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스님 성전] 아름다운 귀농인
[미소스님 성전] 아름다운 귀농인
  • 김영태
  • 승인 2006.04.25 13: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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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하다. 걸망을 메고 길을 나서면 발걸음이 햇살처럼 가벼울 것만 같다. 어디로 갈까. 문득 가야할 행선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길을 떠나본 사람은 안다. 갈 곳이 없다는 것이 때로는 자유가 되지만 때로는 커다란 슬픔이 된다는 사실을. 길 위에 서서 주저와 더불어 다가오던 막막함이 좋았던 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이제는 그런 순간들을 만나는 것이 힘이 든다. 많이 약해진 것이다. 익숙한 것이 좋아지고 계획되어 있는 것이 좋은 것을 보면 내 왕성했던 발길도 이제는 잦아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길을 나서는 데도 이렇게 머뭇거리게 되는데 하물며 인생의 행로를 바꾸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어느 날 이른 아침, 나는 예기치 않았던 방문을 받았다. 스님 계세요, 하고 한 남성이 들어섰다. 그는 나를 알고 찾아 온 것 같았지만 나는 그를 알 수가 없었다. 검게 탄 얼굴 그리고 맨 발인 그의 모습은 절에 찾아오는 방문자로서는 이례적이었다. 나는 처음에 그가 잘못 찾아온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이신가요, 하고 묻는 내 질문에 그는 아주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모르시겠어요. 서울에서 회사 다닐 때 스님 몇 번 뵌 적이 있잖아요. 저 기억 못하세요?” 그의 모습으로는 나는 그를 기억할 수 없었다. 그가 이름을 말했을 때 나는 비로소 그를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었다. 그래, 그를 나는 오래 전 서울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 때 그는 젊었고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피부도 전형적인 도시인처럼 희었었다. 그러나 내 앞에 서있는 그는 오랜 세월 전에 내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얼굴은 햇살에 그을려 있었고 손등은 아주 거칠어 보였다.

나는 예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의 근황을 물었다. 그는 귀농해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귀농한 지는 이제 삼년이 된다고 했다. 서울에서의 삶은 길이 아닌 길 위에서의 삶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하루를 살더라도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살아보는 것이 정말 의미 있겠다는 생각에 귀농을 결행 했다는 그의 고백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귀농 후 몸이 부서지는 아픔이 있었지만 이제는 견딜 만하다고 했다. 아이가 흙에서 뛰어 놀고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고 밤에 평상에 누워 별을 바라보면 행복하다고 했다. 옷은 사 입지 않고 먹거리는 밭에서 해결하며 살지만 마음은 무척 편하다며 그는 웃음을 지었다. 우연히 알고 그냥 왔다는 그의 말 속에서 나는 그의 아주 잠잠한 마음자리를 볼 수 있었다. 삶에 형식이 아니라 의미를 찾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마치 한 송이 연꽃인 것만 같았다. 길을 떠나기도 어려워하는 내게 삶을 떠나온 그날의 그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오늘 화창한 햇살 아래서 문득 그를 떠올린다. 그에게 가 보고 싶은 것이다. 의미를 찾는 사람끼리 만나 아름다운 별 하나를 함께 보고 싶다는 유혹이 내 가슴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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