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선지식] 聖과 俗 넘나들며 한국선 중흥 큰 발자국
[한국의 선지식] 聖과 俗 넘나들며 한국선 중흥 큰 발자국
  • 이기창
  • 승인 2006.01.1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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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달마 경허

법상에 오른 경허(鏡虛)는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줄 몰랐다. 경허가 어머니를 위해 법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서산 천장암까지 찾아온 대중으로 법당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어머니 박씨도 감로수 같은 법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은 도처에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창조했다. 어머니는 그만큼 위대한 존재인 것이다. 드넓은 해탈의 바다로 나아간 경허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이심전심의 영적 교감이 필요한 순간임을 경허는 직감했다. 경허는 먼저 가사를 벗었다.

장삼에 이어 저고리와 바지도 차례로 벗었다. 마침내 속옷까지 없어졌다. 태어날 때의 알몸으로 돌아간 경허는 어머니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를 보십시오. 어머니는 이 모습을 보고 내 자식 내 아들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이 것은 저의 본래 모습이 아닙니다.”

경허의 나체법문에 모두 기가 질려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급기야 모친은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냐. 경허스님이 미쳤어” 라는 외침과 함께 법당을 빠져나갔다. 경허는 일체의 가식과 허위를 버리고 천진무구한 아기의 모습을 어머니 앞에 재연한 것이리라. 그러나 아무도 그 참 뜻을 깨닫지 못했다.


경허 진영. 만공이 스승을 추모하여 당시 최고 인물화가에게 그리게 했다.

세간과 출세간을 넘나든 경허(1846~1912)의 무애행(無碍行)은 비도(非道)의 도와 맞닿아 있다. 비도는 유마경의 언어다. 비승비속의 삶을 살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일지는 경허의 비도의 도를 이렇게 풀이했다.

“비도는 단순히 도의 대칭이 아니며 비윤리가 아니다. 청정과 오염, 선과 악, 유와 무의 경계를 넘어서 불성이 현재한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는 보살의 행위다. 비도는 일탈이자 역행이며 파괴를 거친 새로운 가치의 생성이다. 대단히 위험한 역설이기 때문에 감히 넘보기 어려운 가치체계인 것이다.”

해탈의 무대에서 경허가 연출한 단막극은 부처에서 축생의 행각까지 망라돼 있다. 경허가 해인사 조실로 주석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나병에 걸린 한 미친 여자가 경내로 들어왔다. 경허는 스스럼 없이 불러들여 침식을 같이 했다. 만공은 스승의 행동이 원망스러웠다. 더구나 비구는 불음행계를 목숨처럼 지켜야 하거늘. 정신이 돌아온 여자는 경허에게 큰 절을 올리고 떠나갔다. 훗날 만공은 “다른 모든 것은 스승의 흉내를 낼 수 있으나 그 같은 일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다”고 회상했다.

경허는 조선왕조의 해체가 시작되던 1846년 8월24일 부친 송두옥과 모친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전주 자동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을 일찍 여읜 그는 가세가 기울자 9세 때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청계사 계허(桂虛) 문하에서 머리를 깎았다.

이미 그의 형 태허(泰虛)는 마곡사에서 수행중이었다. 중물을 익혀가던 경허는 동학사로 보내졌다. 환속을 결심한 계허가 유달리 영민한 그를 대강백 만화(萬化)에게 추천한 것이다.

경허는 동학사에서 불교경전은 물론 유가와 노장사상까지 두루 섭렵했다. 23세에 만화의 뒤를 이어 강백으로 추대됐다. 경허는 불현듯 첫 스승 계허가 보고 싶어졌다. 1879년 6월 경허는 절을 나섰다. 폭풍우 몰아치는 한 밤중에 콜레라에 걸려 줄초상을 당한 천안의 한 마을에서 죽음의 그림자와 마주쳤다. 경전의 지식은 죽음 앞에서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동학사로 발길을 돌린 경허는 폐강을 선언하고 선의 숲으로 몸을 던졌다.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몽중(都是夢中)이로다.
천만고 영웅호걸 북망산 무덤이요
부귀문장 쓸데없다 황천객을 면할소냐
오호라 나의 몸이 풀끝에 이슬이요
바람 속의 등불이라

관악산 청계사에서 출가한 경허는 여기서 초기 수행을 쌓았다. 경허는 동학사로 가기 직전 이름모를 선비로부터 한동안 학문을 배워 큰 진보를 이루웠다.

경허가 당시의 상황을 되살려 지은 참선곡의 첫 소절이다. 지금도 선방수좌들은 새벽 예불 때 천수경보다 경허의 참선곡을 즐겨 염송한다.

깨달음은 인격의 완성이다. 경허는 깨달음의 공덕을 한국선의 중흥에 모두 쏟아부었다. 수월(水月) 혜월(慧月) 만공(滿空) 한암(漢巖) 동산(東山) 금오(金烏) 전강(田岡) 향곡(香谷) 경봉(鏡峰) 등은 경허의 문하에서 불조의 혜명을 밝힌 운수납자들이다.

삼수갑산으로 잠적하기 전까지 20년 넘게 그의 발길 닿는 곳마다 선도량이 일어섰다. 매년 여름과 겨울, 두 차례의 수선안거 전통이 회복됐다. 경허의 사상은 그의 입적 후 30년이 지나 출간된 경허집에 응축돼 있다. 한용운은 서문에서 “문장마다 선이요 구절마다 법이어서 행위나 평가로서는 감히 말할 수 없다”고 경허를 기렸다. 경허의 오도가는 특히 한국선의 새 출발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경허는 오도가의 서두와 결말에서 “사방을 돌아보아도 아무도 없으니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리요”라고 한탄한다. 한암은 스승의 고독이 깨달음을 증명해 줄 사람이 없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것이 당시 조선불교의 현실이었다.

경허의 만행은 보림(保任) 이후 시작된다. 경허는 태허가 주지로 있던 천장암에서 보림에 들어갔다. 어머니 역시 형에 의지해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보림은 견성을 이룬 선사가 다시는 번뇌의 티끌이 묻지 않도록 심성을 밝히는 수행을 일컫는다. 보림 이후 경허는 곡차를 벗으로 삼았다. 담배도 피웠다. 여자도 가까이 했다. 비록 머리는 깎았지만 수염도 길렀다.

경허는 계율의 속박에서 벗어나 무애의 대자유를 누렸다. 여기서 평가가 엇갈린다. 경허를 소재로 장편을 쓴 정휴(구미 해운사주지)스님은 경허의 만행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본다.

“경허의 삶은 파격의 연속이다. 파격을 통해 깨달음의 자유를 시험했고 명분과 사상의 틀에 안주하기를 거부한 초인이었다.” 그렇다고 경허의 허물이 감춰지지는 않는다. 그의 무애행각을 비난하는 시각이 엄존하고 있다.

을사늑약의 올가미가 씌워지던 해(1905년) 경허는 북녘으로 발길을 돌린 뒤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머리를 기르고 박난주(朴蘭洲)라고 이름을 지었다. 경허가 왜 삼수갑산으로 몸을 숨겼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는다.

최근 노장사상과 연결 지어 해석하는 견해도 나온다. 경허의 유발은 환속이 아니었다. 다만 자취를 감추고 사라지기 위한 행위였다. 선은 형상으로 성(聖)과 속(俗)을 가르지 않는다. 깨달음만을 원칙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삼수갑산에서 경허의 행적은 재가제자로 삼은 김탁 등에 의해 수덕사에 전해졌다. 김탁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발족을 위한 국민회의 국민대표 250인중 한명에 포함 될 정도로 평생을 조국광복에 헌신했다.

경허는 1912년 4월25일 함남 갑산군 웅이방 도하동에서 육신의 옷을 벗었다. 세수 67, 법랍 59세였다. 임종게 만이 그의 열반을 지켰다.

마음의 달 홀로 둥근데
신령스러운 빛은 삼라만상을 삼키네
빛과 만상이 모두 사라졌으니
다시 무엇이 있겠는가
心月孤圓(심월고원)
光呑萬像(광탄만상)
光境俱忘(광경구망)
復是何物(복시하물)

경허는 기인이 아니었다. 농세(弄世)의 달인도 아니었다. 한국선의 중흥조이자 당대의 석학이었다. 경허가 없었다면 한국불교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눈 밝은 납자에게 그 답은 분명할 것이다.

'콧구멍 없는 소'로 자유·해탈 깨달아

깨달음을 향한 고독한 여정의 도반은 ‘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의 화두였다.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니, 이 게 무슨 도리일까. 지옥의 문턱까지 같다 온 경허의 뇌리에 찍힌 화두가 바로 이 것이었다.

이 화두는 8세기 중국 위앙종의 대선사 영운지근(靈雲志勤)에서 비롯됐다. 영운지근은 30년간 반야의 검을 찾아 방황하다 대오를 이룬 선의 검객으로 그의 원력은 오늘날까지 심검당(尋劍堂)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찰에 살아 숨쉬고 있다.

한암은 경허행장에서 이 화두를 여년(驢年ㆍ당나귀 해)이라는 선어를 통해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당나귀 해란 돌아오는 기한이 없음을 이른다. 12간지 가운데 여년이라는 이름이 없는 까닭에 만날 기한이 없음에 비유한 것이다.

’ 즉 당나귀 해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며 그 연장선상에서 당나귀의 일은 비실재를 뜻한다. 이에 반해 말의 일은 실재하는 현재이며 존재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당나귀의 일과 말의 일은 삶과 죽음, 유와 공의 대립을 상징한다.

경허는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칼을 갈아 턱에 들이대며 수마와 싸웠다. 그래도 깨달음의 문은 쉽게 경허의 발걸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혜의 눈이 번쩍 뜨이게 된 계기는 학명이 전해준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處ㆍ우무비공처)’라는 단 한 마디였다.

중국 법안종의 종주 법안(法眼)선사의 어록에 실려 있는 선어다. 학명은 재가불자 이처사와 법거래를 하면서 이 말의 뜻을 헤아리지 못해 경허에게 물었고 경허는 마침내 해탈의 통로를 찾아낸 것이다.

당시 경허의 시봉을 들던 사미 원규의 부친이 이처사였고 학명은 원규의 스승이었으니 참으로 기연이 아닐 수 없다. 때는 1879년 11월15일이었다.

경허를 가두었던 미망의 그물이 산산조각 나면서 경허는 이제 당나귀와 말의 일 사이에서 방황하는 일이 없는 콧구멍 없는 소가 된 것이다.

고삐를 꾈 콧구멍이 없는 소는 이리저리 끌려 다닐 일이 없다. 바로 자유와 해탈을 상징한다. 경허가 절집의 관례를 깨고 스스로 법명을 깨달은 소, 즉 성우(惺牛)라고 지은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경허는 오도송(悟道頌)을 지어 그 기쁨을 노래했다.

문득 콧구멍 없는 소라는 말을 듣고
온 우주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일없는 시골사람들이 태평가를 부르네

忽聞人語無鼻孔(홀문인어무비공)
頓覺三千是我家(돈각삼천시아가)
六月燕岩山下路(유월연암산하로)
野人無事太平歌(야인무사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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