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가 2주가량 걸었을 길을 좇아”
“붓다가 2주가량 걸었을 길을 좇아”
  • 이병욱/정의평화불교연대 사무총장
  • 승인 2018.09.03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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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과 함께한 인도성지순례] (7) 보드가야 가는 길에

순례자들은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정각지 보드가야로 가기 위해 서둘러 사르나트를 출발했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반가량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빠알리 챈팅하고 명상하고 <초전법륜경>을 함께 독송했습니다.

성지에 와서 한번 둘러보고 나는 정도면 관광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지순례는 성지에서 숨결을 느껴 보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뛰어넘어 그 때 그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명상을 하고 경을 독송하고, 지수화풍 사대를 느껴 보는 이유일 것입니다.

사르나트에서 보드가야까지

사르나트에서 보드가야까지는 240여키로 미터 걸립니다. 버스로 6시간 거리라 합니다. 우리나라라면 3시간 밖에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이 배로 걸리는 것은 도로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속도로가 아닌 일반 국도 보다 못한 길로 울퉁불퉁하여 속도를 낼 수 없습니다. 버스가 덜컹거려서 승차감도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보드가야는 어디쯤 있을까요? 지도를 찾아보았습니다.

▲ 사르나트에서 보드가야까지.

지도를 보니 사르나트에서 보드가야까지는 249키로 미터로서 5시간 35분 걸리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 보아야 압니다. 어떤 변수가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드가야는 동쪽에 있습니다. 부처님은 보드가야에서 정각을 이루신 후에 바라나시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순례자들의 전세버스는 정반대로 보드가야를 행해 달려갑니다. 그렇다면 보드가야에서 바라나시까지 249킬로미터를 걸어서 가면 얼마나 걸릴까? 호진 스님은 인도에 있을 때 부처님이 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 걸었다고 합니다. 보드가야에서 바라나시 사르나트까지 걸어서 2주가량 걸렸다고 합니다.

▲ 보드가야 가는 길의 전세버스.

부처님이 2주가량 걸었던 길을 불과 대여섯 시간 만에 주파하는 세상입니다. 순례자들을 실은 전세버스는 울퉁불퉁한 길을 덜컹거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동으로 달렸습니다.

봄 날씨처럼 온통 초록의 대지에

바라나시 시내를 벗어나자 인도대륙의 끝없는 평원이 펼쳐집니다. 안개가 끼어서 지평선은 보이지 않습니다. 가도 가도 똑 같은 풍경의 연속입니다. 추수를 마친 들판은 마치 푸른 초원을 연상케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추수가 끝난 들녘은 황량하기 그지없지만 인도의 1월은 마치 우리나라 봄 날씨처럼 온통 초록의 대지입니다.

▲ 인도평원의 1월 들녘.

들판에 낫가리가 있습니다. 보리농사를 지은 것 같습니다. 보리를 탈곡하는 것 같습니다. 인도여인들의 복장이 이채롭습니다. 농사를 지음에도 치렁치렁한 컬러풀한 의상이 인상적입니다. 간편한 복장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을 텐데 마치 외출복을 입고 농사짓는 것 같아 보입니다.

▲ 인도평원에서 탈곡하는 농부들.

부처님도 이 길을 걸었을 것

인도의 농촌풍경은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그런 것 같습니다. 차창 밖으로 본 인도의 시골은 마치 전쟁으로 파괴 되고 폐허가 된 듯이 여전히 가난하고 빈곤하게 사는 모습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부처님도 이 길을 걸었을 것이라고. 부처님이 정각을 얻으시고 난 다음 바라나시를 향해 길을 갔습니다. 그때 만난 사람이 외도수행자 우빠까입니다.

▲ 인도농촌의 가게.

길을 가는 도중에

흔히 우빠까(Upaka)에 대하여 인연 없는 중생의 대명사라 부릅니다. 부처님이 이 길을 가는 도중에 우빠까를 만났는데 우빠까는 부처님 제자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우빠까는 길을 가는 부처님에게 “벗이여, 그대의 감관은 맑고 피부색은 청정하다. 벗이여, 그대는 누구를 의지하여 출가하였으며, 그대의 스승은 누구인가, 누구의 가르침을 즐겨 배우는가?”(M26)라고 물어 봅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모든 것에서
승리한 자, 일체를 아는 자.
모든 상태에 오염되는 것이 없으니
일체를 버리고 갈애를
부수어 해탈을 이루었네.
스스로 알았으니
누구를 스승이라 하겠는가.

나에게는 스승도 없고
그와 유사한 것도 없고
천상과 인간의 세계에서
나와 견줄만한 이 없네.

나는 참으로 세상에서
거룩한 임, 위없는 스승이고
유일한,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자로서 청량한 적멸을 얻었네.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하여 까씨 성으로 가네.
눈 먼 세계에서 불사의
감로의 북을 두드리리.” (M26, Vin.I.8)

이와 같이 부처님이 게송을 읊자 우빠까는 ‘벗이여, 무한승리자가 될 만하다고 자인하는가?’라며 묻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자신 있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십니다.

“번뇌가 부수어지면 그들도
나와 같은 승리자가 되리.
악한 것을 정복하여,
우빠까여, 나는 승리자가 되었네.” (M26, Vin.I.8)

이렇게 말씀 하셨음에도 외도 우빠까는 반신반의 했습니다. 시절인연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경에 따르면 우빠까는 “‘벗이여, 그럴지도 모르지.’라고 말하고 머리를 흔들며 샛길로 사라졌다.”라고 묘사 되어 있습니다.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거리며 ‘그럴지도 모르죠?’라 하며 싱겁게 사라진 것입니다.

우빠까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빠까는 어쩌면 부처님의 첫 번째 제자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준비 안 된 수행자였습니다. 우연하게 부처님을 만나기는 했지만 가르침을 받아들일 인연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인연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을 한번 뵈었다는 그 사실이 또 인연이 되어 필연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후에 우빠까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샛길로 빠진 우빠까는 사냥꾼 딸과 결혼했습니다. 결혼해서 아들을 하나 두었습니다. 그런데 우빠까의 아내 짜빠(Capa)는 “우빠까의 아들, 사명외도의 아들, 고기운반자의 아들, 울지 마라, 울지 마라.”라고 아들을 달래면서 우빠까를 비웃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우빠까는 아내와 아들을 버리고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이전에 길에서 한번 만났던 감관이 맑고 청정한 수행자를 떠 올렸습니다. 한번 만난 인연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더구나 ‘무한승리자’라 했는데 그 말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테라가타’에 실려 있는 우빠까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전에 지팡이를 손에 들었으나
나는 지금은 사냥꾼이다.
욕망 때문에 무서운 수렁에 빠져
나는 피안으로 갈 수 없다.”(Thig.291)
“내가 아주 반해 있다고 생각하며
‘짜빠’는 아들을 행복하게 키우고 있다.
‘짜빠’의 속박을 끊고
나는 다시 출가하고 싶다.” (Thig.292)

인연 없는 중생의 대명사라 불리우는 우빠까는 인연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처님과 우연히 길에서 만나 대화한 그 인연으로 부처님의 교단으로 출가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빠까를 놀려 대던 아내 짜빠도 부처님 교단으로 출가하였습니다.

우빠까는 아나함이 되었지만 짜빠는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짜빠장로니의 게송은 테리가타 20연 게송(Thig.291-311)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 시안에 우빠까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강을 하나 만났는데

길을 가는 도중에 강을 하나 만났습니다. 건기라서 그런지 강에 물이 거의 없습니다. 넓은 강바닥에 실개천처럼 물이 흘러갈 뿐입니다. 데칸고원쪽에서 발원한 갠지스 강 지류 중의 하나입니다. 지도검색을 해 보니 ‘손강(Sone River)’이라 되어 있습니다.

▲ 갠지스강의 지류 손강.

손강은 백과사전에 따르면 “인도 중부 마디아프라데시 주 빌라스푸르 행정구 북부에서 발원한다. 북쪽으로 흘러 만푸르를 지나고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레와 행정구를 가로지른다. 카이무르 산맥을 가로지른 후 파트나 시 위쪽에서 갠지스 강과 합류한다. 갠지스 강에 합류하기까지의 총길이는 784㎞이다.”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부처님도 분명히 이 강을 건넜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기경전에서도 나와 있을까?

<상윳따니까야> ‘합류된 물의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갠지스, 야무나, 아찌라바띠, 싸라부, 마히와 같은 큰 강이 합류하여 만나는 곳에서 어떤 사람이 두세 방울의 물을 떴다고 하자.”(S13.3)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언급된 강은 북인도 오대강을 말합니다. 그러나 손강은 초기경전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인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

보드가야로 이동하는 도중에 식사를 했습니다. 점심식사를 도로휴게소에서 했는데 현지인들이 한국식으로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여행사에서 고용한 인도인 요리사 두 명이 만든 것입니다. 쌀 등 식재료는 한국에서 가져왔습니다. 현지인들이 미리 밥과 국과 반찬을 만들어 승용차에 싣고 기다리는 식입니다.

▲ 휴게소에서 점심식사.

인도에서 한국식으로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인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도는 기반이 매우 열악하기 때문에 식당을 보기 힘듭니다. 또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여행사에서 지혜를 짜낸 것이 인도 현지인 요리사를 일시적으로 고용해서 식사서비스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21명의 순례팀에 한국여행사 사장 1명, 현지 가이드 1명, 현지 운전기사 1명, 운전기사 보조 1, 현지 요리사 2명이 추가 되었습니다. 전세버스와 승용차를 이용하여 총 27명이 움직이는 8박 9일의 순례단이 된 것입니다.

요리사들은 작은 승용차를 이용하여 미리 도착지점에서 대기합니다. 움직이다 보면 시간이 지연될 수 있고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호텔에 늦게 도착하면 저녁 먹기 힘듭니다. 이럴 경우 현지인 요리사를 이용하면 밤늦게라도 식사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인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휴게소에서 본 인도 소년들

휴게소에서 일단의 인도 소년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왜 도로휴게소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식사를 마친 일행들이 전세버스로 올라가 쉬려 하는데 그 앞에 죽 도열하듯이 앉아 있습니다. 처음에는 구걸하려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손을 벌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여행가다 도중에 식사를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 근처에 사는 아이들 같습니다.

▲ 이동 길에 만난 인도의 아이들.

아이들의 표정은 매우 밝습니다. 맨발인 아이들도 많습니다. 1월 2일 점심 무렵이라 날씨는 포근했습니다. 우리나라 봄 날씨 옷차림입니다. 돈을 달라는 것은 아니지만 돈을 요구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냥 지나친 것이 지금 생각하니 약간 후회가 되었습니다.

운전기사의 놀라운 운전신공

보드가야 가는 길에 일단의 한국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1월 5일부터 달라이라마 티칭(Teaching)이 있는데 참여한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달라이라마 방한추진위원도 있습니다. 명함을 보니 ‘아루나’님 입니다. 검색해 보니 본명은 이영자님으로 달라이라마와 20년 인연이라 하며 사진작가입니다. 20년 동안 달라이라마 사진을 찍었다고 합니다. 언젠가 다시 인연이 되면 구면이 될 것입니다.

1월 2일 오전 9시 반에 사르나트를 떠나서 오후 3시에 보드가야에 도착했습니다. 점심시간을 포함하여 5시간 30분가량 걸렸습니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음에도 30분가량 일찍 도착한 것은 현지인 운전기사의 놀라운 운전 실력에 따른 것입니다.

도로에는 신호등도 없고 교통경찰도 없기 때문에 클락션 소리 내는 것은 필수입니다. 빵빵거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법이 아닌 것입니다. 경적소리를 내는 것이 법이고, 경적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불법인 나라가 인도입니다. 경적소리를 냄으로 인하여 사고를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 인도인 운전사는 운전 내내 음조가 실린 경적을 끊임없이 울려 댔습니다. 그리고 중앙선 침범, 과속 등을 밥 먹듯이 합니다. 그래서일까 가이드는 반드시 안전띠를 꼭 매라고 당부합니다.

오토릭샤를 타고

보드가야에 도착해서는 일단 호텔로 갔습니다. 보드가야 대탑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는 마하보디(Mahabodhi) 호텔입니다. 이전에는 이런 호텔을 보기 드물었는데 마하보디대탑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더구나 달라이라마 티칭이 매년 있어서 순례자들이 크게 늘어나는 바람에 호텔 신축 붐이 일고 있다고 합니다.

호텔에 짐을 맡기고 오토릭샤(Auto rickshaw)를 탔습니다. 오토릭샤를 ‘툭툭’이라고도 합니다. 동남아에서 볼 수 있는 삼륜택시개념입니다. 원래는 마하보디 대탑 정문까지 버스로 이동해야 하나 1월 5일 달라이라마 티칭으로 인하여 전 세계에서 순례자들이 모여 드는 바람에 입구를 통제해서 오토릭샤를 타고 간 것입니다.

▲ 인도의 교통수단 오토릭샤.

오토릭샤에는 일곱 명 가량 탈 수 있습니다. 작은 삼륜차에 짐짝처럼 끼여 타는 식입니다. 울퉁불퉁한 길을 달릴 때 마다 머리가 천정에 부딪칠 정도입니다. 거리는 검붉은 가사를 입은 수많은 티베트승려들 천지입니다. 어디를 가나 붉은 가사를 볼 수 있습니다.

성지중의 성지 마하보디사원

오토릭샤타고 가는 3키로 미터의 거리는 흙먼지 풀풀 날리는 거리입니다. 도로는 울퉁불퉁하고 주변은 난개발 되어 있습니다. 버스로 이동할 때 보았던 농촌풍경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짓다만 건물이 있고, 부서지고 파손된 건물이 그대로 방치 되어 있습니다.

마하보디대탑 가는 길에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저녁 6시 가까이 되었음에도 들어가는 사람들과 나오는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합니다. 마하보디 대탑이 불교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려 주는 것 같습니다. 이슬람사람들은 메카를 순례하고, 크리스천들은 예루살렘을 순례한다고 합니다. 불교도들에게도 성지가 있어서 사대성지를 말하지만, 성지중의 성지는 단연 마하보디사원일 것입니다.

이슬람에 메카가 있다면 불교에는 마하보디대탑이 있습니다. 불교인들의 마음의 고향이자 불교인들의 자부심은 마하보디대탑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전 세계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순례를 옵니다.

1월 2일 저녁 여섯 시 해질 무렵 마하보디 대탑 입구에 다다랐습니다. 입구에는 검색대가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분리된 검색대입니다. 이렇게 엄격하게 검색하는 것은 이전에 폭탄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의 소행이라 합니다. 이후로 검문이 강화 되어서 거의 맨몸으로 들어가다시피 해야 합니다.

▲ 마하보디 사원 입구.

마하보디사원에서는 스마트폰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디지털 카메라는 허용되는데 사용료를 지불해야 합니다. 디카는 늘 지참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행사 사장의 도움을 받아 가지고 입장하게 되었습니다. 세 개의 커다란 문을 통과하여 마침내 마하보디 대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제보 mytrea7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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