치, 김옥균, 박영효 등과 교류하다가 김옥균의 주선으로 김홍집, 민영효 등과 가깝게 지내게 된다.

당시 강력한 실권을 가진 두 사람과의 교유는 곧바로 고종 임금과의 연결로 이어지고 고종의 밀명을 받은 이동인은 비밀리에 군함과 총포를 수입하는 일과 미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하는 일 에 개입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정토진종 부산별원을 찾아가 스스로 화계사 삼성암 승려라고 소개하는데 그때가 1878년 6월의 일이다.

김태흡 스님이 1943년에 쓴 <화계사 삼성암 중수기>에 따르면, 한양에 살던 박선묵(朴銑默) 거사는 16세에 발심하여 불교에 귀의했다. 박거사는 유성종(劉聖鍾), 서윤구(徐潤龜), 고상진(高尙鎭), 이원기(李元基), 장윤구(張潤九), 유재호(劉在護) 등 7인의 신도와 함께 1870년 봄, 현재의 삼성암에 있는 천태굴에서 3일 동안 독성기도를 봉행했다.

▲ 북한산 삼성암. 사진=황찬익ⓒ2014 불교닷컴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박선묵 거사는 고상진 거사에게 ‘이곳의 지세가 절을 지으면 좋을 것’이라며 창건을 제안했다. 창건을 논의한 2 년 뒤인 1872년 고상진 거사가 여러 칸의 정사(精舍)를 짓고, 이름을 작은 절이라는 뜻에서 ‘소난야’로 명명했다. 이후 부근의 산지를 매입해 사격(寺格)을 점차 넓혀서 10년이 지난 뒤인 1881년에는 박선묵 거사가 독성각을 새로 짓고 절 이름을 지금의 삼성암(三聖庵)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 삼성암 독성각. 사진=황찬익.ⓒ2014 불교닷컴
이동인 스님이 부산의 일본정토진종을 찾아가 화계사 삼성암 승려라고 밝혔던 때가 1878년이니 공식적으로 삼성암으로 이름을 붙인 1881년보다 3년이나 이른 시기에 이미 이동인 스님은 삼성암이라 부른 것이 된다. 이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 내부적으로는 이미 삼성암으로 부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일제의 반대에도 통합종단인 원종(圓宗)을 만들고 근대식 학교인 명진학교를 설립하는 등 개화운동의 방향과 일정하게 보폭을 함께 맞춰나갔던 화계사 주지이자 마지막 도총섭 홍월초 스님, 그 산내암자였던 삼성암과 자신을 화계사 삼성암 승려라고 소개한 이동인 스님, 그리고 이미 그곳에 자발적으로 모여 독성기도를 올리고 사찰을 창건했던 재가신도 모임과 개화당이 혹시 하나의 흐름에 얹혀진 것은 아닐까?

그런데 박선묵이란 이름이 또 한 번 사찰연혁에 등장한다. 본래 남산 꼭대기 팔각정 자리에 는 조선시대 이래 국사당(國師堂)이 자리했었다. 국사당은 북한산과 백악산 그리고 경복궁과 조선호텔 앞 원구단을 남북으로 잇는 한양의 기본축 상에 놓인 건물로 무속신앙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제는 남산식물원 자리에 일본식 신사를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자신들의 신사보다 더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자리한 것이 눈엣가시여서 이를 허물게 하자 전국의 뜻있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국사당을 지금의 인왕산 서쪽 기슭로 옮기게 된다.

인왕산 서쪽에 선바위 아래에 자리 잡은 국사당은 그때 이후 옮겨진 건물이다. 국사당 주변에는 크고 작은 10여 개 사찰이 운집해 있다. 종파와 소속종단이 모두 다른 이 절들은 창건 이래로 인왕사로 불려왔는데, 각기 따로 운영하지만 인왕사의 주지는 돌아가면서 맡아본다고 한다.

이곳에 처음 절을 만든 사람이 삼성암 창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박선묵(朴銑默) 거사다. 박 거사는 일제가 남산의 국사당을 허물게 한 시점이었던 1912년에 처음 이곳에 선암정사(禪巖精舍)라는 이름의 암자를 세웠다. 이후로 1914년에는 탄옹(炭翁)스님이 대원암(大願庵)을, 1922년에는 서옹(西翁)스님이 극락전을, 1924년에는 자인(慈仁)스님이 안일암(安逸庵)을, 1927년에는 춘담(春潭)스님이 다시 극락전을 세우고, 1930년에는 묘법(妙法)스님이 치성당(致誠堂)을 각각 세우면서 지금의 인왕사 모습을 띠게 된 것이다.

지금은 무속과 섞여 좀체 정통 불자들은 찾지 않는 한적한 기도처가 되었지만 국사당 재건운동에 당시 불교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섰고, 그 핵심에 삼성암을 창건했던 재가불자 박선묵 거사가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고종 임금과 홍월초, 이동인 스님 그리고 개화당과 재가불자들을 잇는 결정적인 사료가 보이지 않아 이 글은 단지 상상력에 그칠 가능성이 높지만 북한산자락을 동서로 거닐며 삼성암도 들러보고 인왕사와 국사당도 눈으로 어루는 동안 근현대사 속 실패한 젊은 선각자들 모습이 사진처럼 눈에 밟히고, 잘 맞지 않는 퍼즐조각 맞추듯 억지로라도 맞춰보고 생각이 간절하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90년대 초, 불교계와 인연을 맺고 불교계 잡지사와 총무원, 사찰 등에서 생활하는 틈틈이 전국의 산과 절을 자주 찾아 나섰다. 그 동안 산언저리나 절 주변에서 보고 듣고 느낀 이야기들을 스토리텔링해서 책으로 엮어내고 있다. <기도도량을 찾아서>, <이야기가 있는 산행> 등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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