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시인과 노스님] 오솔길, 마음길
[젊은시인과 노스님] 오솔길, 마음길
  • 이홍섭
  • 승인 2006.11.06 10: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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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이 아름다운 것은 그 길이 우리의 마음길을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솔길은 혼자 걸어가거나, 마음이 맞는 사람 한 둘과 동반해 걸을 때 가장 오솔길다워진다. 만약 그 길을 한 떼의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거나, 쓸데없는 짐을 잔뜩 지고 간다면 이미 그 길은 오솔길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오솔길을 꿈꾼다. 혼자 있고 싶어지거나, 마음이 통하는 연인이라도 만나게 되면 언제든지 오솔길을 걸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오솔길은 일상생활 속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우리 내면의 마음길이자, 비움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솔길은 대부분 깊은 산사를 향해 나 있다.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이며, 물소리 맑은 내설악 백담사 길이며, 서산 개심사를 오르는 돌계단 길이 그러하다. 산사를 향해 난 이런 오솔길을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새 어깨를 짓누르던 마음의 짐들은 사라지고, 그토록 무겁던 발걸음은 가벼워진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보았겠지만, 이러한 오솔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뭐니뭐니해도 단촐한 바랑을 어깨나 등에 메고, 저 멀리 굽이를 돌아가는 운수납자들이다. 그들이 입고 있는 회색빛 승복은 군더더기 없는 오솔길과 닮아 있고, 어디에도 매일 것 같지 않은 그들의 발걸음은 마치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오솔길 위를 걸어갈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오솔길을 걸으며 우리는 종파를 따지지는 않는다. 설령 그 길이 나와는 다른 종교의 성지를 향하는 길이라 할지라도, 그 이유 때문에 오솔길을 걷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솔길에서는 종파를 떠나 절제와 검소함이 몸에 배인 모든 수행자들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산사에서는 오래전부터 수행자들이 지녀야 될 검박한 생활과 마음가짐을 두고 다음과 같은 교훈적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옛날 공부가 깊은 스님 한 분이 있었다. 먼 곳에서 이 스님을 만나기 위해 젊은 스님 두 분이 오솔길을 오르고 있었다. 길을 오르다 지친 두 사람이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잠시 쉬고 있던 차에 계곡 위쪽에서 시래기 하나가 떠내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젊은 스님들은 그것을 보고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절의 살림살이가 헤픈 만큼 분명 스님의 수행이 깊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막 일어서려는데 어떤 노스님 한 분이 헐레벌떡 내려오시더니 떠내려가는 시래기 한 잎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젊은 스님들이 저만치 떠내려 가는 시래기를 가리키자, 노스님은 두 손으로 그 시래기를 건져내며 "나이가 드니, 이제 시래기 다듬는 일도 시원찮구먼. 이 시래기를 쫓아 십 리를 뛰어왔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젊은 스님들은 노스님을 모시고, 산사로 향하는 오솔길로 다시 접어들었다고 한다.

한때 나도 오솔길을 매일 걸었던 적이 있다. 어느 날 문득 모 지방일간지의 정치부 기자직을 그만둔 나는 한 노스님의 부름을 받고 내설악 깊은 산사를 찾아가게 되었다. 산사를 찾아가는 길은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오솔길이었다. 나뭇잎들이 가을 햇살을 받아 어쩔 줄 몰라하는 오솔길을 혼자 걸으며, 이 길을 매일 걸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노스님은 산사의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소책자를 정기적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나는 오솔길을 매일 걸을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솔길을 걸을 때 내 마음속에서 가장 먼저 빠져나간 것은 마음 여기저기에 쌓여 있던 이름 붙일 수 없는 독기들이었다. 그 독기는 주로 나 아닌 타인을 향해 날을 세우고 있었다. 같은 곳을 출입하는 경쟁사 기자, 고분고분하지 않던 출입처 공무원들, 서로 속고 속이면서도 매일 얼굴을 마주하던 정치인들이 그들이었다. 그 독기가 빠져나간 자리에 대신 미안함과 연민이 자리를 잡았다. 맘먹고 펜 끝을 겨누었던 도청 공무원과 자주 물먹였던 경쟁사의 선배 기자, 그리고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였던 그 초선의원은 잘 있는지 궁금하고, 괜스레 그들에게 미안해졌다.

오솔길을 걸으며 또한 느낀 것은 혼자 있는 즐거움이 크다는 것이다. 그 혼자 있는 즐거움은 풀과 나무, 그리고 별들을 가까이 있게 했다. 아침에 일어나 오솔길을 걸으면 풀들이 보송보송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위를 걸어가는 것은 마치 여인의 솜털을 밟고 가는 듯한 느낌이었으나 성욕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밤이 되면 포도송이 같은 별들이 머리 바로 위에서 주렁주렁 열렸다. 손을 들면 싱싱한 별들을 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혼자 있는 시간은 그만큼 풍족을 가져왔다.

혼자 있다는 것이 꼭 외로운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오솔길 위에서 깨달았다. 오히려 그동안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적었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너무 많이 가지려고 했던 것이 혼자인 시간을 다 빼앗아 갔다는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도시에서의 삶은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게 한다. 늘 바삐 지나가는 무엇인가가 있고, 늘 누군가가 옆에 있어야만 유지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돈과 명예는 그것을 보다 다채롭고, 화려하게 치장해 준다, 그래서 이것들이 없으면 불안해지고.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몸을 떨게 만든다.

하지만 오솔길은 그 많은 욕심과 열망들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오솔기을 걷다 방안에 들어오면 뎅그라니 놓여 있는 책상 하나와 책 몇 권이 그렇게 다정스러울 수가 없었다. 만약 그 방안에 도시에서의 방처럼 화려한 책상과 빙 둘러싼 책장이 꽉 들어차 있었다는 나는 금세 오솔길로 다시 돌아갔을 것이다. 무언가를 가득다득 쌓아 놓는 것은 오솔길과 맞지 않는다.

첫눈 오는 날, 수덕사를 찾았을 때이다. 새벽에 일어나 수덕사 뒤편 산길을 오르자 오솔길이 산 정상까지 이어졌다. 그 길은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비구니 선원이 개설된 견성암을 지나 만공 스님이 수많은 운수납자를 길러 낸 정혜사의 능인선원, 그리고 만공 스님이 말년에 주석한 소림초당으로 이어졌다. 그 오솔길에는 어느 누구의 발자국도 찍혀 있지 않았다. 나는 마치 처음 보는 여인을 만나러 가는 듯한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그 길 위에 내 발을 한 발 한 발 올려놓았다.

정혜사 근처에 이르자 여러 명의 스님들이 눈을 쓸며 내려오고 있었다. 스님들도 첫눈 앞에서 마냥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스님들은 산 아래 수덕사 입구가지 눈을 쓸 요량인 듯했다. 열심히 눈을 쓸고 있는 스님들을 조심스럽게 지나 조금 더 올라가자, 무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분의 스님이 각자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안부를 묻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먼 곳의 사찰에서 이곳까지 와 한 철을 보내려고 하는 스님들인 것 같았다. 이해는 갔으나, 오솔길과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내 마음에도 알 수 없는 조바심이 일어났다. 연락해야 될 사람, 두고 온 일, 앞으로의 일정이 한꺼번에 되살아나 마치 거미줄처럼 휘감겨 왔다. 씁쓸한 일이었다.

소림초당을 지나오던 길과는 다른 오솔길을 내려가고 있을 때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스님 한 분이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비구니 스님이었다. 스님은 막대기 하나를 짚고 돌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돌계단 위에는 작은 발자국이 하나씩 얹혀 있었다.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가자 비로소 거미줄들이 조금씩 걷혔다.

오솔길이 아름다운 것은 그 길이 우리의 마음길을 닮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원래 마음길은 오솔길처럼 소박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 길은 포장되지도, 화려하게 치장되지도 않은 길이었다. 그 길은 쓸데없는 욕심을 비워 내고, 자신의 마음길을 찾으려 노력하는 자들의 길이다. 삶이 피곤할 때 가만히 눈을 감으면 포장된 큰길보다, 흙냄새나는 작은 길이 떠오른다. 그 길이 오솔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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