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의 그때 그 미소 그대로 깊숙이
20년 전의 그때 그 미소 그대로 깊숙이
  • 휴심정 이길우
  • 승인 2016.09.1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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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만나본 달라이 라마
중국특파원으로 티베트 취재 갔을 때 만났던 미소
불상 옆에도 가정집 안방 벽에도 있던 사진 속 그
 
▲ 인도 망명 초기시절의 청년 달라이 라마. 사진은 다람살라에서 30년간 달라이 라마의 제자로 수행하고 있는 청전 스님이 제공했다
 
그의 미소는 깊었다. 편안했다. 마치 대웅전의 여래상 미소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포근하게 보듬어 주었다. 통역자가 그의 말을 옆에서 통역하는 동안 그는 문득 나를 바라다보았다. 그의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있던 나는 렌즈를 댕겼다. 피사체가 커지며 그의 미소가 바짝 다가왔다. 달라이 라마는 자신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렌즈를 향해 웃었다. 그 웃음은 부드럽고도, 친근하게 렌즈를 통해 나의 망막에 상을 투영했다. 바로 그때였다. 시간이 순식간에 이동했다, 20년 전으로.
 1996년 3월이었다. <한겨레신문> 초대 베이징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나는 당시엔 외국인 특파원에게 잘 허가를 해주지 않던 티베트 취재를 가게 됐다. 중국 외교부에는 라싸에서 열리는 산업박람회를 취재하고 싶다고 해 허락을 받았지만, 내심 티베트의 독립운동에 대해, 그리고 티베트인들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존재에 대해 취재하고 싶었다.
 
q8.jpg » 지난달 30일 인도 다람살라에서 열린 한국 기자단과의 기자회견 모습.
q7.jpg » 지난달 30일 인도 다람살라에서 한국 기자단과의 기자회견 당시 보여준 달라이 라마의 미소
 
 카메라 셔터에 올린 손가락이 가볍게 떨렸다
 놀랍게도 당시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곳곳에 있었다. 라싸 포탈라궁의 수많은 불상의 옆에 달라이 라마의 작은 얼굴 사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방문한 티베트인들의 안방에도 예외 없이 달라이 라마의 사진이 벽에 있었다. 비록 큰 사진은 아니었지만 미소 짓는 달라이 라마는 명함판 크기의 작은 사진으로 티베트 각 지역에서 오체투지로 라싸에 온 티베트인들을 반기고 있었다. 군사력으로 티베트를 점령하고 있던 중국 중앙정부도 티베트인들의 달라이 라마에 대한 믿음과 존경심을 뿌리채 뽑을 수 없다고 판단해, 조그만 사진을 불상 옆에 두는 것을 막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후 티베트 독립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되고 140여명의 티베트인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분신 자살한 지금은 티베트 내에서느 달라이 라마의 흔적을 보기는 어렵다고 한다.
 티베트를 무겁게 내리누르던 중국 정부의 압박 속에서 조금씩 내보이던 그때의 달라이 라마의 미소를 20년이 지난 지금, 눈앞에서 다시 크게 바라볼 수 있었기에 카메라 셔터에 올린 손가락이 가벼운 경련을 일으키곤 했다. 그는 미소를 금방 거두지 않았다. 내가 촬영을 마치고 카메라에 눈을 떼고, 만족한 웃음을 그에게 보일 때까지 그는 계속 미소를 보여줬다. 눈이 마주쳤다. 그의 미소가 한층 커졌다. 말은 나누지 못했지만 그의 마음이 전해졌다. 나의 마음 깊숙이 그가 파고들었다. 
 달라이 라마는 ‘큰 바다’를 의미하는 몽골어 ‘달라이’와 ‘스승’을 의미하는 티베트어 ‘라마’가 합쳐진 말이다. ‘큰 바다 같은 스승’이라는 뜻이다. 달라이 라마는 오랫동안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를 가르키는  일반명사였다. 초대 달라이 라마인 겐뒨둡(1391~1474)이 죽자, 티베트인들은 그를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겼다. 그 뒤에 겐뒨둡이 환생한 인물을 찾아 새로운 지도자로 모시는 관례가 생겼다.
 
q2.jpg » 달라이 라마가 5살 즉위할 당시 모습. 사진은 다람살라에서 30년간 달라이 라마의 제자로 수행하고 있는 청전 스님이 제공했다.
 
 직전 달라이 라마의 주검 머리가 스스로 움직여 가르킨 곳
  지금 달라이 라마는 14대이다. 그는 1935년에 티베트의 아무드 지방 타크쉘 마을(중국 청해성)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어떻게 달라이 라마가 될 수 있었을까?
 13대 달라이 라마인 툽텐 갸초가 입적한 후, 주검의 머리 부분이 스스로 움직여 남쪽에서 북동쪽으로 위치를 바꾸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차기 달라이 라마가 북동쪽에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주변에서는 해석했다. 또 거룩한 호수 라모 남 초의 수면에 ’아 · 카 · 마‘라는 티베트 문자가 나타났다. 3층 건물인 사원과 언덕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길, 기묘한 형태의 물받이가 있는 집도 나타났다. 모두 환생과 관계된 정보였다. 또 툽텐 갸초는 자신의 환생자에 대해 “다리에 호랑이처럼 줄무늬가 있고, 커다란 눈동자와 활처럼 휘어진 눈썹과 커다란 귀, 어깨엔 두 개의 사마귀, 마치 관세음보살처럼 기다란 두 팔과 손바닥에 조개 모양의 손금이 있는 사내아이를 찾아라”며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환생할지 몇 가지 단서를 남겨두었다. 
 
q1.jpg » 달라이 라마의 어린 시절. 사진은 다람살라에서 30년간 달라이 라마의 제자로 수행하고 있는 청전 스님이 제공했다.
 
 환생한 달라이 라마를 찾기 위한 수색대는 주검 머리 부분의 위치와 티베트 문자의 비전을 통해 다음 달라이 라마의 환생처가 티베트 북동부의 아무드 지방이라는 것을 알았다. 3층 건물의 사원은 아무드의 쿰붐 사원이었다. 수색대는 아무르 마을에서 비슷한 집을 찾아냈다. 과연 그 집에 어린아이가 있었다. 이름은 라모 톤둡. 수색대는 라싸의 세라 사원의 주지 케상 린포체를 대표로 했지만, 그는 하인으로 변장하고 그들 중 가장 나이 어린 롭상 체왕이 대표로 행세했다. 하지만 라모 톤둡은 케상 린포체를 발견하자마자 그의 무릎 위로 뛰어올라 13대 달라이 라마의 유품인 염주를 달라고 했다. 케상 린포체가 자신이 누군지 알아맞히면 염주를 주겠다고 하자 라모 톤둡은 사투리로 “세라 사원의 주지”라고 말했다. 티베트 사람들은 두세 살 무렵에 전생을 기억한다고 말한다. 더 나이가 들면 새로 받은 몸의 기운으로 인해 전생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사절단은 라모 톤둡이 달라이 라마의 환생임을 확신했다.
 
q6.jpg » 인도 망명한 뒤 어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은 달라이 라마. 사진은 다람살라에서 30년간 달라이 라마의 제자로 수행하고 있는 청전 스님이 제공했다.
 
 다섯 살 때 즉위…15살 때 중국군 침공
 그는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외양간 짚 위에서 태어났다.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하늘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걸렸다고 한다. 아이들은 대부분 눈을 감은 채 태어나지만, 그는 특이하게 눈을 뜨고 태어났다고 한다.
 1940년 2월 22일, 라모 톤둡은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로서 즉위식을 열었다. 사람들은 그를 ‘쿤둔’이라 불렀다. 쿤둔은 ‘살아 있는 부처’라는 뜻으로 마땅히 공경받을 만한 분에 대한 존경의 이름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장난기 많고 호기심이 강했다. 좋아하는 장난감은 페달 달린 빨간 차와 태엽 감는 기차 세트, 전쟁놀이를 할 수 있는 납 인형 등이었다. 손재주가 좋아 장난감을 분해했다가 조립하곤 했다. 나라의 지도자로서 철저한 교육도 받았다. 그를 위한 교과과정은 불교학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는 승려들의 것과 같았다. 쿤둔은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친해졌다. 외국인 친구 하인리히 하러에게 서구의 문물과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q4.jpg » 인도 망명 초기시절의 청년 달라이 라마. 사진은 다람살라에서 30년간 달라이 라마의 제자로 수행하고 있는 청전 스님이 제공했다.
 
 하지만 그에게 시련의 어두운 그림자가 몰려왔다. 비단 그뿐 아니라 모든 티베트인들에겐 절망의 시작이었다. 1950년 10월 7일, 중국군이 티베트를 침공한 것이다. 15세의 쿤둔은 세속의 권력을 상징하는 황금바퀴를 받았다. 하지만 이미 힘을 잃은 정부의 수반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소수의 종교 귀족이 인민들을 핍박하고 있는 티베트를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지배를 강화했다. 티베트인들은 분노했다. 일 년 뒤 쿤둔은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 중국 정부가 내미는 17개 항의 조약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가 됐다. 중국은 티베트를 완전히 중국 영토로 만들고자 했다. 티베트의 독특한 문화와 정신을 공산주의 문화와 정신으로 바꾸려고 한 것이다.
 
q3.jpg » 인도 망명 초기시절의 청년 달라이 라마. 사진은 다람살라에서 30년간 달라이 라마의 제자로 수행하고 있는 청전 스님이 제공했다.
 
 민중 봉기 무력진압에 8만여명 사망…히말라야 넘어 망명
  1959년 3월 중국은 쿤둔을 베이징으로 초대했다. 3월 10일 중국군 사령부에서 열리는 가무단 공연에 초청했는데, 쿤둔의 참석을 비밀로 해야 하며, 경호원이나 동행하는 각료 없이 와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티베트 각료들은 쿤둔을 베이징으로 납치하려는 계략이라고 판단했다. 이 소식으로 3월 10일 티베트 민중 대봉기가 일어났다. 이에 중국군은 데모하는 군중을 무차별 공격하고, 노부링카 궁을 포격할 예정이니 지도에 쿤둔이 있게 될 장소를 표시해달라고 제안했다. 그곳을 피해 포격하겠다는 것이다.
 쿤둔은 소요가 진정되기를 기다려달라며 자신의 위치는 알려주지 않았다. 3월 17일 오후 두 발의 박격포탄이 노부링카 경내 연못에 떨어졌다. 결국 피난을 가야했다. 3월 28일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가 티베트 정부가 해체되었음을 선언했다. 달라이 라마는 “조국을 떠나 국민에 봉사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인도로 망명했다. 티베트인들의 그 봉기로 몇 주 사이에 8만7천여 명이 살해됐고,  2만5천여 명이 투옥됐다. 또 10만여 명이 달라이 라마를 따라 히말라야 설산을 넘어 인도로 피신하거나 망명했다.
 인도 정부는 중국과의 정치적 관계 때문에 당혹스러워했지만, 결국 달라이 라마의 망명을 허가했다.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 2500여 평의 주거 지역을 내주었고, 달라이 라마는 이곳에 망명정부를 세웠다.(계속)
 
※달라이 라마의 어릴 때와 망명 뒤 청년 때 사진들은 다람살라에서 30년간 달라이 라마의 제자로 수행하고 있는 청전 스님이 제공했다.

*이 기사는 휴심정과의 제휴에 의해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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