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균 교수의 ‘도발’과 용운 거사의 ‘모욕’
강병균 교수의 ‘도발’과 용운 거사의 ‘모욕’
  • 하도겸 칼럼니스트
  • 승인 2014.12.26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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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밝은 대행 스님 욕먹여서는 안돼

불교닷컴에서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이라는 연재를 하고 있는 강병균 교수가 지난 22일 ‘지적설계론과 주인공 신학’이라는 제하로 “대행 스님의 기이한 생물학”을 다뤘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전제부터 일반인들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알음알이’로 시작된다. 또한 “추종”, “무리”, “기독교”, “성경”과 같은 좀 부적절한 표현으로 시작되는 그의 글은 ‘대행스님’을 믿고 따르던 이들이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어 보인다.

나아가 “대행의 사상은 바라문교와 기독교가 혼합된 괴이한 사상”이라며 “특히 치과 치료에서는 ‘주인공에게 맡기지 않고 병원에 들른 업보인지 궁금하다’”며 ‘비아냥’으로 이해되는 말도 있다. 특히 “대행은 ‘모든 것을 주인공에게 맡기라’고 가르친다.”며 이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라’는 유일신교의 신앙고백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 했다. “이는 사족으로 불필요한 감정표현적인 고해성사는 오히려 강교수가 시작한 듯하다”고 한 신도는 지적한다.

“새로 나온 <한마음 요전>에 나온 “UFO와 수성, 금성, 화성, 목성에 살고 있는 외계인 등 기괴한 내용들이 여기저기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그중 진화론도 있다.”며 “대행 스님은 진화론을 공부 좀 하시라. 종교인들은 혹독하게 비판을 받을 필요가 있다. 어설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과학용어로 포장해서 선량한 대중을 미혹(迷惑)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믿다가 믿음이 임계치를 넘어가면, 그다음부터는 그 사람 말이라면 무조건 다 믿는 기이한 현상을 ‘광신’이라고 한다.”라는 식의 말들은 비록 조금 간접적이긴 하지만,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과 함께 한마음선원 사람들을 ‘광신도’로 몰고가는 듯한 오해를 살 수 있다.

나아가, “대행 스님의 가르침에서는 영혼이 ‘주인공’이라는 옷을 걸치고 나타나며, 이 주인공은 치병(治病)·구난(救難) 등의 어마어마한 능력이 있는데, 단지 우리가 주인공을 안 믿어서 그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을 믿고 주인공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한다’고 대행은 가르친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는 말과 몹시 유사하다. 대행은 자기 주인공을 ‘아빠(daddy)’라고 불렀다.”며 대행스님의 수행에 대한 가르침을 몸으로 신중하게 점검하지 않고 단순히 알음알이로 기독교와 연결시키는 우를 범했다.

나는 대행스님을 거의 모른다. 안타깝지만, 예전에 한번 잠시 스쳐지나가다 얼굴 한번 본 것이 다다. 하지만 ‘대행스님’의 가르침은 글을 통해 접한 바 있다. 그 안의 모습은 참으로 맑은 분으로 적어도 신도들에게는 참된 스승이었다. 그 분의 글에는 중도와 공성을 체득한 선지식의 모습이 엿보이며, 참된 자아를 찾은 후 ‘보리행’을 실천하던 모습이 담겨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종정’이니 ‘방장’이라는 허울속에서 ‘인가’라는 방패로 스스로를 가리던 몇몇 대한불교조계종의 비구 대종사들과는 다른 여여한 승보로서의 ‘불제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존경하는 비구 ‘성철스님’에 버금가는 대행스님의 모습은 ‘비구니’스님들이 지표로 삼아야 할 또 한분의 선지식이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대행스님의 ‘아빠’라는 의미는 대행스님의 독특한 의미부여일 따름이다. 참된 자신을 ‘엄마’라고 불러도 그것은 잘못이 안된다. 그래서 대행스님처럼 수행에 성취가 있다면, 자성을 볼 수 있다면 아무 문제가 안된다. 오히려 기독교의 ‘아버지’라는 선입관이나 편견이라는 덫에 갇힌 것은 강병균교수가 아닐까? 나아가 강교수는 대행스님을 무속(巫俗 shamanism)에 등장하는 동자신(童子神) 나아가 크리스천 사이언스 창시자 메리 베이커 에디라는 기독교 역사상 유일한 여성교주와도 관련짓는듯한 인상을 주었다. 스스로의 ‘자만’을 넘어서 대행스님과 그 제자들에 대한 ‘모욕’으로 변질된 듯해서 매우 안타깝다.
 
대행스님의 주장대로, “병은 존재하나, 자신의 주인공(마음)의 힘으로 다 고칠 수 있으니 주인공에게 맡기라”는 말은 그 나름대로 스스로가 모두 부처임을 믿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얘기한 것일 따름이다. 방편 가르침으로 실제로 이 말씀에 의지해서 심인성의 병을 고친 사람도 있다. 모든 사람이 모든 병을 고칠 수는 없다는 일반적인 명제로 스님의 법문을 공격하는 것은 그리 좋은 방식이 아닐 수 있다. 나아가 “의료계에는 엄청난 재앙”이라는 식으로 몰고가는 것은 선객으로서 할 일이 아니다. 적어도 그의 글에서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보살도에서의 ‘하심’을 보기는 어렵다.

중생에 대한 경계등을 위하는 등의 특별한 이유가 없이, 글 가운데 ‘하심’이 부족하다는 측면에서 아무리 서울대를 나온 박사로 포항공대 교수를 했으며,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했어도 말짱 헛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특히, “대행 스님은 생전에 현대적인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므로... 이런 황당무계한 진화론이 나오는 것이다.”라는 부분은 과연 강교수가 매일 뭘 위해 ‘참선’을 하는가 마저 의심케 할 수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헌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주재자, 참자기가 있다.”는 대행스님의 표현은 알음알이가 아니다. 부처님의 등각묘각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성취한 ‘선지식’만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선정을 통해서 나온 이런 말씀을 단순한 “선정체험”으로 봐서는 안된다. 얼마전 TV를 통해서 본 ‘한마음선원’사람들은 ‘조계종’의 타락과 부패에도 연연하지 않고 올곧이 참된 자아를 찾기 위해 열심히 수행정진하는 불자의 모습이었다. 그 스승의 그 제자의 모습이었다. 아울러 그들은 ‘불교’를 넘어 새로운 개신불교나 민족종교로 나갈 일부 승려들이 불편해 할 수 있는 의도성조차 없어 보인다. 스님과 신도 모두가 오로지 정법에 대한 바른 의도와 의지를 갖고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특히, 강교수는 “문어 수컷은 강간의 명수이며, 말을 안 듣는 암컷은 잡아먹는다. 인간과 매우 유사하다.” 등의 표현으로 내용전개상 꼭 필요하지 않는 말로 독자들의 혐오감까지 끄집어 내고 있다. 무엇이 강교수를 이런 글을 쓰게 했는지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적어도 강교수는 이 글을 쓸 때 스스로를 바로 바라보지 못했다는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잠시라도 스스로를 잃은 이가 즉 주인공이 아닌 이가 스스로의 글에 대한 점검없이 신문에까지 게재한 것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연민이 든다고 한 도반이 전한다.

지난 24일 대행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은 포교사 용운 거사라는 분이 "한마음과 주인공조차 구별 못하면서"라는 제하의 강병균 교수의 '한마음요전' 비판에 대한 반론을 불교닷컴에 보내 게재했다. 용운거사는 “강 교수의 글을 읽던 중, 과학적 견해는 물론이고 불교의 기본적 교리도 이해 못하고 기술한 내용에 절로 한숨이 나와 개인적으로나마 간단한 반론을 적어본다. 또한 기본적인 수준도 갖추지 못한 이런 글을 싣는 불교닷컴에 대해서도 실망과 탄식을 금할 수 없다.”는 말로 시작되었다. 시작부터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을 연상케한다.

“강교수는 제 정신인가?” “대행선사를 기괴하다고 비판하던 사람이 스스로 기괴한 오만을 부리니 묻는다.” “강교수는 국어의 독해 능력도 떨어지는가?” “믿든지 말든지 간에, 적어도 대행선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그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강교수는 그나마 여러 사람들에게 그런 능력을 인정받은 적이 있기나 한가? 그렇지 않다면 입을 다물어야 한다.” “강교수의 어리석음은 도가 지나칠 지경이다” “공부 좀 하고 나서 비판하시기 바란다.” “이런 유치한 비판을 반론하는 것조차 덩달아 유치해지는 것 같아서 당황스럽다.” “강교수의 몰이해는 끝이 없다. 무식이 하늘을 찌른다.” “강교수는 명백한 사기를 친다.” “비불교적 망언은 하지 않는다.” “이런 헛소리가 나온다.” “또한 사족을 덧붙이자면 대행선사의 제자 중에는 강교수보다 학벌 좋은 사람이 적지 않다.”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망발을 버젓이 신문에 게재할 수 있다니, 참으로 언어도단이다.” “학문적 이해 부족을 넘어서 이제는 정신세계까지 의심할만한 발언을 한다.” “불교 교리의 기초 상식도 없는 번역.. 번역도 아닌 사기성 인용이다.”고 주장했다. 용운거사의 위의 말들은 일부 일리도 있고 심정적으로도 동감 가는 부분은 있다. 하지만, 불자로서는 입에 답기 어려운 매우 폭력적인 언사로, 강교수의 도발보다도 심각한 명백한 명예훼손으로 보인다. 앞에 지적한 바와 같이, 강교수의 글이 도발적이고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반론이 아닌 비난을 하는 것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경전에 적힌 것과는 달리 실제 수행을 하다보면, 경계에 따라 불교는 유아이기도 하고 무아이기도 하고 유아가 아니기도 하고 무아가 아니기도 하다. 그런 주장에는 그 수행계제에 따라 그 나름의 다 이유가 있다. 이걸 수행을 하고 있는 강교수가 모른 척한건지 ‘무아’론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튼 강교수의 비판은 비난에 가까운 안타까운 부분이 있다. 부처님의 법은 정해진 ‘체’가 없고 회통하는게 제일이어서 귀하다는 말이 떠오른다. 대행스님이 말하는 주인공은 하나님이 아니라 '참나'의 다른 표현일 따름이다. ‘아빠’라는 표현도 의미상 ‘일심’이기도 하고 ‘일물’이기도 하다. 물아일체를 보면 그게 다른 말이 아니기도 하다. 선지식의 말씀은 시절인연이 있다. 그 회상에 모인 사람들에 대한 말로 방편설이라고도 한다. 그게 스님의 책에 정착이 되었다고 해도, 그걸 밑과 끝이라는 맥락없이 일반화시켜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부처님도 근기에 맞춰서 설법하는 ‘대기설법’을 하셨다. 하나만 인용하거나 늘여놓으면 서로 모순이 될 수 있는 말이지만, 당시는 설법대상들에게 매우 유효한 효유적인 방편이었다. 단 한번의 설법이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것은 아니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이치다. 이 삶의 죽음 뿐만아니라 다음 세상의 그 다음까지 즉 천년 만년의 안목으로 일희일비하지 않고 수행해야하는게 불자다. 한번에 한마디로 모든 중생을 감화시키고 구제할 수 있었다면 왜 석가모니부처님은 안하셨겠는가? 강교수는 이 점을 참구해야 한다.

21세기에 대행스님처럼 깨친 선지식으로 보살행을 한 분이 우리 불교계에 몇명이나 계셨던가!

아울러 대행스님께 배웠다는 용운거사는 도발을 하는 강교수에 대한 불교적인 내용 비판이 아니라 ‘명예훼손’으로 비난을 하는 것은 오히려 대행스님께 누가 될 따름이라고 감히 충고하고 싶다. 특히 스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다거나 강교수보다 학벌 좋은 사람이 적지 않다라는 부분은 스스로 강교수에 대한 비판으로 제시한 ‘초등학생의 유치함’에 스스로 해당되지 않는지 점검해야 한다. 대행스님조차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따름이다. 스스로의 자성을 찾는데 방해가 된다면 부처도 죽일 수 있어야 하는게 불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선객인 용운거사의 비난은 오히려 강교수의 도발대로 마음이 넉넉지 못한 신도의 모습으로 오해될 소지가 없지 않다. 용운거사 스스로 밝힌 것과 같이 불필요한 ‘사족’으로 오히려 돌아가신 스님과 제자들에게 페가 될 수 있는 언사에 신중하지 않는 모습으로 보여질 수 있다. ‘하심’을 깨치고 실천했던 대행스님과 한마음선원 식구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일 수 있어 안타깝다.

우리 불교가 아퍼도 너무 아픈가 보다. 승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재가까지도 많이 아프다. 표면적으로는 재가불자를 대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 훌륭한 수행력을 가진 두 사람인 강병균교수와 용운거사의 도발과 모욕은 현재 우리 불교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드러내는 한 장면으로 기억될까 두렵다.

16권승을 비롯해서 나날이 우리 불교의 현재의 모습에 대한 우려가 드러나고 있다. 재가불자마저도 이렇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또 갚은 것이 과연 부처님이 말한 ‘인과응보’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선인선업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선인이라는 말자체에도 이미 의도성이 있기에 그리 선한 것은 아니다. 악인역시 그렇다. 아무리 나쁜 인연의 씨앗을 뿌렸어도 나쁘지 않은 결과로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 있는게 우리 불교의 가장 큰 장점은 아닌가? 무엇보다도 우리 재가들의 화합과 단결이 필요한 때다.

성철스님에게 법명을 받거나, 대행스님께 가르침을 받은 우리가 이제 승가를 가르쳐야 할 때가 왔다. 언제까지나 승가에게 배우면서 살것인가? 백봉 김기추 거사나 불연 이기영교수를 비롯한 선대의 훌륭한 재가불자는 물론이고 현재의 한국불교연구원의 김종화 이사장, 선도회의 박영재 교수, 불교포커스의 정성운 기자 등 ‘하심’을 실천하는 훌륭한 재가불자의 표상이 참으로 많아졌다.

비온 뒤에 땅이 더 굳는다고 한다. 강교수의 도발에 대해 한마음선원은 일부 일반인들이 가질 수 있는 오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여서 좀 더 쉽게 불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한마음보전’을 준비하는 계기로 삼아줬으면 좋겠다. 특히, 나중에 수정판을 낼 때는 그러한 일부 오해마저도 불식시킬 수 있다면 그것 역시 대행스님의 수행과 업적을 선양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아무쪼록 강교수와 용운거사는 스스로 도발과 모욕에 대해서 어떤 승려처럼 며칠 108배하는 걸로 그치지 말고 대행스님 영전앞에 '3000'배로 참회해주기를 간곡하게 부탁하고 싶다. 그리고 표면적인 악수가 아닌 진심어린 화해를 통해 화쟁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소원하고 싶다. 부처님과 대행스님의 가르침처럼 우리에게 아무런 병이 없는 데 어찌 앙금이 드리울 수 있는가!

불교집안내에서 일어난 일인데 서로 진심으로 참회한다면 사회법이 아닌 불법으로 화해하기를 소원한다. 재가불자 역시 스스로 내고 싶은 의견의 의미를 깊게 들여다보고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으로 소통하고 대화하여 원만하게 회향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이번 소모적이고 암울한 논쟁이 좀 더 생산적이고 맑고 밝은 의견교환이 되는 모든 것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을 따름이다.

내년인 을미년에는 꼭 시간을 내어 대행스님의 저서들을 구해서 자세하게 들여다 보고 싶다. 혹시 이 글을 읽는 한마음선원 관계자가 있다면 ‘한마음요전’을 비롯해서 대행스님의 저서 한 질 구해서 보내주시면 향후 서평쓸 때 더없이 도움이 되겠다. 아니, 꼭 시간내서 한마음선원에 가봐야겠다. 서울의 어느 선원처럼 주지 승려조차도 못만나게 하는 겹겹이 산성을 쌓는 거사나 보살들은 없기를 바란다.

더 이상 참된 재가자들 간의 갈등 즉 ‘재재갈등’은 없어야 우리 불교가 살기에 감히 어줍쟎게 한 말씀 올린다.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기사제보 cetan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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