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과 주인공조차 구별 못하면서"
"한마음과 주인공조차 구별 못하면서"
  • 조계종 포교사 용운 거사
  • 승인 2014.12.24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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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균 교수의 '한마음요전' 비판에 대한 반론

강병균 교수의 '대행 스님의 기이한 생물학'에 대해 포교사 용운 거사가 반론을 보내왔다. 용운 거사의 반론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불교닷컴의 연재 내용 중 강병균 교수의 ' 지적설계론과 주인공 신학'에 관한 글을 읽던 중, 과학적 견해는 물론이고 불교의 기본적 교리도 이해 못하고 기술한 내용에 절로 한숨이 나와 개인적으로나마 간단한 반론을 적어본다. 또한 기본적인 수준도 갖추지 못한 이런 글을 싣는 불교닷컴에 대해서도 실망과 탄식을 금할 수 없다.

글에서 강교수는 '한마음'과 '주인공'에 대해 “마치 바라문교(婆羅門敎 Brahmanism)의 브라흐마(梵) 전변설(轉變設)이기도 하다.”며 “바라문교와 기독교가 혼합된 괴이한 사상이다.” 등의 내용을 기술했다.

먼저 강병균 교수는 불교의 '공(空)'에 관한 기본적인 교리나마 이해하고 비판을 하셨는지 묻고 싶다.  강교수는 선종에서 흔히 말하는 '주인공(主人公)’과 대행선사의 ‘주인공(主人空)’의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불교에서 말하는 ‘한마음(一心)’에 대해서 전혀 연구해 보지 않았다는 점이 논조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한마음에 대해서는 <기신론(起信論)>에서 한마음(一心)으로 논의 근본 주체를 삼은 내용을 이해했는지, 보조국사의 참마음(眞心)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원효의 한마음(一心)에 대해서 얼마나 연구해 보았는지 되묻고 싶다. 강교수는 대행선사를 비판하면서 싸잡아 대승기신론과 보조국사와 원효의 핵심사상을 괴이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더구나 강교수는 한마음과 주인공 조차 구별 못하고 있다.

한마음은 앞에서 말한 선종의 조사들은 제외하고도, 티벳불교 금강승의 견해 제일이라 말하는 닝마파의 족첸(大圓滿), 수행제일이라는 까귀파의 마하무드라(大手印)에서도 말하는 ‘대우주적 본성’이 그것이며, 그 성품의 바탕은 공(空), 즉 용수의 중관학에서 말하는 ‘공성(空性)’이다.

주인공(主人空)은 소우주적 실천행이면서 모든 생명 존재 각자에게 내재된 청정한 자성이되, 이것의 바탕은 역시 공심(空心)이지만, 또한 선사들이 말하는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평상심’이기에 ‘생활 속의 불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조론'에서는 '제법의 자성은 성품이 공하기(性空) 때문에, 진여(眞如)의 성품이 공한 것(性空)이 법의 성품(法性)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이렇게 본래 하나인 그 성품의 바탕은 모두 공한 것으로, 주인공(主人空)과 한마음의 근원을 각 논서에서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강교수는 기독교의 유위적인 유일신 개념과 불교의 중관(中觀)적 관점에 대한 차이점을 이해 못하기에, 한마음과 주인공에 관한 기본적인 개념조차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I. ‘대행 스님의 진화론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에 대한 비판
 
강교수는 '한마음 요전‘에는 UFO와 수성, 금성, 화성, 목성에 살고 있는 외계인 등 기괴한 내용들이 여기저기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라고 했다.

그렇다면 외계생명체에 대해 언급한 ‘스티븐 호킹’ 교수의 견해도 기괴한 견해란 말인가? 또한 세계적인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그의 저서 ‘코스모스’에서 밝힌 견해도 기괴한 견해란 말인가? 그는 불교와 거의 유사한 힌두교의 우주관을 높이 칭송했다. 힌두교와 불교의 우주관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여러 불교 경전, 아함경(阿含經)과 대루탄경(大樓炭經), 기세경(起世經) 등에서 언급된 우주의 창조와 파괴, 여러 우주의 하늘 세계와 생명체들(이 생명체들은 오늘날 개념으로는 명백한 외계인이다.)에 대한 기술은 무엇이란 말인가? 대체 강교수는 무엇을 근거로 그것을 기괴하다 말하는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면 기괴한 것인가?

또 강교수는 진화론에 대해서 언급했다. 한마음요전의 제 8장 ‘윤회와 진화’에서,
<<예를 들어 꼬리가 있는데 그 꼬리가 불필요하다고 느끼게 됨으로써 꼬리가 사라졌고, 날개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됨으로써 날개가 생긴 것이다.>>
는 구절을 인용하고, 어설프게 얻어들은 진화론이 엉터리라고 했다. 강교수는 제 정신인가? 오늘날 공룡이 새들의 조상이라는 것은 과학자들이 제시한 설이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날개가 필요하다고 느끼니까 날개가 생겼다는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진화에 대해서는 과학계에서는 이미 어느 정도 접근이 되고 있다. 포항공대 교수라는 강교수가 설마 양자물리학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대행선사의 마음의 진화론과 양자물리학이 말하는 우주와 물질과의 관계는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물질을 구성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생각이나 개념, 정보들이다."
William Arntz 의 'What The Bleep Do We Know(양자물리학의 이해)’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길게 인용할 수는 없지만 생각이 물질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이미 양자물리학에서 증명된 이론이다.
강교수는 현대진화이론에서 이미 거의 배제된 용불용설을 들먹이니 그의 과학적 지식 수준에는 한숨이 나온다.

또 수영선수가 물갈퀴를 원한다면 물갈퀴가 생겨야 대행선사의 이론이 맞다는 술취한 주정뱅이같은 억지를 부린다. 그것은 강교수의 억지이지 불교의 윤회론도 아니고 대행선사의 마음의 진화론도 아니다. 또 마음만 낸다면 금메달도 따놓은 당상이라고 야료를 부린다. 그렇다면 나도 묻고 싶다. 금메달 따고 싶다고 마음 내는 선수가 세상에 단 한 사람 뿐인가? 많은 선수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금메달을 따고자 마음 내고 실천한다. 누가 금메달을 따겠는가? 강 교수는 매번 놀다가 시험치는 순간에 마음 한 번 내면 만점이 나온다고 생각하는가? 교수라는 양반이 어찌 초등학생 같은 억지를 신문에 집필하는 지 참으로 의문이다.

강교수가 말한 식으로 똑같이 비꼬아 본다. - 강교수는 진화론 좀 공부하시라. 강교수의 주정뱅이 같은 억지는 혹독하게 비판을 받을 필요가 있다. 어설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과학용어로 포장해서 선량한 대중을 미혹(迷惑)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대중(무명중생 無明衆生)은 ‘포항공대 교수가 잘 몰라서 한 소리’인 줄 모르고 진리인양 맹목적으로 추종한다. – 앞의 글은 강교수가 말한 식으로 똑같이 비꼬아 보았지만, 강교수는 여기서도 선량한 대중을 모두 어리석은 바보로 모는 실수를 범한다. 어리석은 대중 중에서도 강교수보다 현명한 사람은 지천으로 많다. ‘천하는 넓고 고수는 많은 법이다.’

‘날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날개가 생긴 것이 아니다.’라고 강교수는 대행선사를 비판한다. 그러나 오늘날 양자물리학에서는 ‘만일 의식을 통해 소량의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다면, 빅뱅을 일으키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What The Bleep Do We Know’참조). 생각이 빅뱅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양자물리학의 관점인데, 이런 말을 한 사람들은 모두 세계적인 권위의 물리학자들이다. 강교수는 양자물리학계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은 분이신지? 아니면 강교수는 수억 년 전 공룡들의 마음까지 알고 있는 신통력을 가진 분인지?

대행선사를 기괴하다고 비판하던 사람이 스스로 기괴한 오만을 부리니 묻는다. 강교수는 수억 년 전 공룡들이 날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생각 안 했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는지? 아니면 수억 년 전 공룡들의 마음을 알아내는 신통력에 관한 어느 대학의 학위를 받았는지 묻고 싶다. 단언하건대 대행선사를 비판하면서 강교수는 스스로 비판하던 그물에 갇히는 오류를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다. 마치 머리만 숨기면 사냥꾼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냥감을 닮았다.

점진적인 진화의 예를 들어 대행선사를 비판하고자 하면서, 실은 강교수는 대행선사의 진화에 대한 말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눈은 처음에는 완벽한 형태가 아니었으며, 진화를 통해서 원시적인 눈이 지금의 복잡한 눈으로 발달한 것이다. ' 이런 강교수의 주장이 ‘미생물에서부터 수 없는 시간을 거쳐 인간으로까지 진화했다.’는 대행선사의 말과 무엇이 다른지 묻고 싶다. 강교수는 국어의 독해 능력도 떨어지는가?

“올챙이가 ‘나는 꼬리가 필요 없다’고 느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올챙이에게는 그런 생각은 고사하고 ‘꼬리’라는 개념조차 없기 때문이다.” 라고 강교수는 말한다. 다시 묻는다. 올챙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아내는 신통력이 그대에게 있는가? 아니면 올챙이의 생각을 알아내는 학위를 어떤 대학에서 전공하고 학위를 받은 적이 있는가? 강교수는 증명할 수 없는 것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한심한 오류를 계속 범하고 있다. 믿든지 말든지 간에, 적어도 대행선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그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강교수는 그나마 여러 사람들에게 그런 능력을 인정받은 적이 있기나 한가? 그렇지 않다면 입을 다물어야 한다.

II. ‘대행 스님의 주인공과 영혼’에 대한 강교수의 견해 비판

강교수의 어리석음은 도가 지나칠 지경이다. 강교수는 “대행 스님의 가르침에서는 이 영혼이 ‘주인공’이라는 옷을 걸치고 나타난다. (불교용어인 주인공主人公은 ‘주인님’이라는 뜻이다.)” 라고 말한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앞에서 말했듯이 강교수는 주인공(主人公)과 주인공(主人空)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무아사상과 위배된다는 한심한 비판은 바로 이 용어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결과다. 공부 좀 하고 나서 비판하시기 바란다.

강교수는 또 “주인공을 믿고 주인공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대행은 가르친다. - 중략- 따라서 대행의 불교는 ‘유일신교적 불교’라 아니할 수 없다.”고 허튼 소리를 한다. 그럼 묻는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공덕의 어머니’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믿고 맡겨야 한다는 것은 선종(禪宗)에서 누누히 강조하는 임운수행(任運修行)이다. 방하착도 같은 도리다. 그것도 모르면서 무엇을 비판한다는 지 한심스럽다. 유일신교적 불교라는 허튼 소리는 마찬가지로 ‘주인공’이라는 용어조차 이해 못한 결과다. 강교수는 공부 좀 하고 비판하시라. 당장 책이나 몇 줄 읽어서 비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강교수는 “대행은 자기 주인공을 ‘아빠(daddy)’라고 불렀다.” 고 하면서 기독교와의 유사성을 들었다. 참으로 한심해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다. 한마음요전을 읽었다면 그 때가 언제인지 강교수는 알 것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행선사의 초등학교 나이 시절 이야기다. 강교수는 지금 홀로 산 속에 버려지다시피 한 초등학생 나이의 소녀가 내면의 불성을 ‘아빠’라고 불렀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길게 보자면 계속 산 속을 떠돌면서 아직 완전한 수행을 이루기 전의 일이다. 여기에 대해 굳이 다른 반론이 필요하겠는가? 나는 그가 진짜 교수가 맞는 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초등학생의 상상 속의 친구 ‘아빠’ 이론을 비판하는 대학교수라니!

“병은 주인공에 맡기라던 대행도 치과치료는 받았는데” 라고 강교수는 말한다. 기도하는 기독교인이라도 공부는 열심히 해야 우등생이 되는 것은 초등학생도 아는 사실이다. 강교수는 기독교인이 신에게 맡기고 공부는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우등생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요즘은 병원에서도 치료와 병행해서 힐링 명상이라던지 여러 방법으로 마음을 안정시켜야 치료가 빠르다는 것도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의학계에서도 이미 정설이 된 이론을 강교수는 혼자 부정한다. 언제 강교수가 의학도 전공했는 지 참 신통하다.

강교수는 마음에 맡기란다고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하늘만 쳐다보라고 가르친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유치한 비판을 반론하는 것조차 덩달아 유치해지는 것 같아서 당황스럽다. “치통은 기도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라고 강교수는 말한다. 한마음요전에서 누가 치통이 기도하면 사라진다고 했는가? 물론 종교인이라면 기도하면 치통도 좀 덜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종교인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불필요하겠지만 굳이 언급하자면 대행선사는 수술 때 마취하지 않고 수술한 적이 실제로 있으며, 그 목격자는 한두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한다고 해서 치통이 사라진다고 하지 않으며, 한마음선원에서는 ‘기도’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마음의 안정을 취하면 아픔도 덜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며, 그것은 이미 숱하게 증명된 방법이다. 의학계에서도 일정 부분 인정하는 사실을 부정한다면 강교수의 증거는 무엇인가? 강교수의 자만과 아집, 고정관념 외에 별 다른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

강교수의 몰이해는 끝이 없다. 무식이 하늘을 찌른다. “대행 스님의 가르침은 ‘병이 나면 주인공에게 다 맡기라’고 한 반면에, 미국 사이비종교 크리스천 사이언스(1879~)의 창시자 메리 베이커 에디는 “병은 환영”이라고 주장했다.” 고 한다. 한술 더 떠서 “서양인 기독교신자인 그녀는 동양인 불교승려보다도 더 지독한 유심주의(唯心主義)적 입장을 취했다.”고 주정을 한다. 통탄할 무식함이다.

삼라만상 온 우주 조차도 ‘환(幻)’이라는 것은 불교의 기본적 교리이다. 그래서 주인공(主人空)이다. 그 바탕이 공성이기 때문이다. 불교계의 덕망있는 선사가 기본적 교리인 금강경 사구게 조차 모르는 것으로 아는가? 강교수는 대체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아마 정말 몰라서 그랬는 지도 모르니 친절하게 금강경 사구게를 한번 읽어보시라고 권한다. 강교수에게 진심으로 조언하건대 자만은 학문의 독이다.

또한 강교수는 명백한 사기를 친다.

대행선사의 치병능력을 들어서 비판하면서 “병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환상일 뿐이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에디의 선언을 인용하는데, 이거 에디란 사람이 어디서 뭐하던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금강경의 ‘점심(點心)’의 명백한 표절 아닌가?

현대적으로 말하면 먼저 저작권을 가진 불교의 구절을 굳이 에디라는 듣보잡에게 저작권을 주자는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명백한 사기는 이것이 아니라 그 다음 인용 구절이다. “병은 존재하나, 자신의 주인공의 힘으로 다 고칠 수 있으니” 라는 구절에서 “병은 존재하나” 이 구절은 좋게 해석하자면 불교 교리에 대한 무식함의 표출이오, 덕 높은 선사를 만나본 적 없는 메마른 인생의 결과다. 불교교리의 기본을 갖춘 불자라도 ‘병이 존재한다.’는 비불교적 망언은 하지 않는다.

삼라만상이 다 환(幻)이라는 기본 교리조차 숙지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헛소리가 나온다. 이것은 방송에서 인터뷰를 편집해서 전혀 다른 소리로 만들어 버리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내가 보건대 의도했건 안했건 간에 강교수는 언어의 편집을 통해서 명백한 사기를 쳤다. 강교수는 대행선사에 대해 그림자 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이 한 구절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III. 대행 스님의 유사불교적인 지적설계론에 대한 비판

강교수는 자신의 얕은 종교적 소양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점이 너무 자주 나타난다.
그는 글 속에서 여러 번 대행선사의 가르침을 기독교나 천주교와 동일시한다. 강교수 자신이 불교와 기타 종교와의 차이점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으니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믿고 맡겨서 해결하는 것은 어느 종교나 차이점이 없다. 고기와 우유를 먹던지, 밥과 김치를 먹던지 배고플 때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는 점은 차이가 없는 것과 같다. 단지 먹는 것이 우유와 같은 경우 체질에 안 맞는 사람은 설사를 할 수도 있다는 점이 다르다. 또한 고기만 먹은 사람과 밥만 먹은 사람은 체질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배고플 때 먹는 것은 똑같다. 모든 종교가 같은 점을 찾는다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앞집 순이와 뒷집 영자의 외모에서 비슷한 점을 찾는다면 수없이 많을 것이다. 키가 비슷하다던 지 머리카락 색이 같다던 지, 같은 점을 찾자면 매우 많을 것이다. 그래서 그 둘은 한 사람인가?

유사한 점만 찾아서 나열하면 정말 비슷한 것 같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점을 열거하자면 또 수없이 많을 것이고 그러면 또 전혀 달라 보일 것이다. 강교수는 학문에는 자만이 독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강교수는 헛소리를 계속 한다. “공룡이 사라진 이유는 공룡의 마음이 밝아져서가 아니라, 가장 유력한 이론에 의하면...” 이라는 주장이다. 뒷부분은 강교수의 주장이 아니라 과학계의 연구 결과이니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다만 앞의 “공룡이 사라진 이유는 공룡의 마음이 밝아져서가 아니라…”가 문제다.

강교수는 앞서 범했던 실수를 여기서도 거듭 범한다. 강교수는 수학자이면서도 제시할 수 없는 증거나 상황을 토대로 멋대로 결론을 내린다. 그는 공룡심리학 학위를 받은 적이 없을 것이다. 수억 년 전의 공룡을 불러와서 물어보아야 결론이 날 일을 그건 아니고 자기 말이 맞다고 주장한다.

"대행 스님은 생전에 현대적인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므로," 강교수는 대행선사의 학위 없음을 비판한다.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분의 말이니 틀렸고, 학위를 딴 교수인 자신의 말이 맞다는 이상한 이론을 들고 나오는 것 같다. 강교수를 비판하는 필자도 강교수보다는 학벌이 낮을 것이니 필자의 반론도 무조건 틀렸다고 주장할 것 같다. 그러나 숱한 역사를 살펴보면 글쎄다.

학벌이 좋은 사람이 말이 꼭 맞는 것일까? 더구나 많은 불교계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전혀 그 반대인 경우를 종종 접하게 된다. 그는 또 성급한 결론을 낸다. “불변의 진리가 있다. 배우지 않거나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잘 알 수 없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학벌을 자랑하는 것 같다. 미안하다. 그런데 세상은 배우거나 공부하지 않아도 경험과 체험으로 깨닫는 많은 분들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또한 사족을 덧붙이자면 대행선사의 제자 중에는 강교수보다 학벌 좋은 사람이 적지 않다. 자신만 똑똑하다고 생각하시는지? 다시 한번 강교수에게 조언한다.  ‘자만은 학문의 독이 된다.”

성급한 결론은 강교수의 특성인가? “상략… 선정 체험 그 자체가 진리일 수는 없다. “ 는 말은 진정 강교수가 그런 선정 체험의 과정을 거치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어느 책 한 구절을 단순히 인용한 것인지 궁금하다. 이런 글은 직접 체험을 한 사람들 조차 함부로 입에 올리기 어려운 내용이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해서는 자칫 말장난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강교수는 진리조차 말장난으로 장식하려는 것이 아닌가?

능엄경 등의 경전에 언급된 숱한 삿된 선정에 대한 비유도 그렇다. 어떠한 체험이나 증거도 없이 그는 함부로 대행선사의 가르침을 삿된 선정에 비유한다. – 글로 보아 그는 대행선사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임은 분명하다. - 나는 강교수가 삿된 선정인지 아닌지를 분간할만한 수행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인지 먼저 묻고 싶다.

강교수의 성급한 결론과 무지함은 여기서 극에 달한다. “더 결정적인 사실은 인류역사상 어느 종교경전에도 ‘진화(evolution)’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이것도 명백한 사기다. 강교수는 아마 기독교계 경전 정도로 자신이 종교를 다 안다고 망상에 빠진 것 같다. 불교경전에는 명백하게 인류뿐 아니라, 우주의 진화론적 측면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물론 진화론자처럼 세세하게 진화의 이론을 연구하고 밝히라면 그것은 과학의 몫이지 불교의 몫은 아니다.

불교는 일종의 퇴보론적 진화론과 일반적 진화론이 모두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 우주의 윤회설 속에서 언급된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강교수의 알팍한 불교 지식 때문이다. 여기서 인용하기는 너무 길 테니까 경전 이름만 언급한다. 앞에서 말한 아함경(阿含經)과 대루탄경(大樓炭經), 기세경(起世經) 등이다. 경전의 내용을 이해 못한다면 그것은 불교의 탓이 아니라, 강교수 자신의 학문적 이해능력 부족이다

강교수에게 다시 말한다. 자만은 학문의 독이다.

강교수는 자신의 무지함을 또 이렇게 외친다. “완벽한 주인공 같은 개인(영혼)의 힘이 아니다. 대부분의 종교적 망상은 바로 이 개별영혼에 대한 광적인 과대평가에 기인한다.” 무지해도 이렇게 무지하다면 대책이 없다. 주인공을 개별영혼으로 인식하는 이 저급한 이해력은 한자의 공(公)과 공(空)도 구별 못하는 무식함이다. 마치 중관학의 ‘공성(空性)’을 기독교의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강교수의 학문적 이해력에 대체 어떻게 누누히 설명해야 할 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비판을 하려면 제대로 공부를 하고 비판을 하라.

강교수는 로마의 루크레티우스를 인용하면서 대행선사를 비판한다. 강교수의 비판은 루크레티우스의 설을 진리로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그런데 언제 로마의 루크레티우스가 세계적인 성자로 인정받고 모든 사물을 달통한 자로 추대되었는 지 궁금하다. 다른 한편에서 그의 설을 반대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인가? 그건 그렇다치고 우선은 대행선사와 루크레티우스가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나뿐인가? 어째서 강교수는 대행선사와 루크레티우스가 다른 주장을 한다고 생각하는 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살펴보니 강교수가 인용한 대행선사의 글은 모두 방송에서 인터뷰를 편집하듯 모두 대행사의 말을 편집해 사용하는 것을 발견했다.

한마디로 강교수는 대행선사의 가르침을 전혀 엉뚱하게 자신의 생각대로 끼워 맞추고 있다고 느껴진다. 강교수가 표현하는 대행선사는 대행선사가 아니라 강병균이라는 중생이 생각하는 어떤 허상인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에 대한 논의는 의미가 없지만, 또한 이 지면 상에서 얘기해서 될 일은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강교수는 맹목적인 분노를 가지고 있다. 사이비 종교에 대한 분노는 이해한다. 그러나 그 표출은 신중하기를 바란다.

그는 또 ‘한마음요전’을 앞에서는 성경같이 디자인되었다고 비판하더니, 뒤에서는 불경처럼 생긴 책이라고 한다. 디자인을 가지고 비판하는 것도 우습지만, 비판을 하려면 성경 같은 지 불경 같은 지를 확실하게 말해주기 바란다. 비판조차 앞뒤가 맞지를 않으니 한마음요전의 표지를 보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뒤로 갈수록 비판은 광기와 분노로 점철되는 것 같다. 별 다른 뚜렷한 증거도 없이, 그저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만으로 그는 대행선사와 그 제자들을 집단의 광기라고 표현한다. 법은 잘 모르겠지만, 거의 명예훼손 수준이 아닌가? 대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는 것 외에 무슨 이유가 있는가? 강교수는 학문적으로 자신과 다른 교수들은 전부 사기꾼이라고 할 텐가?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그것은 학문하는 자의 올바른 태도는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불교개혁을 갈망한다면 강교수의 눈은 시야가 비뚤어져 있다. 대행선사 역시 불교개혁을 외쳤던 분이지만 강교수와는 그 방향과 실천이 달랐다. 대행선사는 강교수와 의견이 다르다고 강교수를 사이비 교수라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Ⅳ. 강병균교수의 ‘불성(佛性)’에 비판

강교수는 가끔씩 만날 수 있는 수행이나 공부에 대한 집착이 지나쳐 문제가 생긴 수행자의 증상을 보이는 것 같다.

그가 주장한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가능성과 지성’이다. 이것을 일러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이 글은 강병균 교수의 정신세계는 논외로 하더라도, 학문적으로도 참으로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굳이 불교의 가르침을 들먹이자면 그렇게 일어나는 강교수의 모든 생각과 의견은 실은 ‘망상’이며 환의 장난이다. 즉 교리적으로 보더라도 전혀 십만팔천리나 어긋난 주장을 강교수는 펼치고 있다. 불교 기본 교리에 대한 문학적 이해 소양도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망발을 버젓이 신문에 게재할 수 있다니, 참으로 언어도단이다.

학문적 이해 부족을 넘어서 이제는 정신세계까지 의심할만한 발언을 한다. “이것은 석가도 달마도 혜능도 원효도 미처 온전히 보지 못한 것이다.” 강교수는 자신이 석가와 달마와 혜능과 원효의 정신세계를 완전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신통력을 지닌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과대망상증이다. 어떻게 교수라는 사람이 이렇게 자신의 생각만으로 멋대로 결론을 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그 글 아래에 佛性無定 或東或西 難得豫測 於時空間… 등의 원문을 인용하고는 실제로 그 글 위에서는 전혀 다른 얼토당토 않는 번역을 한다. 한문 원본을 제대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원본의 권위를 빌어 마치 자신의 말이 한문 원본에서도 그렇게 되어있는 것처럼 사기를 친다. “불성은 .. (중략) ..부단히 진화하는 존재이다”라는 말이 특히 그렇다. 한문 원본에서 불성이 천변만화 한다는 표현이 불성이 진화한다는 것으로 보여졌나 보다. 불성은 그 바탕이 공성인데 진화한다니 어이가 없다. 불성의 나툼이 진화의 형태로 나타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성이 진화한다면 허공이 진화한다는 말과 진배없다. 불교 교리의 기초 상식도 없는 번역.. 번역도 아닌 사기성 인용이다.

강교수는 자신의 주장대로 학벌이 모자라는 사람에게 큰소리칠만한 좋은 학벌은 분명히 지녔다. 서울대 수학과 출신이니까 그럴만 하다. 그러나 불교에 있어서는 기본적 교리도 이해하지 못하는 유치원생 수준이다. 강교수는 자신의 학벌을 내세우며 정규학력이 없는 대행선사의 가르침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학벌이라는 이름 속에 어처구니 없는 수준의 학문적 이해도를 가진 자신의 공부 경지를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부끄러운 수준의 주장을 신문에 버젓이 게재하는 자신의 출중한(?) 어리석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반론을 쓴 용운 거사는 한용운 선사에게 법명을 받고 환속해 교법사를 지낸 영봉 스님에게 불교를 처음 배웠다. 1986년 대행 스님을 친견한 후 지난 2012년 스님의 열반시까지 가까이서 가르침을 익혔다. 1990년 조계종 포교사 자격증 취득, 해동불교대학 전법사 과정 등을 수료했다. IT 계통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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