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야 산다
열어야 산다
  • 변택주
  • 승인 2015.02.16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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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변택주의 <섬기는 리더가 여는 보살피아드>-106. 선각자 이동인

문을 열어야할 때 걸어 닫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집에 불이 나서 뛰쳐나가야할 때 문을 막으면 타죽고 문을 열고 바람을 받아들여야할 때 구멍이란 구멍은 다 틀어막으면 숨 막혀 죽는다. 그러나 바깥에서 좋지 않은 기운이 들어올 때는 문을 걸어 잠가야 한다. 문을 열 때와 닫을 때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토페이퍼가 드러낸 진실
1980년, 영국외무성에서는 비공개시효가 끝난 외교문서 ‘사토페이퍼Satow Paper’를 공개했다. 이 문서는 조선말기 외교사를 다시 써야할 만큼 놀라운 줄거리를 담고 있다. 이 문서를 적바림한 어니스트 사토Ernest Satow는 젊은 조선 승려 법명 천호淺湖 이동인李東仁(1849-1881)이 교토에 있는 히가시 홍간지(東本願寺)에서 득도하여 일본에 있을 때, 주일 영국공사관 2등 서기관으로 일하던 37살 먹은 외교관이다. 어니스트 사토는 일본 근무를 마치면 조선으로 건너가려고 했던 모양으로 조선말을 가르쳐 줄 개인교사를 찾고 있었다.

1879년 김옥균 주선으로 일본에 와서 조선 근대화를 이끌어내려고 이리저리 뛰며 물불을 가리지 않던 이동인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동인이 망설임 없이 일본주재 영국공사관으로 달려가 2등 서기관인 어니스트 사토를 만난 날이 1880년 5월 12일.

오늘 아침 아사노(朝野)라는 이름을 가진 조선인 승려가 찾아왔다. 그이는 아사노라는 이름이 조선야만朝鮮野蠻(Korean Savage)이라는 뜻이라고 재치 있는 입담을 풀어내면서 세계를 돌아보고 제 나라 사람들을 개화시키려고 비밀리에 일본에 왔노라고 말했다. 일본말은 서툴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너끈히 헤아릴 수 있었다. 그이는 외국 문물이 엄청나다는 것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돌아가서 제 동포들에게 믿게 하려고, 유럽 건물이나 그 밖에 흥미로운 것을 찍은 사진들을 얻으려고 했다. 또한 영국에 가보기를 뜨겁게 바랐다. 이동인은 제가 서울 토박이라고 말하면서, 오는 일요일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사토페이퍼에 적바림된 이동인 얘기다.

1880년 5월이면 한미수교조약이 체결되기 2년 앞선 일인데, 이럴 때 조선 개화승과 영국 직업외교관이 마주 앉아 조선 앞날을 화두로 삼았다는 사실은 눈길을 끌고도 남음이 있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서로 속내를 털어놓고 의견을 나눴음이 분명하다. 이동인이 영국에 가보기를 뜨겁게 바랐다는 것이 더욱 그렇다. ‘사토페이퍼’는 더욱 흥미롭게 이어진다.

1880년 5월 15일.
내 조선인 친구가 다시 왔다. 그이는 조선이 몇 해 안에 외국과 수교를 맺게 될 것이지만, 그러려면 지금 조선정부를 전복해야 할지도 모르며,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젊은 사람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고 했다. …줄임… 그이는 세 시간쯤 있다가 갔다. 나는 오는 20일, 시계를 사러 요코하마 시장에 같이 가기로 했다. 그이는 금, 석탄, 철과 연해 고래 따위 넉넉한 조선 자원을 개발하는 일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시고 있었다. 이동인은 좋은 인삼과 좋지 않은 인삼 견본을 내게 주었는데, 유럽 의사들이 인삼을 쓸 수 있게 되면 인삼이 조선 중요 수출품목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동인이 ‘조선정부를 뒤집어야 한다면 그래야’ 하며, 이를 따르는 젊은이들이 있음을 힘주어 말한 것이 눈길을 끈다. 이로부터 네 해 뒤에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났고, 그 주역인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유길준, 서재필들이 모두 이동인 문도였다는 것을 짚는다면 이동인이 조선근대화에 앞선 면모가 여실하다.

수신사로 일본을 찾았던 김홍집이 돌아와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동인 얘기를 고종에게 알렸다. 화들짝 놀란 고종은 이동인을 창덕궁으로 부른다. 유교를 떠받드는 나라에서 임금이 승려를 만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고종은 이동인을 불렀다. 이동인이 어떻게 고종을 만났느냐? 하는 것은 한 줄도 적바림된 게 없다. 고종이 묻는다. “일본이 어떻더냐?”고. 이동인은 그동안 일본서 보고 듣고 느낌 것을 하나하나 알린다. 이동인 말에 고종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고종은 “선사, 일본에 다시 다녀오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이동인은 “신임장을 주시면 가겠습니다.”고 한다. 임금 앞에서 서른 밖에 안 된 중이 신임장을 주면 가겠다고 제 생각을 또렷이 하다니. 고종이 신임장을 써주며 엄지손가락만한 순금으로 만든 금봉 세 개를 주면서 “부산서 가면 죽을 염려가 있느니 원산으로 돌아가라.”고 이른다. 행여 수구파들 손에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하라고 이른 말. ‘사토페이퍼’는 이것까지도 증명하고 있다.

아사노가 어젯밤 갑자기 나타났다. 이제 막 도착했다면서 큰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국왕이 개명했다는 희소식과 국왕이 내준 여권(신임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이는 조선이 러시아로부터 공격당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국왕이 깨닫고 있으며, 몇 주일도 채 지나기 전에 개화당이 현 배외내각排外內閣을 대치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선사, 환로宦路에 나와야 하질 않겠는가
이로 미루어 보아 당시 개화와 수구 양 갈래로 갈라졌던 조선 지식인 가운데 조선 근대화가 기어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과 근대화 방향을 가장 뚜렷하게 꿰뚫고 있던 사람이 이동인이었다는 건은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다. 신임장을 받아들고 다시 일본에 건너간 이동인은 일본에 있는 세계 여러 나라 외교관을 두루 만나고, 일본이 서구 열강과 맺은 조약 문서를 번역해 가지고 돌아온다. 고종이 감격한다. 그때 조선에서 육조판서를 외무부, 내무부 같은 근대조직으로 정부를 바꿀 무렵이다. 고종이 서른한 살 난 이동인을 보고 묻는다. “환로宦路에 나와야 하질 않겠는가?” 환로는 공직을 가리킨다. 한 나라 임금이, 더구나 배불숭유排佛崇儒하는 나라 임금이 서른한 살짜리 승려보고 “공직에 나오라”고 한다. 이동인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국제 정세를 또렷하게 꿰뚫었던 유일한 사람으로 고종 속내는 외무부장관을 시키려고 하지 않았을까?

이동인은 어니스트 사토를 비롯한 일본 메이지 유신 주축을 이룬 이들과 만나고, 조선으로 건너올 때 책을 두 가마니나 가지고 왔다.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박영효, 유길준 같은 우리나라 개혁파 신인들은 그 책으로 공부를 했다. 서재필 같은 사람은 “그 책들을 읽고 세계정세를 잘 알게 되었으며, 우리가 세계정세를 앎을 기려서 조선 백성들은 이를 개화당이라고 했다.”고 자서전에 남기고 있다.

이처럼 가파른 이동인 부상은 수구세력이나 젊은 개화세력 양쪽 모두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킨다. 뿐만이 아니라 청나라에서도 국제정세를 제대로 꿰뚫는 조선인이 나타났다는 것은 특히 북양대신 이홍장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았을 것이다. 일본에서도 처음과는 달리 저희 속내를 꿰뚫어보는 이동인을 달갑게 여길 까닭이 없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던가. “야! 중놈이 장관된단다.” 이 일을 양반들이 견뎌낼 재간이 있었을까? 어찌 사대부가 중 앞에 가서 “대감!”이라면서 절을 할 것인가? 이동인은 고종을 배알하고 나와서 바로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어디 잡혀갔는지? 누가 죽였는지? 주검은 어디 있는지? 밝혀지지 않은 채 1세기가 흘러갔으니 참으로 딱하고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이 엄연한 사실이 우리 근대사 앞으로 떠오르지 못하는 까닭은 더욱 참담하기 그지없다. 이리도 앞선 지도자를 우리는 그렇게 잃는다. 나라에 없어서는 안 될 동량棟樑은 서른한 살 때 죽여 버리고, 나라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나라 살림을 한다. 왕조가 망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 폐해가 극에 이르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가파르게 바뀌는 소용돌이 앞에 섰다. 그런데 나라와 나라사람을 바라지해야 할 살림꾼들은 나라사람이 죽어나가던 말던 제 잇속 챙기기에 바쁘고 서로에게 삿대질 해대기 바쁘다. 어쩌려는가. 삿대질을 멈추고 안팎으로 슬기를 모아야 할 때.

인문학 강의를 하는 경영코치, ‘연구소통’ 소장으로 소통을 연구하며, 지금즉市 트區 들으面 열리里 웃길 79에 산다. 펴낸 책으로는 <법정스님 숨결>과 <법정, 나를 물들이다>, <가슴이 부르는 만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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