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의 향기] 원효대사 파계 후 '무애거사' 자처하며 민중 속에서 자유로운 삶 구가
[풍류의 향기] 원효대사 파계 후 '무애거사' 자처하며 민중 속에서 자유로운 삶 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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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3.23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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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복 벗은 뒤 본격 풍류 행각, 민초 위한 불교 대중화에 앞장

서라벌로 돌아온 원효는 다시 독학으로 불도를 닦는 한편, 구법을 위한 행각에 나섰다. 바야흐로 원효의 풍류행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양산 영취사로 낭지대사(郎智大師)를 찾아가 <법화경>을 배우고, 고대산 경복사로 보덕화상(普德和尙)에게 찾아가서는 <열반경>과 <유마경>을 배웠다. 그리고 다시 서라벌로 돌아와 <발심장>을 지어 포교에 힘쓰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세월은 물 흐르듯 흘러갔다. 원효는 요석 공주와 잠자리를 함께 하고 파계하여 스스로 법의를 벗고 속인의 옷으로 갈아입은 뒤 자신을 가리켜 소성거사(小性居士) 또는 복성거사(卜性居士)라고 불렀다.

그의 깊은 뜻을 제대로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소성이나 복성이나 자신을 한껏 낮추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특히 복성의 복(卜)자는 아래 하(下)자의 아래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는 또 무애거사라고 자처하기도 했는데, 이는 글자 그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즉 자유롭게 풍류를 즐기겠다는 뜻이었다.

-모든 것에 거리낌 없는 사람만이
한길로 생사의 번뇌를 벗어날 수 있으리. -
(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

그는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통을 얻어서 둘러메고 방방곡곡을 다녔는데 그 모습이 하도 괴상해 그것을 두드리고 노래하고 춤추며 다니니 수많은 사람이 재미있게 구경했다.

그가 두드리고 다닌 박통이 바로 ‘무애박’이요 그의 노래가 바로 ‘무애가’였으니 원효는 그동안 왕실과 귀족 중심이었던 불교를 서민 대중을 위한 종교로 끌어내리기 위해 이처럼 민중 속에 뛰어들어 충격적인 방식으로 포교를 했던 것이다.

불법의 진리를 요즘의 유행가처럼 서민과 친근한 향가로 지어 알아듣기 쉽게 부르며 포교를 했는데, 원효의 이 독특한 교화방식 또한 그 나름의 풍류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근래 일부 학자들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월명사의 ‘도솔가’나 광덕 또는 그의 아내가 지었다는 ‘원왕생가’도 사실은 원효의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백제가 망한 것은 원효가 43세가 되던 660년. 그 이듬해에는 무열왕이 죽고 문무왕이 즉위했다. 계속된 전쟁으로 백성도 군사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는데 문무왕은 국상중임에도 당군과 협력하여 고구려 정벌전에 나섰다.

그때 원효는 다시 의상을 데리고 두 번째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망국 백제 땅을 가로질러 서해안에서 배를 타고 황해를 가로지를 계획이었다. 두 사람이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 어느 포구에서 배가 뜨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이었다.

다 쓰러져가는 움막 속에서 밤을 보내던 원효는 잠결에 갈증을 느껴 어둠 속을 더듬다가 바가지가 손에 잡히자 거기에 담긴 물을 단숨에 들이켜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에 눈을 떴는데 이게 웬일인가. 간밤에 그렇게 맛있게 들이킨 물바가지의 물이 실은 해골바가지에 고인 썩은 물이 아닌가. 보통 사람 같으면 오장육부가 뒤집힐 정도로 구역질이 났으련만 원효는 다음 순간 이렇게 노래하며 덩실덩실 춤추고 돌아갔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사라지면 온갖 법이 사라지는도다! -

그리고 영문을 몰라 멍하니 쳐다보는 의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음 밖에 법이 없거늘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에 가지 않으리라!” 그때가 바로 원효가 대각오도, 크게 깨달음을 이룬 순간이었다.

원효는 의상과 헤어져 다시 서라벌로 돌아오고 말았다. 서라벌로 돌아온 원효는 때로는 가야금도 뜯고 때로는 술집에 들어가 놀기도 하고 때로는 저자에서 자는가 하면, 때로는 산수 간에서 좌선(坐禪)하는 등 가고 머무름에 일정한 행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모이면 설법 강론도 하고, <화엄경>의 내용을 소재로 노래를 만들어 가르치기도 했다.

물고기 잡아 술안주하던 포항 吾魚寺

이처럼 원효는 재가불자, 즉 거사로 살았지만 원효 외에도 당시 신라에는 승속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불법에 정진하고 포교에 힘쓰던 고승이 또 있었다.

그가 교유한 선구적 고승으로는 혜숙(惠宿) 혜공(惠空) 대안(大安) 등이 있었는데, 인생에서나 불문에서나 모두 원효에게는 대선배였다.

또 이들은 한결같이 권력에 빌붙어 부귀와 안락만을 꾀한 속물들과는 달리 오로지 불교의 서민대중화로 중생제도에 힘쓰고, 풍류정신에 투철했던 참된 도사(導師)였다.

대안은 용모가 괴상하게 생긴데다가 늘 장터를 떠돌아다녔다. 그러면서 “대안이요 대안!”하고 동발을 두드리고 소리치며 다녔으므로 대안이 곧 법명이 되었다.

대안과 원효는 이른바 ‘각승(角乘)’의 인연으로 얽힌 사이였다. 당시 임금이 당에서 새로 간행된 <금강삼매경>을 얻었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서 황룡사에서 대규모 법회를 열고 이 경전의 설법을 듣기로 했다.

왕을 보좌하는 귀족 승려는 많았지만 아무도 강론을 맡을 정도의 실력이 없었다. 그래서 괴상한 용모에 괴이한 행동을 하고 다니지만 박식하다고 소문난 대안에게 부탁했다.

<금강삼매경>을 뒤적거리던 대안이 이렇게 말했다. “이 경을 강론할 사람은 오로지 원효밖엔 없소이다!” 그때 원효는 고향의 초개사에서 논(論)과 소(疎)를 짓고 있었다. 왕의 부름을 받은 원효가 사자에게 일렀다.

“이 경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으로 대종을 이룬 것이니 우차를 마련하여 두 뿔 사이에 책상을 얹고 그 위에 붓과 벼루를 놓으라.” 그렇게 하여 우차에 올라앉아 서라벌로 가면서 경의 요지를 간추려 지은 것이 <금강삼매경론> 5권과 약소(略疎) 3권이니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 ‘각승’이라고 했다.

서라벌에 이르러 황룡사 경내에 들어선 원효는 왕과 대신을 비롯한 수천 승속이 운집한 가운데 법상에 올라 <금강삼매경>을 강론하기 시작했다.

혜공은 본래 귀족의 집에서 품 팔던 노파의 아들이었다. 그는 언제나 이름 없는 작은 절에 살면서 술 마시고 취하면 삼태기를 지고 미친 듯이 노래하며 춤추고 돌아갔다.

그래서 사람들이 혜공이라고 부르지 않고 ‘부궤화상’이라고 부르고, 그가 살던 절도 부개사(夫蓋寺)라고 불렀다. 부궤 · 부개는 곧 삼태기란 뜻이다.

만년을 현재 경북 포항시 오천읍 항사동의 오어사(吾魚寺)에서 보냈는데, 당시 이름은 항사사(恒沙寺)였다. 항사사가 오어사, 즉 ‘내고기절’이란 이름으로 바뀐 데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가 서려 있다.

원효가 자주 찾아가 저술에 관한 의논도 하고 함께 술 마시고 놀기도 했다. 어느 날 원효와 혜공이 시내를 따라가며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서 안주로 삼아 술을 마시다가 돌 위에 똥을 누었다. 혜공이 원효의 똥을 가리키며 이렇게 농담했다.

“그대가 눈 동은 아마도 내가 잡은 물고기일 거요!” 아마 원효도 똑같이 응수하며 희희낙락했을 것이다. 그 옛날 고승들의 풍류를 즐김이 이처럼 멋있었다.

원효의 풍류기행에 얽힌 일화를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지만, 후배 의상이 당에서 귀국해 양양 낙산사(洛山寺)를 창건할 때 낙산을 찾아가다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일이며, 설악산 영혈사(靈穴寺)에 있을 때에 낙산사 홍련암으로 의상을 찾아갔다가 식수가 없기에 영혈사 샘물을 끌어왔다는 전설, 요석공주와 아들 설총을 데리고 동두천 소요산 자재암을 짓고 세 식구가 함께 수행했다는 이야기 등은 유명하다.

또한 전국 어디를 가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절이 없는 곳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것도 원효가 남겨준 크나큰 자취라고 볼 수 있다.

민중의 성자로 산 70년

무애거사 원효는 신문왕 6년(686) 3월 30일 음력 서라벌 남산 기슭의 혈사(穴寺)에서 세수 70세를 일기로 장엄한 서사시적 일생의 막을 내렸다.

혈사의 위치가 어디인지 지금은 알 수가 없으나, 그가 세상을 뜨자 아들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소상(塑像)으로 진용(眞容)을 만들어 부친이 가장 오래 머물던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사모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소상은 물론 그 옛날 분황사도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고 없다.

원효는 반야사상의 대요인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진리를 풍류 한 마당으로 보여주고 간 민중의 성자요 보살이요 민족의 스승이며 위대한 풍류도사였다.

/ 기사제공 주간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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