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시인과 노스님] 삶의 진퇴를 안다는 것
[젊은시인과 노스님] 삶의 진퇴를 안다는 것
  • 이홍섭
  • 승인 2006.05.08 15: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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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에 머물던 시절, 나는 만해 한용운 스님에게 둘러싸여 살았다.

내가 머물던 때가 은사스님께서 죽은 만해 스님을 불러내 쓰러져 가던 백담사를 대가람으로 중창하기 시작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은사스님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만해당' '만해적선당' '만해교육관' '만해기념관' 등을 세워 나가셨다. 덕분에 백담사는 '대통령 유배지'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만해 정신의 요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으며, 대통령이 유배되었던 곳을 보러 왔던 사람들이 돌아갈 때는 만해 스님의 체취를 온몸에 묻히고 갈 수 있었다. 은사스님은 말 한마디 없이 '대통령 유배지'를 '만해 정신의 요람'으로 바꾸어 놓으신 것이다. 은사스님은 이따금 우스갯소리로 이 어마어마한 중창불사를 두고 '만해 장사'라고 표현하셨다. 장사치고는 썩 괜찮은 장사였다.

이 장사 덕분에 나도 덩달아(?) 만해 스님의 삶과 시에 대해 자주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만해 스님이 머물던 방에서 자 보기도 하고, 그가 거닐던 경내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가기도 하고, 그가 오르던 산길을 나 역시 숱하게 오르내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백담사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님 한두 분이 지키던 '깊은 산속 외딴 절'에 불과했다. 찾아오는 불자들이 없어 스님들은 속초까지 나가 탁발을 해서 연명했을 정도였다. 젊은 시절 백담사에 무문 적이 있었다는 중광 스님께 여쭈어 보았더니 밥을 소금에 찍어 먹을 정도로 빈한한 절이었다고 했다. 고무신이 떨어지면 맨발로 내설악을 누비고 다녀 그때 자신의 별명이 '맨발의 청춘'이었다고도 했다. 전쟁 중에 내설악에서 죽은 이들이 많아 전쟁이 끝난 한참 뒤에도 여기저기서 해골이 굴러다녔다. 그 해골바가지로 물을 떠먹곤 했다고 말한 스님은 어느날 찾아온 중광 스님의 도반이었다.

이런 전설 같은 얘기를 들을 때마다 늘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 하나가 있었다. "만해 스님은 왜 이 깊은 절까지 찾아왔을까. 그리고 왜 삶의 전환기 때마다 이곳을 다시 찾아왔을까"라는 의문이 그것이다. 만약 만해 스님의 파란만장한 삶을 백지 위에 그려 보면 백담사는 파도가 막 치기 시작하는 곳, 숨죽이며 힘을 모으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고향 홍성에서 서울을 향하여 무작정 가출하다 방향을 틀어 지도상 정반대에 위치한 백담사로 찾아드는 것도 그렇고, 다시 여러 곳을 전전하다 결국에는 또다시 백담사로 찾아와 스승 밑에서 공식으로 출가한 것도 그렇다. 3·1운동의 실패 이후 찾아든 곳도 백담사였다. <<님의 침묵>>이나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는 그때 백담사와 오세암에서 각각 쓰인 저작들이다.

이 모든 행보를 두고 볼 때 만해 스님의 생애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삶의 진퇴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스님은 진進할 때와 퇴退할 때를 알았고, 그 선택의 순간에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진할 때 진하고, 퇴할 때 퇴했다. 그의 삶에서 진퇴를 바꾸어 버리면 스님과 시인, 그리고 독립운동가를 한 코에 꿰차는 그의 위대함은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백담사는 만해 스님이 퇴를 작심할 때마다 선택한 곳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진정한 진을, 백담사에서 진정한 퇴를 이루고자 했다. 서울에서의 그의 행동은 정치가의 그것과 닮았으나, 백담사에서의 사색은 스님이자 시인의 그것과 같았다.

만해 스님은 1930년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산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다음은 그 마지막 부분이다.

그러면 나는 승려 30년에 무엇을 얻었나? 서울 안국동의 법당(法堂) 곁에 부처님을 모시고 일석(日夕) 생각함에 나는 결국 영생(永生) 하나를 얻은 것을 느낀다. 어느날 육체는 사라져 우주의 적멸(寂滅)과 함께 그 자취를 감추기라도 하리라. 그러나 나의 마음은 끝없이 둥글고 편한 것을 느낀다. 그렇더라도 남아일세(男兒一世)에서 나 중(僧)으로 그 생애를 마치고만 말 것인가. 우리 앞에는 정치적 무대는 없는가? 그것이 없기에 나는 중이 된 것이나 아닐까. 만일 우리도...... 마지막으로 이 심경을 누가 알아주랴. 오직 지자(知者)는 지부지자부지(知不知者不知)를 곡(哭)할 뿐이노라.

승려 생활 30년을 회고하는 글의 마지막치고는 의외다. 글을 찬찬히 따져보면 만해 스님은 애시당초 승려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승려가 된 것은 그(우리) 앞에 '정치적 무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살았던 격변기, 그리고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현실이 그를 승려가 되게 했다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는 구절이다. 그는 승려로 일생을 보낼 위인이 아니었다. '남아일세에 나 중으로 그 생애를 마치고만 말 것인가'라는 탄식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만일 우리도' 뒤에 따라오는 말줄임표 속에는 어떤 구절이 숨어 있는 것일까. 만약 그의 앞에 정치적 무대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면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궁금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만해 스님의 삶의 진퇴를 분명히 한 삶이었다. 그는 진퇴를 통해서, 진퇴의 육화를 통해서 삶을 앞으로 앞으로 끌고 나아갔다. 이에 비해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지식인들은 진퇴의 순간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거나, 진퇴의 순간 머뭇거리고 주저함으로써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할 곳이 있으되, 퇴할 곳은 갖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퇴는 곧 무덤이요, 패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해 스님은 생사를 뛰어넘듯, 진퇴를 자유자재로 했다.

만해 스님에게 퇴할 곳이 있었다는 것, 깊은 산속 외딴 곳에 백담사가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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