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ㆍ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와 ‘무(無)’자 화두가 그 것이다.
만공은 25세때 ‘만법귀일…’을 참구하다 심지가 밝아진다. 첫번째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오도송을 짓는다.
빈 산의 이치와 기운은 고금의 밖에 있는데
흰 구름 맑은 바람은 스스로 오가네
무슨 일로 달마는 서쪽 하늘을 건너 왔는가
축시에 닭 울고 인시에 해가 솟네
空山理氣古今外(공산이기고금외)
白雲淸風自去來(백운청풍자거래)
何事達磨越西天(하사달마월서천)
鷄鳴丑時寅日出(계명축시인일출)
경허는 “불속에서 피어난 연꽃이구나”라고 흐뭇해 한다. 불속에서 피어난 연꽃(火中生蓮華ㆍ화중생연화)은 유마경의 귀절이다. 같은 경전에 실린 번뇌의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보다 훨씬 강렬한 의미를 담은 격려였다. 경허는 그러면서 제자의 습기(習氣ㆍ생각 등의 찌꺼기)를 염려해 무자 화두를 주어 확연대오(廓然大悟ㆍ완전한 깨달음)의 길로 이끈다.
만공의 두 화두는 모두 중국 당 시대 대선사 조주(趙州ㆍ778~897)가 창안 것이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수좌가 조주에게 물었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옷 한 벌을 지었는데 무게가 일곱근이었다네.” 조주의 대답이었다.
만법은 곧 삼라만상으로 분별심과 집착에서 비롯된 현상이며 ‘하나’는 절대진리를 말한다. 조주의 엉뚱한 대답은 이런 의미를 지닌다. 옷을 새로 지었든 또 그 옷의 무게를 달아보았든 일체의 모든 행위는 절대진리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상대적 인식을 버리고 절대적 인식의 세계에 들어가야 진여(眞如)를 볼 수 있다는 의미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한 수좌의 물음에 조주는 “없다”고 답했다. 다른 수좌에게는 “있다”고 말했다. 조주는 왜 동일한 질문에 정반대의 대답을 내놓았을까. 조주는 있고 없음의 상대적인 분별심을 벗어나야 불성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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