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 무비스님의 한 물건(一物)
참나: 무비스님의 한 물건(一物)
  • 강병균 교수(포항공대)
  • 승인 2014.12.08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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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27.

-이 글에서는 참나가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서 어떤 어처구니없고 이상한 결론이 도출되는지 논할 것이다. 참나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고 가정한다.

I. 한 물건(一物): 편재(omnipresent)하고 전지전능(omniscient omnipotent)한 존재

여기에 한 물건이 있어서 이름도 모양도 없으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꿰뚫고 있으며, 아주 작은 먼지에도 들어가지만 온 우주를 다 에워싸고도 남는다. 안으로는 불가사의한 신통묘용을 다 갖고 있으며 밖으로는 온갖 존재에 일일이 다 맞추어 응하고 있다. 하늘과 땅과 사람에 있어서 주인 노릇을 하고 천지만물 삼라만상의 왕 노릇을 한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높아서 그와 짝을 할 수 없다. <<무비스님의 ‘직지강설 하’ 111쪽>>

성철스님과 동산스님 등 위대한 승려를 배출한 남방의 총림 범어사에 주석하시는 무비 스님은 우리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학승이시다. 항상 진지한 자세로 수행하시고 공부하시는 분으로 불교계에서 크게 존경을 받으신다. 하지만 무비스님이 자신의 저서 ‘직지강설(直指講說)’에 인용한 윗글은, ‘한 물건(一物)’이라는 괴이한 존재에 대한 강고(强固)한 믿음을 표출하고 있으며, 심각한 문제점을 맹렬하게 분출하고 있다.

‘아주 작은 먼지에도 들어가고 온 우주를 다 에워싼다’는 표현은 힌두교 아트만(我) 또는 브라흐마(梵)를 표현하는데 쓰인다. 먼지에도 아트만(아 我)이 있고, 우주에는 브라흐마(범 梵)가 있다. 베단타 불이론(不二論)에 의하면 범(梵)은 아(我)이다(범아일여 梵我一如). 당신의 ‘한 물건(一物)’은 분명 아트만이나 브라흐마이다. 우주에 편재(遍在 omnipresent)한 존재이다. 진실로 당신의 ‘한 물건’은 온 우주를 다 에워싸고 있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을 해보시라. 특히 출근시간에 늦을까 택시를 잡아탈 때, 중요한 회의에 늦을까 안절부절할 때, 사랑하는 사람의 임종을 지키지 못할까 노심초사할 때,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보고 답하시라. 정말 우주를 에워싸고 있는지. 당신의 한 물건이!

(좌측 사진 설명)많은 경우 우리의 미감(美感)은 추한 것에 대한 외면과 추한 것의 격리로부터 온다. 예기치 않게 추한 것에 노출되면, 우리는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니, 어찌 이럴 수가!”라고 비명을 지르면서. 종종 진실은 전혀 유쾌하지 않다. 오히려 불쾌하다. 예수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은 반만 참이다. 나머지 반은 각자에게 달렸다.    
                           
(가운데와 우측 설명)민촌충 대가리. 부정관 대상으로 그만이다.하지만 이들도 참나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하늘, 땅, 인간의 주인역할을 하는 한 물건    또는 참나가 있다. 이 사진을 보는 순간 전혀 역겨움이 일지 않는다면, 당신에게는  참나가 있을 가능성이 몹시 크다. 주종(主從), 미추(美醜) 등으로 이루어진 상대세계를  초월한 참나가! 

‘한 물건(一物)‘이 안으로 불가사의한 신통묘용을 다 갖고 있다니, 아메바나 모기의 ‘한 물건’이 무슨 신통묘용을, 그것도 불가사의한 신통묘용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금방 손바닥에 맞아죽을 줄 모르고 널따란 나대지 이마에 앉아 피를 빠는 모기의 ‘한 물건’은, 어찌하여, 불가사의한 신통력은 고사하고, 목숨을 잃지 않고 배를 채울 수 있는 적절한 식사장소를 택하는 최소한의 소박한 능력조차 없다는 말인가?

‘한 물건‘이 ‘밖으로 온갖 존재에 일일이 다 맞추어 응한다’니, 아메바나 모기나 쇠똥구리가 언제부터 온갖 존재에 다 맞추어 응하고 있는가? 쇠똥구리는 소똥이 아니면 관심이 없다! 회충, 촌충, 편충, 요충(의 한 물건)은 인간의 몸 밖의 세계에는 관심도 없으며 일일이 맞추어 응하는 일도 없다. 대량살상무기(WMD)인 구충제가 위장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 이 기생충들의 ‘한 물건’은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는 것일까? 구충제의 효능에 맞추어 응해서 기꺼이 육신이 살해당하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일까? 

‘한 물건’이 ‘하늘과 땅과 사람에 있어서 주인 노릇을 한다’니, 당신의 ‘한 물건’은 다른 사람의 주인 노릇을 하는가? 그런데 다른 사람의 ‘한 물건’ 역시 당신의 주인 노릇을 하는 것 아닌가? 그럼 서로 상대방의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인가? 말이 서로 엉켜, 말이 되지 않지 않는가? ‘한 물건’이 ‘천지만물 삼라만상의 왕 노릇을 한다’니, 당신의 ‘한 물건’도 천지만물 삼라만상의 왕 노릇을 하고, 다른 사람의 ‘한 물건’도 천지만물 삼라만상의 왕 노릇을 하는가? 그럼 같은 천지만물과 삼라만상을 두고, 73억 사람들의 73억 ‘한 물건들’이 동시에 왕 노릇을 하는가? 게다가 아메바, 모기, 회충, 민촌충, 갈고리촌충, 편충, 요충, 쇠똥벌레의 ‘한 물건들’도 천지만물과 삼라만상의 왕 노릇을 하고 있는가? 갈고리촌충의 ‘한 물건’은 자기를 박멸하는 구충제의 ‘왕’인가? 당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해 보라. 당신은 당신의 직장 부하가, 천지만물 삼라만상의 왕은 고사하고, 당신의 왕이라고 인정한 적이 있는가?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우주에는 단 하나의 ‘한 물건’만 존재하고, 모든 생물·무생물은 이 ‘한 물건’의 현현(顯現)인가? 이는 정확히 힌두교의 범아일여(梵我一如)사상 아닌가? ‘브라흐마 전변설(轉變說)’ 아닌가? 이 사상이 불교에 유입된 것이 ‘수불리파 파불리수(水不離波 波不離水)’라는 사상이다. 물(水)과 물결(波)은 같은 것이다, 즉 우주마음 또는 우주식(宇宙識)이라는 대양에 이는 수없는 파도가, 개인마음 또는 개인의식이라는 힌두교 사상이다.

문제는 이런 유아론(有我論)적인 사상이 선종(禪宗), 교종(敎宗), 출가자, 재가자 할 것 없이, 한국불교계 전체에 만연(蔓延)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유(類)의 신비주의적이고 초월적인 사상은 중생의 삶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찌르는 듯한 사바세계 고통의 광풍이 불어오면, 유아(有我)사상은 힘없이 보랏빛 옅은 안개처럼 흩어진다. 불교인들이 사회발전에 있어서 다른 종교인들에 비해서 뒤처지는 결정적인 이유일 것이다. 초기 경전들을 보라. 부처님은 지극히 실용적인 분이다. 동물 희생제의, 하늘에 제사지내기, 종교의식 등에 대해서 날카로운 지성으로 비판하신다. 도대체 이런 황당한 ‘한 물건’ 철학은 어디에서 솟아난 것인가? 그리고 버젓이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행세를 하는가?

II. 참나

위에 인용한 ‘한 물건’과 매우 유사한 물건이 있으니 참나(진아 眞我)이다.

참나(眞我 진아)는 본래 존재하는가. 아니면 만들어진 것인가.

연기법(緣起法)에 의하면 만들어진 것은 반드시 무너진다. 
따라서 참나는 (만약 존재한다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참나는 상주불멸(常住不滅) 불생불멸(不生不滅) 영생불멸(永生不滅)의 실체가 된다. 이것이 바로 힌두교의 '아트만(atman)'이다. 부처님이 극렬하게 비판하는 아트만이다. 부처님이 아트만을 부정한 것은 인과론 때문이다. 힌두교의 아트만은 인과를 초월한 존재이므로, 우리가 아트만이라면 수행을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참나가 바로 인과를 초월한 아트만과 같은 존재이다.

모든 존재가 참나라면 도대체 수행을 할 이유가 무엇인가? 무슨 짓을 해도, 아무리 끔찍한 짓을 해도, 당신은 참나가 아닌가? (홍주종(洪州宗)은 바로 이런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당나라 스님 마조도일(馬祖道一)이 강서성 홍주에서 창시한, 홍주종에 의하면 모든 행위는 불성(佛性)의 작용이다. 그렇다면 “살인, 강도, 강간 등의 악행도 불성의 작용이냐?”고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다.)
 
만약 당신이 ‘사람들이 스스로 참나라는 것을 몰라서’라고 대답한다면, 모르는 것은 참나가 아닐 터이니 ‘모르는’ 제삼의 다른 존재가 있다는 말이다. 그럼 당신에게는 적어도 두 개의 존재가 있다. 참나와, 참나가 아닌 그 무엇. 그리고 ‘완벽한’ 참나가 수행을 할 리는 만무하므로, 수행을 하는 것은 비(非)참나이고 비참나는 수행의 완성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참나론은 이원론이다. 그런데 비참나가 겪은 수많은 전생을 기억하는 것은 참나이다. 왜냐하면 이미 비참나는 (성불하던 순간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나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중생의 무한 번의 윤회전생(輪回轉生)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면서도, 지금은 사라져 존재하지도 않는, 쓸데없는 짓만 하던, 자기와 전혀 관련이 없는, 비참나의 삶과 행위를 다 기억한다는 말인가? 전생은 무한하므로 참나의 메모리 용량은 무한이다! (모든 생물의) 참나는 ‘무한 바이트’ USB이다.

(번뇌·망상을 하는 어리석은) 비참나는 처음부터 존재했는가? 아니면 중간에 생긴 것인가? 만약 처음부터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인과론(因果論)에 위배된다. 아무도 인(因)을 만들지 않았는데, 어찌 비참나라는 과(果)가 있는가? 비참나로 대표되는, 처음부터 존재한 즉 우리 의사와 무관하게 존재한, 어리석음과 번뇌·망상이 어찌 우리책임이란 말인가? 중간에 생겼다 하더라도, 인과론에 위배되는 것은 변함이 없다. 인과를 벗어난 참나에게 어떻게 비참나가 생긴단 말인가?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무수히 윤회를 해온 당신에게 있는 무명(無明 어리석음)은, 당신이 만든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있던 것인가? ‘처음부터 있었다’고 한다면, 당신이 어리석은 것은 결코 당신의 책임이 아니다. (이런 주장은 기독교의 원죄개념과 같다. 사실은 훨씬 더 고약하다. 기독교에 의하면, 인간은 최소한 처음 창조될 당시에는 청정했으나 나중에 타락한 것이지만, ‘처음부터 인간에게 무명이 있었다’는 주장은 ‘인간은 무한한 기간의 과거에 단 한 번도 청정한 적이 없는 존재’라는 저주이다.)  ‘중간에 생겼다’ 하면, ‘무명이 없는 존재에게 갑자기 무명이 생겼다’는 말인데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더 거창하게 말한다면, 참나인 이 우주에 어떻게 중간에 비참나가 즉 무명·번뇌·망상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문제를 그냥 덮는다 하더라도,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하나 남아있다: 중간에 비참나가 생길 수 있다면, 설사 혹독한 수행을 통해 비참나를 없애더라도 언제 다시 비참나가 생길지 누가 아는가? 이런 문제들은 참나·비참나 이원구도(二元構圖)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 (이 ‘참나·비참나’ 문제는 뒤에 다시 거론한다.)

만약 누구에게나 본래부터 즉 태초부터 참나가 있다면, 개미나 아메바에게도 참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참나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개미의 참나는 인간의 참나와 (최소한 그 기능에 있어서는) 같을 것이다. 그런데 진화론에 의하면, 지금의 고등 생물인 인간은 과거의 미개한 아메바, 어류, 파충류 단계로부터 진화한 것이므로, 아메바시절부터 참나를 가지고 있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즉 모든 생물의 참나는 서로 동일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육신은 진화에 따라 변했어도, 참나는 변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암 전 조계종정, 혜국스님, 경봉스님 주장처럼) 참나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개미의 참나도 보고 듣고 생각할 것이다. 인간과 동일하게 똑똑한 생각을 하고, 인간처럼 보아야할 것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참나는 만들어지거나 진화하고 변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인과因果에 의해 지배되는 연기세계緣起世界를 벗어난 존재이다. 즉 초월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개미의 참나는 색깔을 못 본다. 생각도 못한다.

만약 참나가 (개미 몸이라는) 육신의 영향으로 본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참나는 무기력한 존재이다.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힌 수감자이다. 개미의 참나는 개미라는 육신에 갇힌 죄인이다. 그런데 참나는 번뇌·망상이 없는 존재이므로 악행을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참나가 육신에 갇히는 벌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뿐만 아니라, 인과세계(因果世界)인 현상계를 초월한 참나가 어떻게 한 평도 안 되는 조그만 육신에 갇힐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참나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모든 생물이 본래 참나라면, 그래서 사자가 참나라면 무고한 누를 잡아먹는 것은 누구인가? 염병(染病 장티푸스)이 참나라면 수많은 사람을 공격하여 살해하는 것은 누구인가?

만약 사람이 본래 참나라면 번뇌와 망상을 하는 것은 누구인가? 수행을 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참나를 찾는 것은 누구인가?

참나가 참나를 찾는 것인가?

만약 참나가 번뇌·망상을 한다면 참나가 아니므로, 참나가 번뇌·망상을 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참나가 아닌 다른 나’가 우리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비(非)참나’는 부처가 되면 사라지는 것인가? 아니면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만약 부처에게도 비(非)참나와 참나가 동시에 존재한다면, 모든 중생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부처로 하여금 모든 신구의(身口意) 삼행(三行)을 옳게 하게 만드는 힘은 참나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비(非)참나에 있는 것일까. 왜 부처의 비(非)참나는 전혀 힘이 없고, 중생의 비(非)참나는 무지막지하게 힘이 센 것일까.

만약 부처에게는 비(非)참나가 없다면, 예전의 중생시절의 비(非)참나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참나가 “아! 괴롭다 수행을 하자” 하고 마음을 낸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참나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락(樂)’이므로 괴로울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행을 하자고 결심한 것은 비(非)참나이다. 어떻게 부처가 “부처가 되자” 하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떻게 이미 ‘참나’인 ‘참나’가 “참나가 되자” 하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참나는 정신이상자이거나 중증 치매환자이다. 그런데 막상 부처가 되자 비(非)참나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신축건물이 준공되자 공사장 인부들이 지구상에서(공사장이 아니다)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과 같은 현상이다: UFO, Big Foot, 외계인 납치사건, 연예계 가십 등을 다루는 미국의 황색 주간지 ‘인콰이어러(The National Enquirer)’에나 나옴직한 괴이한 일이다.

사노라면 즐거운 순간들도 있는데, 이는 참나가 느끼는 것인가, 아니면 비(非)참나가 느끼는 것인가? 만약 보고 듣고 아픈 줄 아는 것이 참나이고 참식(識)이라면(서암스님, 혜국스님, 경봉스님은 바로 이렇게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부처도 상한 버섯요리를 먹고 극심한 고통을 느꼈으며 여러 성문 아라한들도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점을 보면, 그리고 부처와 아라한이 참나인 점을 보면, 보고 듣고 아픈 줄 아는 것은 참나이다), 우리가 겪는 일체의 감정은 참나가 겪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감정인 분노, 시기, 질투, 살의(殺意), 미움, 증오, 낙담, 절망, 우울증도 모두 참나가 겪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참나의 특성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락(樂)‘에 위배된다.

만약 보고, 듣고, 꼬집으면 아픈 줄 아는 것이 참나라면, 생각도 참나가 하는 것이다. 그럼 번뇌·망상도 참나가 일으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참나가 가진 상락아정의 ‘정(淨)’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려면, 참나는 생각도 없고 느끼지도 않아야 한다. 즉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비(非)참나‘이며,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도 ’비(非)참나’이다. (참나 이원론에 의하면 ‘비참나’는 비참悲慘한 나이다. 전혀 가치가 없는 해롭기만 한 존재이다.)

반면에 참나는, 존재한다고 해도, 일체 ‘생각’도 ‘느낌’도 없다. 마치 무생물(無情物) 같은 존재이다. 당신은 이런 존재가 되고 싶으신가?

결론적으로 참나는 존재해도 상락아정(常樂我淨)에서 ‘락(樂’)과 ‘아(我)’는 없다. 왜냐하면 느끼는 기능이 없으므로 락(樂)이 불가능하며, 생각이 없으므로 아(我)도 불가능하다. (생각이 없는 중력重力이나 전자기력電磁氣力에 ‘아我’가 있다고 주장할 정신 나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참나는 돌멩이 같은 무정물(無情物 무생물)이므로 정(淨)은 인정해줄 수 있다. 돌멩이에게는 번뇌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사실은 ‘상(常)’도 불가능하다. 참나에는 생각하는 기능이 없는데, 참나가 ‘상(常 변치 않고 영원히 존재함)’이라는 것은 누가 발견했다는 말인가? 설마 비참나가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고는, 어느 누구도 주장하지 않으리라. 일상적인 물체의 ‘상(常)·(非常)’은 비참나도 목격할 수 있는 일이지만, 우주 끝까지 영원히 존재할 참나의 상(常)을 잠시 존재하는 ‘하루살이 같은 비참나’가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참나가 상(常)이라면, 그 사실을 아는 것은 비참나가 아니다. 그런데 참나에게는 일체의 ‘생각하고 아는 작용’이 없으므로, 참나가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골수 참나주의자라 할지라도 설마 참나가 전지전능(全知全能)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신과 같은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참나가 존재한다면) 참나에게 남은 유일한 특성은 정(淨 번뇌가 없음)뿐이며, 이는 모든 무정물(無情物 무생물)이 가지고 있는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는) 특성이며, 따라서 참나가 되자고 주장하는 것은 무정물이 되자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단멸론(斷滅論)’이다!

한마디로 참나(진아 眞我)는 힌두교 아트만의 변형 내지는 아류인 환망공상(幻妄空想)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뭔가'를 ‘실체’로 인정하면, 즉 ‘시공을 통해서 불변하며 영원히 존재하는 존재’를 인정하면, 온갖 모순이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금강경에서 ‘이일체제상 즉명제불(離一切諸相 卽名諸佛)’이라 한 이유이며, 용수보살이 중론(中論)에서 일체의 ‘실체론적인 주장’을 논파(論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처란, 깨달음이란, 시공을 통해서 발생하는 ‘연기적인 현상’이지 실체가 아니다. 긴 매서운 겨울이 끝나고 봄이 되어 매화가 피면, 그 향기와 미태(美態)를 즐길 일이지만, 같은 매화가 이듬해 봄까지 살아남는 것도 아니고 부활하는 것도 아니다. 매순간 새로운 세상이 벌어지니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계의 신비이다. 결코 되풀이 되지 않을 매 순간이 더없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불교인들이 참나를 맹목적(盲目的)으로 믿는 것은, 중세 유럽이 1,000년 동안 맹목적으로 기독교(기독교 창조신과 기독교 경전)를 믿은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다 흄, 스피노자 등의 깨인 철학자들이 나타나 기독교를 맹렬히 비판한 것이다. 이미 로마시대의 철학자들이 기독교신앙을 미개한 신앙으로 비웃었지만, 일단 로마제국과 중세유럽의 국교가 되자 권력의 힘에 의해서 기독교사상이 모든 사람을 광적(狂的)으로 구속한 것이다. 유럽인들이 제정신을 찾는 데는 자그마치 2,000년 가까이 걸렸다.

마찬가지로, 어처구니없는 힌두교 아트만론(有我論)을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비판하였건만, 불교인들이 다시 유아론의 무지와 망상 속으로 굴러 떨어진 지 벌써 2,000년 가까이 된다. 이제 불교인들도 깨어날 때가 되었다. 힌두교 창조신과 서양 유일신만 비판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오래 묵은 환망공상(幻妄空想)도 비판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환망공상이 인류역사상 모든 신과 망상적인 종교와 철학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착각한다. 자기(我)라는 것은 변치 않는다고.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의 몸과 마찬가지로, 마음도 끝없이 변한다. 몸은 아메바에서 물고기로, 파충류로, 포유류로, 영장류로, 마침내 인간으로 자그마치 35억년 동안 끝없이 변했다. 그리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변한 몸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최신형의 하드웨어(고성능 컴퓨터의 몸체)를 낡은 소프트웨어로 어떻게 돌릴 수 있을까? 남이 뛰니 나도 뛰지 않을 수 없는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처럼, 남이 뛸 때 나는 뛰지 않으려면, 큰 돌, 큰 산, 큰 강, 큰 바다, 큰 나무, 하늘, 땅, 불, 태양, 석신(石神), 산신(山神), 수신(水神), 용신(龍神 naga), 목신(木神), 천신(天神), 지신(地神), 화신(火神), 태양신을 믿고 살면 된다. 도망가던 타조가 흙에 머리를 묻는 것처럼, 미개한 신앙에 마음을 묻고 살면 된다.

잊지 마시기 바란다. 나(我, 몸과 마음, 심신복합체, physio-mental composite)란 끝없이 진화한다. 그래서 무아(無我)이다.

지평선 너머에는 지평선이 없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지평선이 있을 뿐이다. 아무리 아(我)를 넘어선 아(我)를 찾으려 해도, 또 다른 아(我)일 뿐이다. 미개한 유심론(참나론 眞我論 atman론)은 유물론이다. 오히려 진화한 유물론이 유심론이다.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통찰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인류과학·문명의 역사는 무수한 과거의 미개한 유심론(唯心論)들과 유신론(有神論)들의 공동묘지이다.

It is not that there is no horizon over the horizon. Simply there is another horizon. However hard you may try to find 'self beyond self', it is just another self. Primitive spiritualism such as atmanism is materialism. Rather, evolved materialism is true spiritualism. Because it provides us with new perspectives and insights on human being. The human history of sciences and cultures is a cemetery for the countless bygone primitive spiritualisms and theisms.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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