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선지식] 정화의 기수 만암
[한국의 선지식] 정화의 기수 만암
  • 이기창
  • 승인 2006.08.22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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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입는 옷에는 주머니가 없어. 담아 갖고 가려고 해도 소용없는 짓이야.”

임종을 예감한 만암은 삶의 흔적들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그런 스승의 행동에 의아함을 보인 시자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승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입는 옷,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명예 감투 재물 사랑 미움…, 그 어떤 것도 넣어갈 데가 없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네 살림살이 아닌가.

만암종헌(曼庵宗憲ㆍ1876~1957)은 수행의 향기가 그윽한 선사였다. 그러한 중 냄새는 계(戒) 정(定) 혜(慧) 삼학을 두루 통달한 청정함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나무도 바탕에 따라 피어나는 꽃의 아름다움이 다르다. 수행자 역시 깨달음을 앞세우기 전에 인격에서 배어나오는 향기가 있어야 한다.

대강사로 이름을 날리던 만암은 재발심의 원력을 세우고 참선수행의 길로 접어든다. ‘이 뭐꼬’(이 것이 무엇인고)를 화두로 결택했다. 칠년의 세월이 흘렀다. 뇌성벽력이 치던 어느날 만암은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는다. 깨달음은 요구자체의 포기다.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까지 끊어졌을 때 비로소 깨달음은 나타난다. 그 경지가 본래면목이다. 원래의 자기로 돌아왔음을 뜻한다. 만암은 드디어 자신의 주인이 된 것이다. 설사 분별심을 낸다 해도 그 것은 분별을 여읜 무분별, 곧 절대진리의 경지다.

보배의 칼을 마음대로 쓰고(寶刀飜游戱ㆍ보도번유희)
밝은 거울은 앞뒤가 없노라(明鏡無前後ㆍ명경무전후)
두 가지 모두 한 바람(兩般一樣風ㆍ양반일양풍)
뿌리 없는 나무에 불어 넣는다(吹到無根樹ㆍ취도무근수)
내가 날 없는 칼로(吾將無刃劍ㆍ오장무인검)
노지의 흰소를 잡아(割來露地牛ㆍ할래노지우)
도소주와 함께 공양을 올리니(屠蘇兼供養ㆍ도소겸공양)
어느 곳에 은혜와 원수가 있을고(何處有恩讐ㆍ하처유은수)

만암의 깨달음의 노래다. 스승 취운(翠雲)은 누구보다 기뻐했다. 그리고 만암(曼庵)이란 법호를 전했다. 법명인 종헌 대신 만암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스승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선사 백파(白坡)의 우정에서 태어난 법호의 유래를 들려주었다. 200여년 전 추사가 백파에게 써 보낸 또 하나의 법호 석전(石顚)은 한영(漢永)에게 돌아갔다.

피안의 세계에 다달은 만암은 인재양성과 백양사 중창불사에 나선다. 또 자비의 법시(法施)도 아낌없이 베풀었다. 1910년 경술국치의 해에 만암은 백양사 청류암에 광성의숙(廣成義塾)을 열었다. 만암은 일제강점기 민족의 살 길을 교육에서 찾았다.

“양식을 나눠준 게 되받자고 한 노릇이 아니었는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고.” 인근 농민들이 햇보리를 타작, 정성껏 날라오자 만암은 마음을 이미 받았으니 곡식은 다시 들고 가라고 타이른다.

그들의 살림살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만암이었으니 당연했다. 농민들과 만암 사이에서 아름다운 실랑이가 벌어졌다. 농민들은 “부처님에게 바치는 시주”라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들에게 만암은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만암은 보릿고개에 신음하던 농민들을 위해 절 양식을 아껴 나눠주었고 부자들을 설득, 도와주도록 했다. 중생이 배고프면 출가자도 배고파야 하고 중생이 헐벗으면 출가자 역시 헐벗어야 하는 법, 그 것이 만암의 신념이었다. 소설가 윤청광(尹靑光)씨가 만암의 일대기에서 밝힌 일화다.

주직직을 물려받은 만암은 반선반농(半禪半農)의 새 기풍을 백양사 중창의 방편으로 삼았다. 이는 해이해진 가풍을 바로잡는 청규의 역할로도 작용했다. 당시 백양사는 극락전과 초가집 한 채에 불과할 정도로 퇴락해 있었다.

칡넝쿨과 싸리나무를 베어 소쿠리를 만들었다. 대나무로는 바구니를 빚었다. 그리고 신도들에게 나눠주었다. 그 유명한 백양산 약수리 곶감과 토종꿀까지 신도들에게 보냈다. 시주에 대한 보답이었다. 베품은 중창불사의 씨앗이 됐다. 백양사는 만암의 서원을 거름으로 삼아 웅장한 가람의 위용을 되찾는다.

“여기 종이 한 장이 있느니라. 비유하자면 종이는 인(因)이다. 인이란 종이는 향을 쌀 수도 있고 생선을 쌀 수도 있는 것. 종이가 향을 만나면 그 것이 연(緣)이 될 것이요, 생선을 만나도 또한 연이 되는 법이니라.” 설명을 일단 멈춘 만암은 한 학인에게 물었다.

“이 종이가 향을 만나면 무슨 냄새가 나겠는고.”
“향내가 날 것입니다.”
“생선을 만나면.”
“비린내가 날 것입니다.”
“같은 종이라도 좋은 연을 만나면 향내가 나고 나쁜 연을 만나면 비린내가 나는 법. 세상 이치가 다 이러하니 아무리 좋은 씨앗이라도 바위에 떨어지면 싹을 틔울 수가 없느니라.” 만암의 법문이다. 인이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라면 연은 인을 도와 결과를 낳게 하는 간접 원인이다.

만암은 불자뿐 아니라 절을 찾아오는 사람들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자비심을 갖고 대하라고 대중에게 일렀다. 만암의 법문은 낙초자비(落草慈悲)로 유명했다. 낙초자비란 수행의 근본이 약한 사람에 맞춰 베푸는 법문이다. 즉 풀밭에 비가 내리듯 알기 쉬운 법문을 말한다.

광복은 만암에게 새로운 시대적 소명을 부여한다. 교정에 취임한 만암은 우선 종명을 조선불교에서 불교조계종, 교헌을 종헌, 교정을 종정으로 환원시킨다. 그리고 일제잔재를 청산하는 불교정화운동에 불을 지핀다.

“우리 불교는 전통적으로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의 제도가 있어 이판은 교리연구와 수행에 힘써왔다. 사판은 가람수호에 전력을 다해 승단을 운영해왔다. 이와 같이 이판과 사판은 각각 자기 책임을 완수하여 삼보를 보존해야 한다.” 만암의 불교관과 정화방향을 암시하는 유시다.

이판은 수행승, 사판은 포교를 담당하는 교화승을 말한다. 이 제도는 한국불교의 본래 모습이었으나 조선왕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라졌다. 광복 당시 전국 사찰 승려의 90%가 결혼을 한 대처승이었다. 일본불교의 폐해였다.

만암은 비구와 대처승의 화합을 토대로 점진적인 정화를 시도했다. 만암의 혜안이 반영된 이 방법은 그러나 양측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급기야는 일부 강경 비구측이 종조를 바꾸는 환부역조(換父易祖)의 구실로 삼았다.

“저렇게 눈이 많이 내리니 올해 농사는 풍년이 들 거야.” 입적 당일 만암은 펄펄 내리는 함박눈을 보고 흐뭇해 했다. 나라 전체가 가난에 찌들었던 시절이었다. 고깃국에 쌀밥을 말아먹는 것이 대다수 백성의 소원이었다. 만암은 죽는 날까지 백성의 형편이 피기를 기원한 자비원력의 보살이었다.

● 만암 연보

1876 1. 17. 전남 고창출생, 속성은 여산 송(宋)씨
1886 백양사에서 출가, 법호 만암, 법명 종헌
1892 구암사 강원에서 한영을 사사
1929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
1948 조선불교 교정
1954 조계종 종정
1957. 1. 10. 세수 81, 법랍 71세로 앉아서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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