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로 살자? 대승과 초기불교의 충돌
붓다로 살자? 대승과 초기불교의 충돌
  • 진흙속의 연꽃
  • 승인 2015.02.11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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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도법-허정 스님 토론 참관기

토론현장을 다녀왔다. 도법스님이 주창하는 ‘붓다로 살자’라는 슬로건에 대한 토론이다. 토론소식을 접하게 된 것은 허정 스님이 운영하는 카페 ‘암자에서 하룻밤(천장사 홈페이지)’에서다. 도법 스님과 토론을 알리는 글이 이미 공지되었고 스님의 일정표에도 잡혀있었기 때문에 이를 메모해 두었다.

조계사 극락전에서

지난 10일 오후 7시 토론장소인 조계사 극락전에 도착하였다.처음 들어가 보는 곳이다. 이런 토론 자체를 처음 접하였다. 순전히 허정 스님과의 인연 때문에 스스로 참석하였다. 출발하기 전에 참석을 알리는 문자를 보냈더니 짤막하게“환영합니다”라는 문구로 답하였다.

극락전 2층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들어가니 가장 먼저 A기자님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A기자 바로 옆에 앉으니 정면에는 두 분의 토론자가 있고 좌우에는 이 날의 토론을 지켜 보기 위한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포진하였다. 널찍한 공간에 빙 둘러 앉으니 약 삼사십 명 가량 되었다. 중앙에는 이날의 토론자 도법 스님과 허정 스님이 앉았다. 사회자가 두 토론자의 중간에 앉았다.

▲ 10일 오후 조계사 극락전 2층에서 토론회가 진행 중이다. ⓒ진흙속의 연꽃

이날 토론에 참석한 사람들을 보니 입장이 확연하게 갈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좌측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주로 도법 스님을 지지하는 사람들이고, 우측은 허정 스님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이었다. 도법 스님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매월 정기적으로 ‘붓다로 살자’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런 토론이 시작 된지 일년 반 되었다고 하였다.

허정 스님의 공개질의서에 따라

이날 토론을 하게 된 동기는 허정 스님의 질문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도법스님이 ‘붓다로 살자’라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런 슬로건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허정 스님에 따르면 개인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아 카페에 공개질의서를 올렸다고 한다. 이런 내용이 교계 언론에서 두 차례 보도 됨에 따라 ‘붓다로 살자’ 월례 모임에서 주제로 올려지게 되고, 맞장토론이 성립하게 된 것이라 하였다. 허정 스님의 공개질의서는 어떤 것일까?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사항이다.

1)‘붓다로 살자’라는 말은 교리적으로 모순이다.
2) 믿음의 불교는 현대인들에게 적합하지 않다.
3) 목숨이 부처라고 설명하는 것은 교리적으로 맞지 않다.
4) 본래불과 불성사상은 팔정도와 다르지 않다.

허정 스님에 따르면 도법 스님이 주창하는 ‘붓다로 살자’슬로건은 교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 대신 ‘가르침대로 살자’라고 바꾸자고 말한다.

삼귀의 대신 ‘붓다로 살자’ 서원문을

토론에 앞서 간단한 의식이 진행되었다.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모든 불교의식에서 빠지지 않는 ‘삼귀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자라면 당연히 삼보에 귀의하고 그 다음에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 원칙일 것이다. 그러나 이날 행사에서는 삼귀의는 생략되었고 그 대신 ‘붓다로 살자 서원문’낭독으로 시작되었다. 서원문 내용은 어떤 것일까?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신기하고 신기하도다.
어리석음에서 깨어나 보니
사람이 그대로 오롯한 붓다이네.”

“안타깝고 안타깝도다.
어리석음과 착각에 빠져
붓다인 사람이 중생노릇 하고 있네.”

모두 여섯 개의 시 중에 상위 두 개를 옮긴 것이다. 화엄경에 ‘알고 보니 본래 부처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화엄경을 근거로 하여 만든 것이라 하였다. 찾아보니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奇哉奇哉 此諸衆生 云何具有 기재기재 차제중생 운하구유
如來智慧 愚癡迷惑 不知不見 여래지혜 우치미혹 부지불견

신기하고 신기하여라.
어찌하여 이 모든 중생들이 여래의 지혜를 모두 갖추고 있는가?
그런데 어리석고 미혹하여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구나.
(화엄경 여래출현품)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공업(共業)’이라는 말이

화엄경 여래출현품을 찾아 보았다. 법정스님이 편역하고 동국역경원에서 간행된 ‘신역 화엄경’이다. 여래출현품을 열어 보니 ‘공업(共業)’이라는 말이 나온다. 도법스님이 토론할 때 늘 하던 말이다.

도법스님에 대한 비판론자들에 따르면 요즘 종단의 책임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 하기 위하여 ‘공업’이라는 말을 부쩍 많이 사용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공업이라는 말은 화엄경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내용일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런 것이 모두 중생들의 공업과 보살들의 선근으로 일으키는 것인데, 그 가운데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저마다 마땅한 대로 받아 쓰게 한다.” (화엄경, 법정스님역, 동국역경원, 167p)

‘이런 것’이란 경에 따르면 ‘삼천대천세계가 한량없는 인연과 한량없는 사실로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이 공업에 대하여 법정스님은 ‘공동으로 선악의 행위를 하고, 공동으로 고락의 과보를 받는 것’이라고 각주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있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인연화합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종단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뉴스 역시 종단내부의 일부 일탈자의 문제가 아니라 사부대중 공동의 책임이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종단을 책임 지고 있는 스님들이 공업을 말하는 것 같다.

요구사항을 보면

두 스님의 맞장토론은 허정 스님의 발제로부터 시작 되었다. 허정 스님이 스스로 작성한 ‘붓다로 살자에 대한 비판’글을 낭독하였다. 요지는 이렇다. 비판글의 결론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결론 및 요구사항:

1.
지금 당장 ‘붓다로 살자’라는 말은 교리적으로 모순이 있으니 정확한 언어를 사용하여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자’ 혹은 ‘보살로 살자’라는 운동으로 전환하거나 ‘맑고 향기롭게’ ‘내 탓이오’처럼 불교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운동으로 나아가자

2.
믿음의 불교대신에 전제조건 없는 불교, ‘와서 보라’는 불교, 이해의 불교를 하는 것이 현대인들에게 적합하다.

3.
도법스님의 ‘붓다로 살자’와 무비스님의 ‘인불사상’은 꼭 ‘사람이 부처’이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가장 소중한 것이 목숨이므로 목숨이 부처라고 설명하는 것은 교리적으로 맞지 않다. 또한 ‘사람이 부처’이기에 불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서 탁월한 것도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오히려 인간 각자가 이기적이고 생존본능이 있기에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게 되는 것이다.

4.
본래부처와 불성사상은 싯다르타가 몸소 보여 주신 깨달음(탐진치소멸), 전제 조건 없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구체적인 가르침(사성제), 깨달음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8정도)을 제시하는 불교와 다르지 않다. (‘붓다로 살자’에 대한 비판, 허정스님, 2015-02-06, 천장사카페)

이와 같은 요구에 대하여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을까? 결론적으로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 다만 도법 스님과 도법 스님을 따르는 재가불자들의 해명성 설명이 있었을 뿐이다.

맞장토론을 기대하였지만

맞장토론을 잔뜩 기대하였다. 그러나 토론다운 토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주최측에서 토론방식을 정하였기 때문이다. 참여한 대중들이 허정 스님의 비판글에 이의를 제기 하고, 이에 허정 스님이 답변하는 식으로 되었다. 그러나 결론도 나지 않는 지루한 공방만 이어졌다. 전혀 바라지 않던 것이었다.

허정 스님에 따르면 사전에 공개 질의한 것에 대하여 도법 스님의 답변을 듣고 싶었다고 하였다. 일대일 토론이 이루어지기 바란 것이다. 그러나 ‘붓다로 살자’월례모임에 참가한 이들의 발언이 길어 지면서 토론다운 토론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토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보았다. 이런 토론은 처음 참가하였기 때문에 기대를 많이 하였다. 그러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주최측 재가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아직까지 불교가 무엇인지, 깨달음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개념 정립이 되지 않아서 일 것이다.

도법 스님과 허정 스님의 진정한 맞장토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이날 토론 말미에 도법 스님은 ‘붓다로 살자’라는 슬로건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길게 밝혔다. 그것은 화엄경에 근거한 것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붓다로 살자’라는 말은 대승불교입장에서 나온 말이라 볼 수 있다.

믿음의 불교

‘붓다로 살자’라는 말은 초기불교 입장에서는 도저히 수용이 불가능한 말이다. 교리적으로 모순이 있어서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붓다로 살자’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는 것은 대승불교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승불교 입장에서 본다면 ‘붓다로 살자’라는 말은 얼마든지 수용 가능한 말이다. 이에 대한 사상적 근거는 화엄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한량없는 몸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불자들이여, 보살 마하살은 여래-응공-정등각의 몸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한량없는 곳에서 여래의 몸을 보아야 한다. 보살 마하살은 한 법이나 한 가지 일이나 한 몸이나 한 국토나 한 중생에서 여래를 볼 것이 아니고 모든 곳에서 두루 여래를 보아야 한다.

마치 허공이 모든 물질과 물질 아닌 곳에 두루 이르지만, 이르는 것도 아니고 이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허공은 몸이 없기 때문이다.

여래의 몸도 그와 같아서 모든 곳에 두루하고 모든 중생에게 두루하고 모든 법에 두루하고 모든 국토에 두루하지만, 이르는 것도 아니고 이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여래의 몸은 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을 위해 그 몸을 나타낸다.” (화엄경, 법정스님역, 동국역경원, 167p)

화엄경에 따르면 모든 곳에 부처님이 있다고 하였다. 부처님의 몸은 우리 몸에도있고, 모든 법에도 있고, 모든 국토에도 있어서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허공자체가 부처님이고, 이 세상자체가 부처님이라 한다. 소리도 마찬가지이다. 부처님의 음성은 두루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이 때문에 이 허공이나 이 세상에 한량없는 음성이 두루 하고 있다고 한다.

허공 속의 부처님, 허공 속의 음성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화엄경에 따르면 이런 사실을 믿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믿지 않으면 본래불이나 불성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의 충돌

대승불교에서는 믿음을 강조한다. 우리가 부처라는 사실을 믿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우리가 부처라면 우리는 이미 깨달은 존재들이다. 그렇게 본다면 달리 깨달을 것도 없다. 우리가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도법 스님은 “깨달음을 실천하는 것이 수행입니다”라 하였다. 또 “깨달음을 실천하는 자가 보살입니다”라 하였다.

도법 스님에 따르면 깨달음의 실천이 수행이라 하였다. 깨달음의 실천이라는 말이 어법상 맞지 않는 듯이 보이지만 대승의 입장에서는 맞는 말이다. 이미 우리가 깨달은 존재라면 달리 깨닫기 위하여 수행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자체가 수행으로 보기 때문에 “수행은 깨달음의 실천입니다”라는 역설적인 말이 나오게 되었다고 본다.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이는 대승에서 깨달음을 실천하는 것과 정반대이다. 우리가 깨달은 자, 붓다가 아니기 때문에 붓다가 되기 위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거꾸로 대승에서는 우리는 이미 부처이기 때문에 새로 깨달을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깨달은 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수행이라 한다. 이렇게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종교평화선언이 추진된다면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대승불교 입장에서 본다면 ‘붓다로 살자’라는 슬로건은 지극히 당연하다. 반면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초기불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붓다로 살자’라는 말은 모순투성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에는 기존의 대승불교전통의 불교뿐만 아니라 글로벌시대를 맞이 하여 초기불교가 도입되었다. 더구나 남방 테라와다전통의 불교까지 전래되어 한국불교에서는 각종 불교가 모두 들어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양한 전통을 배경을 하는 한국의 불교에서 대승의 이념인 ‘붓다로 살자’라는 슬로건을 내 걸었을 때 이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런 충돌현장이 이번 도법 스님과 허정 스님의 맞장토론이라 본다.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의 충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진짜 큰 충돌은 지난 2011년에 있었다. 그 때 당시 도법 스님이 주도하는 화쟁위에서 ‘불교인을 위한 종교평화선언’, 소위 ‘아쇼카선언’이 발표 되었다. 이 아쇼카선언은 대승불교 교리에 기반한 선언이었다.

그러나 초기불교 입장에서 보았을 때 아쇼카선언은 교리적으로 보았을 때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본래불이나 불성 등 믿음의 불교에서는 얼마든지 수용가능한 것이었겠지만, 초기불교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매불교(賣佛敎)’행위로 보아 격렬하게 반대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종교평화선언은 시행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완전히 폐기한 것은 아니다. 잠복상태에 있다고 보여진다. 더구나 그때 당시 선언을 추진하였던 자승 스님과 도법 스님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언제 어떻게 선언될지 모른다. 두 스님의 임기 내에 한번은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경우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의 대충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진흙 속의 연꽃 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다음카페 '진홁속의 연꽃' http://blog.daum.net/bolee591/16156210 에도 게재했습니다.

[기사제보 dasan25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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