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조 이성계가 무학 대사와 함께 한양의 지덕을 비보하기 위해 창건했다는 동쪽 청련사, 서쪽 백련사, 남쪽 삼막사, 북쪽 승가사 등 4곳의 비보사찰. 무학 대사가 지정했다고 전하는 이들 한양 비보사찰이 조선초가 아닌 1800년대 등장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종수 교수(순천대)는 14일 양주 청련사에서 열린 '양주 청련사의 역사와 문화' 주제 학술세미나에서 발표했다.
이 교수는 '청련사의 역사적 변천과 위상' 제하의 주제발표에서 "백련사 승가사 삼막사는 모두 그 창건과 역사가 별개로 이뤄졌다. 무학대사가 비보사찰로 지정했다거나 19세기 이전 한양도성을 비보하는 4대 사찰로 인식됐다고 볼만한 근거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사찰들은 19세기 이후 어느 시기 한양비보 4대 사찰로 인식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 교수는 "청련사는 좌청련 우백련의 풍수지리적 개념 사찰명보다는 안민정국의 안정사로 창건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 교수는 "무학대사가 한양 비보사찰을 염두에 두고 청련사를 중창했다기보다는 종남산 지세를 보고 동쪽으로 이전 건립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했다.
청련사는 신라시대 창건설과 조선시대 무학대사 창건설이 전한다.
신라시대 창건설은 흥덕왕 2년인 827년을 창건 시점으로 본다. 당시 명칭은 안정사였다. 이 교수는 "청련사가 선종 사찰로 창건됐을 것"이라고 했다.
조선시대 무학대사 창건설은 무학대사가 한양 비보사찰로 청련사를 지정하면서 종남산 서쪽 계곡에 있던 것을 동쪽 계곡으로 옮긴 것에서 비롯된다. 청련사는 무학대사 중창 후 조선말기 까지 5번의 중창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도 2번 중창을 했다.
청련사는 지금의 서울 왕십리 KCC스위첸 아파트 자리에서 2010년 양주 개명산 자락으로 옮겨졌다. 이 교수는 이를 '시련의 역사'라고 했다.
이 교수는 청련사 중창주인 백우 스님의 행장 등을 기록한 <백우대종사법어집>의 "분규를 통해 재산권을 가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이 불가의 도리와는 무관하게 삼보정재인 안정사 부지를 매각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도량을 이건할 수 밖에 없었다"는 구절을 인용했다.
[뉴스렙=조현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