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문관: 조주구자(趙州狗子)
신무문관: 조주구자(趙州狗子)
  • 박영재 교수
  • 승인 2018.01.25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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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선도회 박영재 교수와 마음공부 32.

* 성찰배경: 중국 당나라의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 선사는 120세까지 산, 드물게 장수한 선사였으며 그의 어록(語錄)인 <조주록趙州錄>은 지금도 선가(禪家)에서 널리 읽히고 있는 필독서입니다. 한편 그에 의해 만들어진 ‘조주무자(趙州無字)’ 또는  ‘조주구자(趙州狗子)’라고도 부르는 이 화두는 훗날 송나라의 오조법연(五祖法演, 1024-1104) 선사에 의해 새롭게 제창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으로 수행자들이 가장 많이 참구해오고 있는 몇몇 화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무문관(無門關)>에 수록된 48개의 화두들을 대표하는 제1칙인 ‘조주구자(趙州狗子)’에 대해 법연 선사께서 이 화두를 어떻게 새롭게 바꾸었는지와 이 바꾼 화두로 6년간 참구하다가 큰 깨달음에 도달한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 선사의 선적(禪的) 체험이 그대로 드러난, <무문관>의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는 평창(評唱, 선사가 자신의 선적 체험을 바탕으로 수행자들에게 도움을 주기위해 고인(古人)의 화두에 있는 문답에 비평을 가한 글) 및 송(頌, 본칙에 담겨 있는 선지禪旨를 단적으로 들어낸 간결한 시)을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다음 글부터는 지난 글에서도 밝혔듯이 새로운 관점에서 나머지 화두들을 제창할 예정입니다. 참고로 필자의 경우 매일 이른 아침 좌선을 시작할 때 신사홍서원, 반야심경 염송과 함께 선 수행자들에게 매우 요긴한 무문 선사의 조사관(祖師關)에 관한 이 평창을 필자의 ‘참선곡(參禪曲)’으로 삼아 늘 원문(原文)으로 염송(念誦)하며 그 참뜻을 온 몸으로 새기곤 합니다.

법연 선사가 새롭게 제창한 ‘무’자 화두

우선 이 화두에 대해 <조주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조주 스님에게 어느 때) 한 수행자[學人]가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狗子還有佛性也無] 조주 스님, ‘무(無)’라고 답했다.[師云 無] 학인이 다시 물었다. 위로는 제불(諸佛)에서부터 아래로는 개미[의자螘子]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는데, 개는 어째서 ‘무(無)’입니까? 조주 스님, 개에게는 업식성(業識性)이 있기 때문이니라.”

한편, 임제종(臨濟宗) 양기파(楊岐派)에 속하는 법연 선사의 어록인 <오조록(五祖錄)> 권하(卷下)에 보면, 상당법어(上堂法語) 가운데 ‘조주무자’ 화두에 관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평소 ‘조주무자’ 화두를 어떻게 참구하고 있는가? 노승은 언제나 다만 ‘무(無)’자(字)만을 참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위에서 언급한, 뒤에 붙어 있는 업식성에 관한 부분은 군더더기라고 봄, 즉 ‘師云 無’까지만 참구하면 된다는 견해임.) 여러분들이 만약 이 ‘無’자 하나를 투과(透過)하여 체득(體得)한다면 천하에 그 누구도 여러분을 어쩌지 못할 것이다. 자! 여러분! 조주의 이 ‘無’자를 어떻게 투과할 것인가? 이 ‘無’자를 철저히 투과한 사람이 있는가? 있으면 즉시 나와서 간파한 바를 제시해 보라! 나는 여러분들이 ‘有(있다)’라고 답하는 것도 원하지 않으며, ‘無(없다)’라고 답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또한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니라고 답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어떻게 제시하겠는가? 그럼 이만 열심히 수행들 하게!”
사실 ‘조주무자’ 화두의 앞부분만을 취한 법연 선사의 이 새로운 제창(提唱)이 바로 손자 제자인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가 주로 재가(在家)의 사대부(士大夫)들과 교류하면서 이들을 위해 새롭게 주창(主唱)한 공안선의 참구 방법과 간화선 수행 체계의 원류이며, 훗날 무문혜개 선사의 평창과 송이 담긴 선종 최후의 공안집이라고 할 수 있는 <무문관>을 통해 이 ‘조주무자’ 공안, 즉 간화선의 수행체계는 완성되게 됩니다.

무문관 제1칙 조주구자(趙州狗子)

본칙(本則): 어느 때 한 승려가 조주 스님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조주 스님, “무(無)!”라고 대답했다. [趙州和尙 因僧問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평창(評唱): 무문 선사 말하기를, “참선은 반드시 조사들의 관문을 투과하지 않으면 안되며 오묘奧妙한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분별심을 끊어버려야만 한다.[參禪須透祖師關 妙悟要窮心路絶] 따라서 조사관을 투과하지 않고 분별심을 끊지 못하는 자들은 초목에 기숙寄宿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혼백(魂魄)들이 될 것이다.”

자! 말해 보아라! 조사관이란 어떤 것이냐? 다만 이 일개(一箇)의 ‘무(無)’라는 자(字), 이것이 종문(宗門)의 유일(唯一)한 관문인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이것을 이름 하여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이라 하겠다. 이 관문을 투과한 자는 비단 가까이에서 조주 선사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대 조사들과도 손을 맞잡고 함께 나아가며 얼굴을 맞대고 똑같이 보고 똑같이 들을 수 있을 것이니, 이 어찌 경쾌하지 않으리요! 이 관문을 투과하려 하지 않겠는가! 360개의 뼈마디와 84000개의 털구멍으로, 즉 온 몸으로 의단(疑團)을 일으켜 밤낮으로 ‘무(無)’자(字)를 참구하라. 이 ‘무’자를 ‘허무(虛無)의 무(無)’라고 헤아리지 말며 ‘유무(有無)의 무(無)’라고도 헤아리지 말라. 이것은 마치 시뻘겋게 달군 쇠구슬을 삼킨 것과 같아서 토해내려 해도 토해낼 수 없다. 지금까지 쌓아온 나쁜 지식들을 전부 탕진하여 수행이 무르익게 되면 자연히 모든 차별상은 한 덩어리로 뭉쳐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는 마치 꿈을 꾼 벙어리와 같아서 다만 자신만이 알 뿐이다.

그러다 갑자기 뭉쳐졌던 이 의심덩어리[疑團]가 대폭발을 일으키면 하늘이 놀라고 땅이 진동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관우 장군의 대도(大刀)를 빼앗아 손에 넣은  것과 같아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逢佛殺佛],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는’[逢祖殺祖] 것과 같고,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지라도 자유자재를 터득하여,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든지 마음 가는대로 행하여도 해탈무애한 참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럼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되겠는가? 목숨을 걸고 평생 동안 온 힘을 다하여 이 ‘무’자를 참구하라.[盡平生氣力 擧箇無字] 끊임없이 정진한다면, 언젠가 반드시 마치 등불을 켤 때처럼 법등法燈을 밝히게 될 때 주위의 어둠은 일시에 광명으로 빛나리라.

송(頌): 게송하여 가로되, 개의 불성(에 관한 물음에 대한 조주의 ‘무(無)’라는 외침!)/ 석가세존의 바른 가르침을 몽땅 드러냈네./ 그러나 조금이라도 ‘유무(有無)’에 걸리면/ 몸을 상(傷)하고 목숨을 잃으리라. [頌曰 狗子佛性 全提正令. 纔涉有無 喪身失命.]

군더더기: 이 화두의 핵심은 경전(經典)에서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즉 모든 만물은 다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왜 조주 선사께서는 “무(無)!”라고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有(있다)無(없다)’라고 할 때의 ‘無’라는데 걸리면 이 화두는 평생 해결 못하는 난제로 남게 됩니다. 따라서 어떻게 有·無를 초월할 것인지는 각자가 진지하게 체득할 일입니다. 사실 조주 스님은 불성(佛性) 자체에 관한 자신의 선적 체험을 바탕으로 본인 자신과 우주와 ‘無’가 일체가 되어 물음을 던진 승려 앞에 그 경계를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자! 여러분! 불교에서는 모든 만물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왜 조주 스님은 ‘無!’라고 했는지에 관해 여러 조사어록(祖師語錄)들에 담겨있는 언구(言句)들은 모두 다 집어던지고 직접 다리를 틀고 앉아 ‘무’자와 철저히 한 몸이 되어 조주 스님의 배짱을 스스로 꿰뚫어 보십시요!

참고로 석가세존께서는 모든 만물은 다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설하셨기 때문에 아무리 하찮은 개라고 할지라도 불성이 있는 것이나 조주 스님은 어떤 승려의 질문에는 “무(無)!”라고 대답을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어떤 날은 다른 승려가 똑같이 물었는데 이때는 “유(有)!”라고 대답을 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조주 스님의 ‘유’와 ‘무’는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뜻의 ‘유’나 ‘무’가 아닌 것이며, 팔만대장경을 다 뒤져보아도 이에 대한 견해는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다만 오직 스스로 체득해야만 조주 스님의 배짱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삼일 운동을 일으켰던 33인의 한 분이신 용성(龍城) 선사께서는 이 ‘조주무자’를 투과하신 경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셨습니다. ‘개에게 불성이 없다함은/ 조주 스님의 망령된 분별이요/ 봄날 동쪽 호수의 물은 푸르른데/ 백구는 한가로이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구나!’[狗子無佛性 趙州妄分別 東湖春水綠 白鷗任浮沈.]

그리고 종달 선사께서는 1984년에 펴낸 자서전(自敍傳)인 <인생의 계단>에서 ‘조주무자’의 경계를 다음과 같이 나투셨습니다. ‘간신히 조주무자를 얻어 평생을 쓰고도 다 못쓰고 가노라![재득조주무자纔得趙州無字 일생수용불진一生受用不盡.]

마지막으로 필자가 1991년 8월에 화계사로 숭산행원 선사께 입실(入室)했을 때 이 ‘무’자 화두에 대해 1) “석가는 ‘일체중생실유불성’이라고 했으나 조주는 ‘구자무불성’이라 외쳤다. 누가 옳은가?” 2) “조주는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하는 물음에 왜 ‘무(無)’라고 답했을까?” 3) “다시 ‘그대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대는 무엇이라 답하겠는가?”란 질문들을 받고 무사히 점검을 마쳤었습니다.

여기에 필자는 물음 하나를 더 보태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4) “무수히 많은 역대 조사들께서 각각 나름대로 ‘조주무자’에 대해 한 마디씩 제시하셨는데, 이 경계들은 서로 다른 것인가 같은 것인가?” 사실 ‘조주무자’에 관한 물음을 네 개로 쪼개어 보다 철저히 점검하고자 했으나, 누구나 목숨을 걸고 수행하다 보면 이 ‘무(無)란 무엇인가? 하는 의심덩어리와 언젠가 저절로 하나가 될 것이며, 이렇게 될 때 이 물음들은 일시에 한 꼬치에 꿰어질 것입니다!

덧붙여 사실 스승의 인가(印可)를 통한 화두 타파는 수행의 한 과정일 뿐, 궁극적으로는 통찰(洞察)과 나눔[布施]이 둘이 아닌, ‘통보불이(洞布不二)’의 실천적 삶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박영재 교수는 서강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3월부터 6년 반 동안 강원대 물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1989년 9월부터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강대 물리학과장, 교무처장, 자연과학부 학장을 역임했다.

1975년 10월 선도회 종달 이희익 노사 문하로 입문한 박 교수는 1987년 9월 노사의 간화선 입실점검 과정을 모두 마쳤다. 1991년 8월과 1997년 1월 화계사에서 숭산 선사로부터 두차례 입실 점검을 받았다. 1990년 6월 종달 노사 입적 후 지금까지 선도회 지도법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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