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시인과 노스님] 운수가 되어 버린 젊은 스님의 선방수행기
[젊은시인과 노스님] 운수가 되어 버린 젊은 스님의 선방수행기
  • 이홍섭
  • 승인 2006.11.27 13: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다. 그곳에 잠자리를 마련해 준 노스님은 "머리 긴 놈으로는 너가 처음이다. 한 번 자 봐라, 이눔아"라고 하신 뒤 사라지셨다.

밖은 캄캄했고, 방 안으로 들어온 계곡의 물소리만 철철 넘쳤다. 나는 그 컴컴한 방 안에서 뜬 눈으로 하룻밤을 지샜다. '오만 가지 생각'이라는 말을 그때 실감했다. 내가 오만 가지 생각 위에 둥둥 떠 다닐 때 뒤켠 선방에서는 제방의 사찰에서 찾아온 일곱 명의 수좌들이 단 하나의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나보다 어린 나이의 수좌도 둘이나 있었다. 이들은 이 깊은 산중에서 무엇을 구하려 하는 것일까.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새벽이 되자 혹 꼬리 끌리는 소리나 나지 않을까 조심하며 그 자리를 떴다.

지허 스님이 쓴 <<선방일기>>(여시아문)는 제목 그대로 내가 하룻밤을 묵었던 그 방 뒤켠에서 화두를 들고 있던 스님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떤 고민에 빠져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루를 보내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책이다.

'나는 오대산의 품에 안겨 상원사 선방을 향해 걸어나갔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일기는 지허 스님이 1970년대 초반, 강원대 오대산 상원사 선방에서 동안거를 보내며 겪은 체험들과 선방 주변의 일상들을 간결하고 소박한 문체로 담고 있다. 김장을 담그고, 장작을 패며 동안거 한 철을 보낼 준비를 하는 것부터 시작해 동안거를 무사히 마치고 함께 정진한 스님과 "성불하십시오"를 주고받으며 헤어지는 마지막 장면까지가 마치 흑백 단편영화처럼 담겨 있다. 특히 가난했던 시절, 검소하고 절제 있게 살았던 스님들의 일상사화 절의 살림살이가 재미있고, 살뜰하게 그려져 있어 너무 많이 지니고 허덕거리는 나 같은 잡종에게는 교훈이 된다.

지허 스님의 계산에 따르면 1970년대 당시 선객들이 일 년에 소비하는 물적 소요량은 2만원어치가 채 되지 않는다. 계산법이 재미있다. 주식비를 빼면 승복에 사용되는 광목 20마, 내복 한 벌, 고무신 두 족이 전부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 '선객은 모름지기 삼부족三不足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삼부족은 식부족, 의부족, 수부족을 일컫는 것으로 이는 당대 선객들이 고전적 선풍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자신과 싸워 나가고 있었던가를 잘 보여 준다.

용맹정진의 고비를 묘사하는 장면도 절절하다.

정신이 몽롱해진다. 큰 대자로 누우면 이 고통에서 해방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만사휴의(万事休矣)다. 고행의 극한 상황들을 연상해 본다. 설산에서 6년간. 눈이 떠지고 허리가 펴진다. 그러나 얼마가 지나면 다시 눈이 감겨지고 허리가 굽어진다. 그러다가 비몽사몽간에 뒷방에서 잠자는 스님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이 번쩍 뜨인다. 수마도 고통도 물러갔다. 화두가 앞장 서며 빨리 가잔다. 길은 멀고 험하지만 쉬지 않고 가면 된다면서.

수마를 쫓기 위해 '골고다의 십가자'도 떠올리는 수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이 책은 이런 용맹정진의 모습을 뼈대로 하고, 선방 주변의 이야기들을 살로 덧붙여 깨달음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한 젊은 스님의 고행을 보여 준다.

발행인이 쓴 서문에 따르면 지은이 지허 스님은 지금 그 행적을 찾을 수 없다 한다, 1973년 <<신동아>> 논픽션 공모에 이 글이 당선된 이후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한다. 아마도 온몸으로 운수雲水가 된 모양이다. 그 또한 이 책에서 스님이 보여 준 문체처럼 검박하기 이를 데 없다. 나처럼 꼬리가 긴 잡종은 따라갈 수 없는 길이다. 그 길이 부러워 나는 종종 이 책을 꺼내 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02호
  • 대표전화 : 02-734-7336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법인명 : 뉴스렙
  • 제호 : 뉴스렙
  • 등록번호 : 서울 아 0043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7-09-17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뉴스렙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렙. All rights reserved. mail to cetana@gmail.com
  • 뉴스렙「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조현성 02-734-7336 cetana@gmail.com
인터넷신문위원회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