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고개
바위고개
  • 현각 스님
  • 승인 2015.04.29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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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현각 스님의 <클릭! 마음의 두드림>- 96.

꽃의 향연이다. 온 산하에는 붉은 색, 파란 색, 하얀 색의 출렁임이 넘실댄다. 오묘한 자연의 법칙에 경이로움을 느끼는 나날이다. 연분홍의 진달래에 몸과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어린 시절 진달래꽃 줄기를 꺾어 모아 한 움큼씩 들고 다녔다. 그 꽃을 따먹던 시절이 아련하다. 톡 쏘는 향은 없었지만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던 친근한 꽃이다.

이홍렬(1907~1980) 작사ㆍ작곡의 ≪바위고개≫는 진달래꽃을 우리 민족의 가슴에 안겨 준다. 둘째 연(聯)이 우리 마음에 다가 와 철썩 안긴다.

바위고개 피인 꽃 진달래꽃은
우리 님이 즐겨즐겨 꺽어 주던 꽃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작곡가는 생전에 ‘바위고개는 어디 있는 고개인가?’라는 질문을 누누이 받았다. 그때마다 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징적인 고개이다. 삼천리 금수강산 온 국토가 바위고개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무궁화란 단어가 금지된 시절이라 진달래꽃으로 바꾸어 불렀던 것이다. 제3 연에 ‘십여 년 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는 일제 식민의 핍박 받은 상징의 표현이라고 한다.

가슴속에 포옥 안기는 노래 바위고개는 1932년 작곡되어 교과서에 실렸고,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르는 온 국민의 애창곡이었다. 이 곡의 선율이 흐르면 마음은 이미 촉촉이 봄비를 맞은 듯 차분해진다. 실개천의 버들개지가 스멀스멀 바람에 날리듯 고요한 마음에 파문이 일기도 한다. 소위 일제의 만행 같은 것이다.

그 가운데 체험담이 뇌리를 스친다. 창씨개명(創氏改名) 같은 사례가 있다. 마을에 하야시네가 있었다. 수풀 임(林)자를 쓰는 성씨인데 강압적인 창씨 바람에 일본 음으로 하야시네가 되고 말았다. 이름 또한 그렇다. 가네코, 마사코 등이 그 예이다. 금자(金子)는 가네코가 되었고, 정자(正子)는 마사코로 불러야만 했던 일본식 이름이다. 동네에서 지척지간에 함바 집이 있었다. 밥집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이 발전소를 건설하면서 인부들을 상대로 밥을 팔고 합숙소로 사용하던 집이었다. 역전 앞, 처가 집과 같이 ‘함바(飯場)’로 족하지만 ‘집’을 덧붙여 불렀던 것이다.

우리나라 꽃도 인정하지 않았던 일본, 우리말과 글을 말살했던 일본의 식민정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그 뿐인가. 이 땅의 청순한 딸들을 전쟁터로 끌고 간 그들의 만행은 씻을 길이 없다. 일본대사관을 바라보는 소녀상을 보아라. 꼭 다문 입, 무표정한 얼굴. 꼭 다문 입에서 장광설을 토하고 있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소녀의 절규를 듣게 된다. 분노의 어깻숨을 느끼게 된다. 말하라. 누가 이 소녀의 창창한 미래를 앗아 갔는지.

일본 위정자의 눈과 귀는 어디 있는가. 소녀의 절규를 들어라. 전선으로 내몰렸던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을 들어보아라. 휠체어에 쇠약한 몸을 의탁하고 앉아 있는 저 가슴에 쌓인 회포를 바닥걸기질할 사람은 아베(安倍)가 아닌가.

고노(河野) 담화가 있다. 1993년 당시 관방장관이었던 그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의 강제성을 인정한 담화이다. 고노는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와 관리, 위안부 이송에 관해서는 일본군이 관여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고 말했다.

미국을 방문하고 있는 아베 총리의 이중적인 행보를 보면 가관이다.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해 사과는 하지 않은 채 ‘깊은 고통을 느낀다’고만 했다. 고노의 견해와는 영 딴판이다. 미국의 대표 언론들은 역사적 사실을 무력화시키려는 아베의 행보를 비판하며 사과를 촉구하고 나섰다. 무엇이 켕기고 두려워 하버드 대학 연설에서 뒷문으로 들고 났는지. 그는 자신만이 느끼는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십수 년 전 중국 장쩌민(江澤民)이 하버드 대학에서 강연한 일이 있었다. 당시 티베트 독립을 주장하는 군중이 캠퍼스 내에 천막을 치고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그러나 장쩌민은 아베와 같이 뒷문을 이용하지는 않았다. 당시 나는 그 대학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전후 사정이나 교정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도 장관 재임기간 중이던 2012년 3월 한ㆍ미 외교장관 회담 때 일본군 위안부를 ‘강요된 성노예(enforced sex slaves)’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를 공식화하겠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인권선언에서 비롯된 무죄 추정의 원칙(無罪推定原則)이 있다. 피고인 또는 피의자는 유죄판결이 확정될 때 까지는 무죄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아베 총리. 당신의 말속에는 언어의 기교가 가득하고, 당신의 등에는 이미 ‘A’라는 주홍글씨가 큼지막하게 찍혀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등이라 안 보인다면 역사의 교훈과 거울을 놓고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어찌 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겠는가.

제2의 바위고개는 없어야 하겠다. 땅을 잃은 고통은 이길 수 있고 곧 치유할 수 있는 자정 능력이 있다. 그러나 치유하기 힘든 것은 언어요 문화이다. 문화말살정책은 민족의 혼을 앗아가고 짓밟아버리기 때문이다. 열강의 틈에서 이 상황도 알아야 하겠고, 저 몸짓도 파악해야 하는 숨 가쁜 강대국 수뇌들의 악수의 의미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큰 틀이 어긋나면 작은 것들이 아귀가 맞을 리 없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를 목놓아 부르다 가신 이 땅의 위안부들에게 명복을 빈다. 봄비에 고개를 떨군 진달래 꽃부리가 동참 발원을 하는 듯하다.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 수행정진했고, 동국대학교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학교 선학과 교수, 미국 하버드대 세계종교연구센터 초청교수, 동국대 불교대학장, 정각원장, 한국선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장 겸 동국역경원장으로 불교학계 발전과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선학의 이해』, 『선어록 산책』, 『선문선답』, 『선문보장록』, 『선 사상론』, 『선 수행론』, 『한국선론』, 『벽암록의 세계』, 『한국을 빛 낸 선사들』, 『선심으로 보는 세상』 연보로 구성된 『최현각 선학전집』(전11권), 『내 사유의 속살들』, 『현각스님의 마음 두드림』등이 있고, 그 외 다수의 논문과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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