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미학
소통의 미학
  • 현각 스님
  • 승인 2015.03.18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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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현각 스님의 <클릭! 마음의 두드림>- 90.

엊그제 일이다. 날씨도 풀리고 하여 오랜만에 거리를 걷고 싶었다. 그 구간 사이에 청계천을 지나게 되었다. 졸졸 물 흐르는 소리는 귀를 청아하게 하였다. 하지만 악취가 얼마나 심하던지 걸음을 재촉하여 빨리 그곳을 지나야만 했다. 자동차 매연이나 중금속이 낮은 곳으로 내려 앉아 더욱 코를 찌르는 것이라고 동행인의 귀띔이 있었다. 아,  그렇구나. 서둘러 차에 올랐다.

아침이 되면 도량을 둘러본다. 실은 둘러본다기 보다 그저 자연과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흙의 상태도 알아보기 위해서 이다. 지난번 있었던 물의 악취를 생각해 보면 흙은 얼마나 속앓이를 하고 있을까 미루어 짐작이 간다. 신음하는 물속에서 살고 있는 물고기의 건강 상태는 얼마나 일그러져 있을까. 또 저 물의 수기를 머금은 대지는 어떻고. 이래저래 현대인은 숨 쉬고 산다는 것이 질병과의 투쟁이라 할 만하다.

예전에 낭비벽이 심하면 ‘물 쓰듯 한다’하였다. 지금은 물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지 모른다. 물 쓰듯 하면 헤프게 쓴다는 말인데 이미 옛말이 되었다. 물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이제 물을 구입하여 들고 다니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도 우리 스스로 가꾸고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기력을 잃게 될 것이다.

도량에 나서면 산새의 재잘거림이 귀를 맑게 하고 정신의 청량제가 된다. 소나무에서 대나무로,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유유자적하게 나는 산새의 율동이 마치 곡예사의 곡예를 보는 듯하다. 할아버지의 기침을 알리는 헛기침 소리 같이 굵직한 소리도 들린다. 반포조(反哺鳥)가 날아든 것이다. 반포조는 까마귀를 이르는 말이다. 늙은 어미 새에게 먹을 것을 물어다 주는 새라는 말이다. 늙고 쇠약한 어미 새의 울근불근 드러난 앞가슴이 애처로워 먹이를 구하러 나온 반포조의 소리를 누가 탓하랴. 먹이를 구하지 못하여 절규하는 소리일 수 있고, 효심을 다해 모실 수 없는 능력이 모자라는 자신을 책망하는 절규인지도 모른다. 명관(鳴管)이 발달되지 않아 탁음을 낼 뿐이다. 까마귀의 울대를 낭랑하지 못하다고 탓할 일은 전혀 아닌 듯하다.

인간의 주관적인 견해는 상대를 배려하는데 인색해지고 있다. 지하철 승객의 모습과 버스 속의 풍경은 상반된 모습이 보인다. 지하철에는 ‘장애인, 노약자, 임산부, 영유아 동반자석입니다’라는 안내문이 있어서 인지 근처에 젊은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자리에 앉는 일도 보기 힘들다. 질서정연하다는 생각이 들어 좋다. 그러나 버스 속의 풍경은 지하철과는 대조를 이룬다. 노약자석이라는 표지나 그림이 붙어 있지만 젊은이 차지가 되기 쉽다. 탑승할 때 젊은이의 민첩한 동작을 앞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앉아 있는 시간이 많은 나의 경우 서서 가는 것이 좋다. 다리에 힘도 기르는 시간이 되기에 그렇다. 경로석에 앉아 휴대폰에 열중인 젊은이의 모습을 보면 역지사지의 한 장면이 그려진다.

제주도는 삼다의 섬으로 알려져 있다. 돌 많고 여자 많고 바람이 많다는 말이다. 그들은 바람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강담을 쌓았다. 강담은 흙을 쓰지 않고 돌로만 쌓은 담이다. 그 흔한 현무암으로 주먹이 드나들 정도의 구멍이 숭얼숭얼 드러나 있다. 그러한 담을 처음 대했을 때 어느 작가의 미완의 작품인 듯 눈길을 끌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곳 사람들의 오랜 삶의 지혜가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역시 소통의 미학이란 자신을 지키는 힘이 되고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독 소통을 꺼리는 집단이 있다. 위정자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이다. 소통은 막혔던 곳을 뚫어 원활하게 순환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를 기득권에 대한 도전으로 오판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 고질적인 습성이 있다.

옛말에 절함(折檻)이란 말이 있다. ‘난간을 부러뜨린다’는 뜻이다. 한나라 성제(成帝) 때 주운(朱雲)이란 사람에게서 비롯된 말이다. 당시 장우(張寓)란 정승이 있었는데 성제가 태자 시절에 글을 가르친 인연이 있었다. 그러니 천하의 권세가 그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주운은 이 현실을 간하고자 조정으로 나아가 말했다.
“지금 조정의 대신들은 위로는 폐하를 바르게 인도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등쳐먹는 도둑들뿐입니다. 제게 참마검(斬馬劍)을 하사하신다면 폐하의 영신(佞臣, 간사한 신하)의 목을 베어 다른 대신들의 경계를 삼고자 합니다.”

조정에 모인 대신들은 이를 듣고 술렁거렸다.
“그 영신이 누구더냐.”
“장우이나이다.”
주운은 서슴지 않고 충고했다. 성제는 크게 노하여 소리쳤다.
“일개 하급관리가 임금의 스승을 모욕하다니 그대는 사형에 처해도 시원치 않으니 당장 끌어내라.”

무관이 달려들어 끌어내려고 하였으나 어전의 난간에 매달려 붙잡고 늘어졌다. 무관은 더욱 힘껏 그를 잡아끌었으나 그럴수록 난간을 힘껏 붙잡고 더욱 큰 소리로 간언을 하였다. 그 바람에 난간이 부러지고 말았다.

훗날 부러진 난간을 수리하려고 하자 성제는 “새로 난간을 바꾸지는 말고, 부서진 조각을 모아서 이어두도록 하여라. 직언을 간한 충절의 신표로 삼고 싶구나.”

그렇다. 시대는 바뀌었어도 주운보다는 장우 무리가 패거리를 지어 다니는 세상이다 보니 혼탁하다. 아니, 그 이전에 부패한 권력 집단이 기울어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현상일 수도 있다. 자신의 안일만을 우선하는 사람의 삶은 당장은 달콤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사후는 영 반대일 수도 있다. 역사를 기술하는 사가들의 안목은 냉혹하기 때문이다.

글에도 반전이 있고 연극에도 반전이 있다. 반전이 없는 극은 박진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일의 전개는 자신의 안목으로는 측량하기 어려운 심오함이 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인의 삶이 어떠했는지 역사의 교훈이 말하고 있다.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 수행정진했고, 동국대학교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학교 선학과 교수, 미국 하버드대 세계종교연구센터 초청교수, 동국대 불교대학장, 정각원장, 한국선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장 겸 동국역경원장으로 불교학계 발전과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선학의 이해』, 『선어록 산책』, 『선문선답』, 『선문보장록』, 『선 사상론』, 『선 수행론』, 『한국선론』, 『벽암록의 세계』, 『한국을 빛 낸 선사들』, 『선심으로 보는 세상』 연보로 구성된 『최현각 선학전집』(전11권), 『내 사유의 속살들』, 『현각스님의 마음 두드림』등이 있고, 그 외 다수의 논문과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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