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풍수 논쟁
경복궁 풍수 논쟁
  • 김규순 원장
  • 승인 2015.03.0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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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순의 풍수이야기 47.

이성계의 한양천도는 비록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한양 주산논쟁이 있었지만, 권력과 행정의 중심에 서 있었던 정도전의 승리로 가볍게 정리가 되지만 그 후에도 풍수논쟁은 끊이지 않았다. 태종 이방원이 등극하자 관료와 풍수사들을 모아 놓고 토론을 거쳐 한양풍수논쟁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나 세종대에 이르러 전혀 새로운 국면의 풍수논쟁이 일어난다. 그것이 경복궁 풍수 논쟁이다.

최양선(崔揚善)이 세종에게 “경복궁의 북쪽 산이 주산(主山)이 아니라, 목멱산(木覓山)에 올라서 바라보면 향교동(鄕校洞)의 연한 줄기, 지금 승문원(承文院)의 자리가 실로 주산이 되는데, 도읍을 정할 때에 어째서 거기다가 궁궐을 짓지 아니하고 북악산 아래에다 하였을까요. 지리서(地理書)에 이르기를, 「개인의 집이 주산의 혈(穴) 자리에 있으면 자손이 쇠잔해진다」 하였사오니, 만약 창덕궁을 승문원 자리로 옮기면 만대의 이익이 될 것입니다.”라고 상서한 것이 경복궁 풍수논쟁의 시작이었다. (1433년 7월3일, 세종15년)

이에 세종은 신하들에게 경북궁 풍수에 대한 의견을 내 놓으라고 명한다.(1433년 7월9일)

▲ 경복궁 전경, 북악산을 살짝 비켜서 위치를 잡았다.

영의정 황희·예조 판서 신상·지신사 안숭선 등은 목멱산에 올라서 산수(山水)의 내맥을 탐지해 보고 풍수학자들을 시켜 최양선의 주장에 대해 의견을 말하게 하였다. 이양달·고중안·정앙(鄭秧)은 백악(白岳)으로 현무(玄武)라 하여 경복궁의 터로서 명당이 된다 하고, 이진·신효창은 최양선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세종도 백악에 올라 궁궐의 터를 직접 살펴보았다.

“오늘 백악산에 올라서 오랫동안 살펴보고, 또 이양달과 최양선 등의 두 가지 말을 들으면서 여러 번 되풀이로 살펴보니, 보현봉의 산맥이 곧게 백악으로 들어왔으니 지금의 경복궁이 바로 명당이 되기는 하나, 그러나 승문원의 내맥도 역시 보통의 땅은 아닌데, 이제 이양달·고중안·정앙 등이 명당이 아니라고 함은 승문원의 터가 낮고 미약하다는 것이 첫째이고, 산수가 좀 곧다는 것이 둘째이고, 정면으로 마주보는 남산이 높다는 것이 세째이어서, 이런 것으로 흠을 잡으니, 그것을 풍수학하는 자를 시켜 지리서를 강구하여 그 이해되는 것을 논술하여 아뢰게 하라.” (1433년 7월18일)고 도승지 안숭선에게 명한다.

조정이 경복궁 풍수노쟁으로 떠들썩하자 관료들이 풍수학의 허무맹랑함을 들어서 풍수술사들에게 죄를 주라고 상소를 올리자 세종은 대사헌 신개를 불러 풍수학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천명한다.

“우리 태조께서 개국하셔서 한양에 도읍을 정하시고 궁궐을 영건하시며 종묘를 세우심에 모두 지리를 쓰셨고, 건원릉에 이르러서도 지리를 썼으니, 이는 곧 우리나라는 지리의 학설을 외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중략)가사 집현전에서 풍수학을 강습하는 것은 그르다 할지라도 풍수학을 강명하는 것이 어찌 유자의 분수 밖의 일이라 할 것인가.” (1433년 7월27일)

그 후 황희와 정인지는 경복궁이 명당자리에 앉아 있다는 보고서를 올린다.

“(생략)현무의 형세는 풍성한 형상이 특별히 빼나 있고, 백호의 형세는 쭈그리고 앉는 것이 실로 형세에 부합하오며, 다만 청룡이 낮고 약하고 한성부와 전의감 등의 여러 언덕이 약간 등져 있고, 또 안산이 낮고 약하오나, 사면에 둘린 난간이 이미 이루어져 있사오니, (중략)그런즉 경복궁이 그대로 명당자리를 얻어 임방을 등지고 병방을 향해 앉아서 삼각산의 중심에 응하였사옵니다.”(1433년7월29일)

▲ 광화문 전경, 북악산을 살짝 비켜서 위치를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료들이 풍수에 대해서 무시하고 방관적 자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자, 세종은 유학을 내세우는 관료들의 겉과 속이 다른 행태를 꼬집어 말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는다. 이는 지금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적이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나라를 위하는 것이 집을 위하는 것만 못한가 보다. 요새 사대부들이 집에 있으면 귀신이나 지리에 관한 일들은 하지 않는 것이 없으면서, 조정에 나오면 모두 고상한 이론만 가지고 배척한다.”(1433년 윤8월29일)

세종은 그 이후에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숭덕대부 이정녕을 불러 경복궁의 풍수고민을 토로하기도 했다. 풍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완벽한 땅은 없지만, 경복궁의 명당수가 부족하다는 것은 화재에 약하다는 말인즉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20년 동안 생각하고 있었다.

“태종 때에 정승 하윤(河崙)이 ‘경복궁의 명당수(明堂水)가 부족하다.’고 말하고, 그 뒤에 이양달(李陽達)도 역시 이로써 말하여, 이에 소격전(昭格殿)의 동구(洞口)에다 못을 파서 저수(貯水)하려 하였으나, 수원(水源)이 없으므로 성과를 얻지 못하였는데, 민의생(閔義生)이 또 말하기를, ‘궁성(宮城) 근방에 땅을 파서 저수(貯水)하면 이미 지리설(地理說)에 합하고, 또 화재(火災)의 대비가 될 만하다.’고 하나, 내가 여기 있은 지 20여 년 동안 오래 되었으나, 크게 해로운 일이 없었는데, 반드시 못을 판 뒤에야 가할까.”(1448년 10월12일 세종30년)

참조 :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번역원 번역본

   
저널리스트 김규순은 서울풍수아카데미 원장이다.  풍수지리학이 대한민국 전통콘텐츠로써 자리매김하는 방법을 찾아 노력하는 풍수학인이다.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 취득. 풍수는 이준기, 김종철, 김대중 선생께 사사 받았다. 기업과 개인에게 풍수컨설팅을 하고 있다. 네이버매거진캐스트에서 <김규순의 풍수이야기>로도 만날 수 있다. www.location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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