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시인과 노스님] 선상님 아들
[젊은시인과 노스님] 선상님 아들
  • 이홍섭
  • 승인 2006.08.02 18: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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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안은 '선생님 가족'이다. 그것도 보통 집안이 아니라, 몇 년 전 교육의 날에 전국에서 유일하게 '교육가족상'을 수상한 명문가이다. 아버지를 비롯, 직계 일곱 명이 선생님이니 청와대에서 밥을 대접할 만하지 않겠는가. 말이 없으신 아버지께서는 청와대에 다녀온 뒤에도 "밥이 맛있었다"는 말씀밖에 하지 않으셨다. 늘 그렇듯 그냥 묵묵히 식사만 하고 오신 게 분명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평교사로 명예퇴임하셨다. 퇴임하시던 해에도 교실에서 직접 아이들을 가르치셨다. 교사정년 문제로 사회가 떠들썩할 때에도 아버지는 단 한마디 말씀만 하신 뒤 명예퇴직을 신청하셨다. "내가 그만두면 젊은 선생 두 명이 들어올 수 있으니, 그만두는 게 옳지."

나는 지금 팔불출처럼 아버지 자랑이나 늘어놓으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는 사회적 잣대로 보면 시골 학교, 그것도 강원도의 깡촌만 전전한 무능교사였는지도 모른다. 당시만 해도 '인제 가면 언제 오나'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깊은 산골이었던 강원도 인제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해 동강 상류인 정선 귤암, 탄전지대였던 구절리, 눈만 왔다하면 전국에서 가장 먼저 고립되는 명주군 대기리 등 강원도 사람이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벽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아버지는 결국 7번국도변의 한 작은 학교에서 조촐한 퇴임식을 가졌다. 그렇지만 나를 제외한 형제들은 모두 선생님이 되었고, 또한 다들 선생님과 연을 맺었다. 그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상을 받고 청와대에 식사하러 가시던 날, 나는 마치 죄인이라도 된 심정이었다. 내가 선생님이 되었더라면 우리 가족은 역대 최다 선생님을 배출한 가족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죄인이 되었지만 나는 그날 정말로 기뻤다. '판사 가족', '의사 가족'이라는 말보다 '선생님 가족'이란 말이 훨씬 더 정감 있고, 아름답게 다가오지 않는가. 그날 하루만큼은 온전히 죄인이었던 나는 정말 열심히, 즐겁게 찍사 노릇을 감수했다.

나를 제외한 형제들은 일찍이 '미래의 페스탈로찌'들이었다. 전국에서 백만 명이 몰려든다는 강릉 단오제가 열리던 어느 해, 그 많은 사람들 틈에서 한 아이가 갑자기 배를 안고 쓰러졌다. 아무도 그 아이를 신경 쓰지 않을 때, 혼자 그 아이를 들쳐 업고 병원으로 달려간 젊은 이가 지금 고등학교 교사가 된 형이다. 아버지를 따라 벽지를 전전하며 오래된 친구 하나 사귈 수 없었으면서도 교사에의 꿈을 잃지 않은 여학생이 지금 초등학교 교사가 된 누님이다. 한 명이라도 더 서울대에 보내려는 학교의 꼬임을 용감하게 뿌리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겠다고 교대를 지원한 '촌스러운 학생'이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지금 교육대학 교수가 된 동생이다.

동생은 내가 군복무 중일 때 대학교에 입학을 했다. 제대하고 난 뒤 내가 "왜 그 높은 점수로 하필이면 교대를 지원했니?"라는 세속적인 질문을 했을 때 동생이 들려준 이야기는 나를 참으로 부끄럽게 만들었다. 고등학교 삼학년 어느 날, 동생은 하교를 하다 다른 학교에 다니던 깡패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들은 동생을 애워싸고 돈을 요구했다. 돈을 주지 않으면 두들계 맞을 분위기였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무리중에 초등학교 동창생이 끼어 있어 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동생은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고 한다. 도대체 무엇이 불과 몇 년 사이에 그 착했던 친구를 깡패로 만들었단 말인가. 그 질문의 끝에 동생은 자신의 진로를 '선생님'으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동생은 대학 시절과 초등학교 교사 시절 드러나지 않게 방황을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꿈과 현실 사이의 거리 때문에 겪는 방황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페스탈로찌에의 꿈'이 꺽이지 않길 바랐다. 동생은 결국 그 힘든 싸움을 이겨 내고, 자신의 꿈을 지켰다.

나는 지금도 강원도 곳곳에서 생겨나는 폐교 옆을 지날 때면 가슴이 미어진다. 생각해 보라. 그 학교들은 학생들에게도 꿈이 어린 곳이지만 선생님들에게도 인생의 한 시절이 담겨 있는 곳이다. 아버지께서 수상하시던 날, 나는 아버지가 젊은 교사 시절 겪은 에피소드 몇 가지를 들을 수 있었다. 모두 처음 듣는 얘기였다.

인제에 첫 발령을 받아 부임했을 때는 그 마을 서당의 훈장이 신식교육 참관차 수업에 들어온 적도 있고, 한 오지에 근무할 때는 워낙 인가가 드물어 사람들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필로폰 중독자가 되어 가는 것을 지켜 본 적도 있다고 하셨다. 나는 그때 비로소 아버지의 교사생활이 기나긴 외로움과의 동거였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인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그 혈기왕성한 젊은 나이에 심신산골의 첩첩산중에서 청춘을 보낸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 오지 학교에 다닐 때 코가 빨갰던 선생님들은 대부분 알콜중독자였던 것 같다. 차 한 대 다니지 않는 첩첩산중에 밤이 오면 젊은 선생님들이 무슨 할 일이 있었겠는가. 농사짓는 마을 사람들이야 농사철만 되면 밤낮없이 바빴을 테고, 젊은 선생님들은 술로 혈기를 다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선생님 자식이 아니었다 해도 나는 그 많았던 '빨간 코 선생님'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를 이해하듯이 말이다.

아버지는 비록 시골 학교 선생님으로 한 평생으로 보내셨지만, 나름대로 교육관을 실천하셨던 분이다. 우리 형제들은 초등학교 시절에 받은 상장이 없다. 다들 공부를 잘했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버지께서 남들 앞에서 자기 자식들에게는 상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제들이 받아야 될 상장은 다 다른 친구들에게 넘어갔다. 자기 자식을 드러내 놓고 아끼면, 다른 학생들은 자연히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학생이 몇 명 되지 않는 시골 학교에서는 더욱 그랬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 싸인펜으로 상장을 급조해 만들어 주실지언정 공개된 자리에서는 상장을 주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형제들이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때의 불알친구들이여. 내가 '선상님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장 아들보다 더 힘이 셌다고 말하지 마라. 내가 힘이 셌던 것은 그때 아버지께서 공부는 가르쳐 주시지 않고, 늘 건강이 최고라며 산과 들, 그리고 강에서 개구리, 메뚜기, 꺽지, 메기, 골뱅이, 더덕, 곰취, 머루, 다래, 누루대 등등을 잡고, 뜯어다 먹였기 때문이다. 이런 건 아마도 너희들이 더 많이 먹었겠지. 아버지는, 아니 그때 시골 선상님들은 다 좋은 분들이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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