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에서 본 般若心經-大顚和尙注心經-
禪에서 본 般若心經-大顚和尙注心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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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11.19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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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요통 지음, 현봉 스님 역주

대전 요통(大顚 了通) 지음
현봉(玄鋒) 역주
2008년 10월 7일 발행 / 값 13,500원
불광출판사 tel. 02-420-3300

이 책 대전 선사의 『반야심경』 주해는 구절구절이 모두 금옥(金玉)과 같아서 후학들에게 바른 길을 직접 가리킨 것이니, 어리석어 바른 길을 잃은 자에게는 표장(標章)이 되고, 비록 도행(道行)이 있더라도 마음속에 삿된 소견이 들어있는 자에게는 영약(靈藥)이 되며, 어둠속에 길 잃은 자에게는 밝은 등불이 되고, 문 밖에서 헤매는 사람에게는 표본이 되는 주석이며, 바른 눈을 얻지 못한 자에게는 표준이 되는 안목이다. - 전 조계총림 방장 구산(九山) 스님의 중간서(重刊序) 중에서

!!! 반야심경(般若心經)을 통한 선(禪) 입문(入門) !!!
선사의 체험으로 새롭게 열어 보인 반야의 세계, 그 깨달음의 안목이 돋보인다

반야심경은 260자로 이루어진 짧은 경전인데, 600부 반야경전의 정수일 뿐만 아니라 팔만대장경의 핵심을 응축시켜 놓아 전 세계의 불자들이 가장 많이 수지 독송하는 경전이다. 불교의 모든 법회나 의식에서 거의 빠짐없이 독송하고,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반야심경 한 두 구절은 읊조릴 정도로 대중적인 경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반야심경의 주해서도 수십 종에 달한다.

송나라 때 대전 요통 화상이 주해한 이 책이 수십 종의 반야심경 주해서 중에서도 백미로 손꼽히는 것은 사전적이거나 교학적인 주해서가 아니라 선사(禪師)가 직접 체험한 반야(般若)를 구절구절마다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오랫동안 참선 수행에 정진하여 안목이 열린 선사인 현봉 스님은 이 주해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글자 하나까지 의미를 되새겨 그 뜻이 드러나도록 탁월한 번역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종 경전과 선사들의 게송을 비롯하여 유가(儒家)와 노(老)․장(莊)을 두루 섭렵하는 주해의 구절마다 그 원문을 찾아서 우리말로 옮기고 자세한 설명을 더해 말미에 주석을 달았다. 스님이 일일이 찾아서 풀이한 상세한 주석을 읽는 것으로도 불교 공부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비로소 교(敎)와 선(禪)이 둘이 아니라는 말을 체득하고, 교학에 머물던 이가 마음 법을 깨달아 선수행자로 환골탈태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파초껍질을 벗기듯이 한 꺼풀 벗겨내고 또 한 꺼풀 벗겨내어 곧바로 모든 것을 다 벗겨버려 더 손댈 곳이 없게 되면 본래의 근원으로 되돌아 간 것이니 오온이 공하여져 부모에게서 생겨나기 전과 같으리라.

모든 것을 다 태워 없애버리면 공하여도 공하지 않은 곳에 이르게 되고, 이 몸을 벗어나 모든 것을 잊고서 자취마저 사라지고 나면 온몸이 그대로 손이며 눈이니, 거기에는 가는 먼지 하나라도 묻힐 수가 없으며 이름조차 붙일 수가 없게 되어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과 육도(六度)의 온갖 만행(萬行)과 두타(頭陀)의 모든 고행을 한꺼번에 벗어나 마치 마른 나무등걸 같고 식어버린 재와 같게 되니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百不會底人)’이라 하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이 책을 옮기고 주석을 더한 현봉 스님이 거처하는 광원암(廣遠庵)은 진각국사 혜심 선사가 『선문염송(禪門拈頌)』을 결집하여 유포한 곳으로 송광사보다 250년이나 먼저 창건된 곳으로 한국 간화선의 보금자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유서 깊은 곳에서 묵묵히 노동과 수행을 일상으로 삼고 있는 현봉 스님은 대전 요통 화상의 주심경을 처음 번역하고 주석을 단 것은 20여 년 전의 일이었다. 그후 이 주해서의 깊은 통찰에 감동한 독자들의 꾸준한 요청에 의해서 인쇄하기를 거듭해왔지만, 이번에 번역을 다시 다듬고 주석을 세밀하게 검토, 수정하여 개정판을 처음 발행했다. 오늘날 밖을 찾아 헤매는 현대인들이 자신의 내면을 향해 돌림으로써 자신의 참모습을 찾고, 우리 삶이 본래 아무 것도 없는 그 가운데서도 모든 것이 넉넉하게 갖추어져 있음을 일깨워 주는 선서(禪書)가 될 것이다.

지은이 : 대전·요통(大顚·了通) 화상
대전·요통(大顚·了通)화상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찾기 어렵다.
12세기 경 중국 송나라 때의 조동종 계통인 보봉·유조(寶峰·惟照)선사의 법을 이은 제자 가운데 가흥부(嘉興府) 보은(報恩)의 대전·통(大顚·通)선사(禪師)가 있으니 그분이 아닌가 추측 된다. 주해 속에 인용된 말 가운데 가장 늦은 것이 보봉유조(1084~1128) 선사의 게송(偈頌)이며, 조선에서도 태종(太宗) 때인 영락(永樂) 신묘년(辛卯年, 1411년)에 중간(重刊)하게 되었다 하니, 이 주해서는 1150년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전선사는 반야심경을 주해하면서 여러 경전과 인도 중국의 여러 선사들의 말씀을 두루 인용하고 노·장(老·莊)과 논어(論語)의 글을 뽑아 쓰는 것을 보면 선사이면서도 교학(敎學)과 도가(道家)나 유가(儒家)의 학문에도 두루 통한 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옮긴이 : 현봉(玄鋒) 스님
현봉(玄鋒) 스님은 1974년 승보종찰 송광사(松廣寺)에서 구산(九山)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75년 송광사에서 구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였으며, 송광사, 봉암사, 해인사, 백련사, 수덕사, 극락암, 월명암, 수도암, 칠불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행하였다. 조계종 제11, 12대 중앙종회의원과 법규위원, 정광학원 이사 및 재심호계위원 등의 이름을 띠기도 하였고, 조계총림 유나와 송광사 주지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송광사 광원암(廣遠庵)에서 농사일을 하며 지내고 있다.

옮긴이의 말

몇 년 전 봄에 장흥(長興)의 탐진강(耽津江)가에 있는 용호정(龍湖亭)에서 팔순이 넘은 어느 노유(老儒)를 만나, 처음으로 이 『대전화상주심경(大顚和尙注心經)』을 얻어 보게 되었다.

그 분이 말하기를 “6․25전란이 끝난 이듬해 어느 행상이 찾아와서 몇 권의 묵은 책을 내놓으며 ‘전화(戰禍)로 폐허가 되어버린 보림사(寶林寺)의 부서진 불상에서 나온 책인데 사랑방의 벽지(壁紙)나 될까 하여 팔러 다닌다.’고 하기에 아까운 생각이 들어 쌀 한 되를 주고 이 책을 구해 두었던 것이라.” 했다. 그러나 불가(佛家)의 글이라서 좀체 이해가 되지 않아 그냥 책 궤짝 속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한번 읽어보라고 하면서 나에게 건네어 주었다. 오랜 연륜 탓인지 서슬이 닳아지고 몇 자는 좀이 슬긴 했으나 거의 완전하였으며 내용을 읽어보니 참으로 얻기 어려운 보배를 만난 듯하였다.

그 책의 발문(跋文)을 보니 영락(永樂) 신묘년(辛卯年: 1411년 조선 태종 11년) 고창현(高敞縣: 오늘날의 전북 고창군) 문수사(文殊寺)에서 공선(空禪)이라는 스님과 몇몇 동참인(同參人)들이 발원(發願)하여, 『화엄경』의 「보현행원품」과 야보(冶父) 도천(道川) 선사의 『금강경』 주해와 대전(大顚) 선사의 『반야심경』 주해를 중간한다고 하였다.

그 해(壬戌) 겨울에 당시 송광사 조계총림(曹溪叢林) 방장(方丈)이시던 구산(九山) 큰스님께 이를 뵈어 드렸더니 “참으로 희유(稀有)한 주해서(注解書)다.” 하시면서 “이를 영인(影印)하여 널리 법공양(法供養)하도록 하라.” 하시기에 큰스님께 중간서(重刊序)를 청하여 이듬해(癸亥) 정초(正初)에 이를 영인하여 제방(諸方)에 유포하였다.

이 책의 저자(著者)인 대전(大顚) 요통(了通) 선사에 대한 정확한 문헌은 역자(譯者)의 과문(寡聞)한 탓인지 아직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추측컨대 중국 송(宋)나라 때의 조동종(曹洞宗) 계통인 보봉(寶峰) 유조(惟照) 선사의 법을 이은 선사 가운데 가흥부(嘉興府) 보은(報恩)의 대전(大顚) 통(通) 선사가 있으니 그 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분의 법계(法系)는 다음과 같다.

…동산(洞山) 양개(良介) → 운거(雲居) 도응(道膺) → 동안(同安) 도비(道丕) → 동안(同安) 근지(勤志) → 양산(梁山) 연관(緣觀) → 대양(大陽) 경현(警玄) → 투자(投子) 의청(義靑) → 부용(芙蓉) 도계(道楷) → 단하(丹霞) 자순(子淳)(?~1119) → 천동(天童) 정각(正覺)(1091~1157)
→ 보봉(寶峰) 유조(惟照)(1084~1128) → 대전(大顚) 요통(了通)

『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 등에 행적(行蹟)이나 기연어구(機緣語句)가 없이 이름만 실려 있을 뿐이나, 인명(人名)이 동일하고 주해의 내용이 선가(禪家)적인 해석이며, 선종 가운데에서도 여러 선사들의 말씀을 두루 인용하긴 하였으나 조동종 계통 선사의 말씀이 비교적 많은 편이며, 인용된 어구(語句) 가운데 가장 연대가 늦은 것이 단하(丹霞) 자순(子淳) 선사(?~1119)의 게송과 보봉(寶峰) 유조(惟照) 선사(1084~1128)의 게송 구절이며, 영락(永樂) 신묘년(辛卯年: 1411년)에 조선에서 이미 중간(重刊)된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하여 준다. 그러니 이 『반야심경』의 주해서는 1150년경에 저술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전 선사는 송(宋)대의 선사들이 거의 그러하듯 화엄(華嚴)의 원융사상(圓融思想)에도 많은 영향을 받은 듯하며, 이 주해서 가운데 화엄(華嚴)․법화(法華)․열반(涅槃)․유마(維摩)․능엄(楞嚴)․반야(般若) 등의 경전과 서천(西天)이나 중국의 여러 선사들의 말씀을 두루 인용한 것을 보면 선사이면서도 교학(敎學)에 널리 통달하였던 분임을 알 수 있고 나아가 노․장(老․莊)의 글을 이끌어 쓰고 논어(論語)의 말을 뽑아 쓰는 것을 보면 도(道)와 유(儒)의 학문도 두루 섭렵(涉獵)하였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반야심경』은 너무나 잘 알려진 경이다. 그 문장이 간결하고도 오묘하여 팔만장경(八萬藏經)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만큼 그 해석도 사가(師家)의 견해에 따라 제각기 다른 맛을 내게 마련이다.

이 주해서는 경의 제목 10자(字)와 본문 260자(字)를 모두 63절(節)로 나누어 주해하였다. 그러나 술어를 풀이하여 전문(全文)과 연결시키면서 구조적(構造的)으로 이해시키려는 사전적(辭典的)이고 교학적(敎學的)인 주해가 아니라 선사(禪師) 스스로 체험한 반야를 『반야심경』의 구절마다 그대로 전부 드러내 보이는 직설적(直說的)이고 선적(禪的)인 주해라는 점이 특이하다.

이 주해서를 중간(重刊)하던 해(1411년)는 조선이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다. 그 때에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일체중생이 다 같이 교화(敎化)에 젖기를 발원하여 『화엄경』의 정수인 「보현행원품」과 『금강경』 주해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야보(冶父) 도천(道川) 선사의 주해와 함께 대전(大顚) 화상의 『반야심경』 주해를 중간한다고 하였다. 당시에 이미 수십 종의 『반야심경』 주해서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대전 화상의 주해를 간행한 것은 이 주해가 백미(白眉)로 평가받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의 문명사회는 끝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갈수록 그 양상이 다원화되고 변화는 가속화되어 간다. 이리하여 우리는 잠재된 무한한 가능성을 개발하며 온갖 편리와 풍요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밖을 향해 다른 것을 추구할수록 자신의 내면을 향해 정관(靜觀)하는 성찰(省察)이 필요하고, 변화가 심할수록 불변하는 고정적(固定的)인 힘이 강해져야 하며, 양상이 새로워지고 다원화될수록 근원적이고도 통일적인 본래의 참모습(實相)을 뚜렷이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통일적이고 고정적인 구심점이 약한 채로 질량과 속도가 늘어나면 역학적인 관계에서도 불균형이 심해지기 마련이다.

우리가 물질문명의 풍요 안에서도 빈곤함을 느끼고 갖가지 사상의 범람 속에서도 갈증이 멎지 않으며 급변하는 가운데서도 지루함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눈을 바깥으로 향해 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주심경(注心經)』은 800여 년 전에 저술된 『반야심경』의 주해서이지만, 오늘날 밖을 향해 분주히 헤매는 우리들의 눈을 자신의 내면을 향해 주시하도록 하여 우리들의 삶이 본래 아무것도 없는 그 가운데서 모든 것이 넉넉하게 됨을 일깨워주는 금언집(金言集)이 될 것이다.

이 『주심경(注心經)』을 옮기어 남에게 보인다는 것이 비탈 밭이나 가꾸면서 살아가는 산골의 납자(衲子)에게는 분외(分外)의 일인 줄 알지만 이 책을 만났던 희유한 인연을 생각하고, 주해의 끝부분에 ‘이 주해서를 만나보고 기뻐하는 사람은 이를 간행하여 널리 베풀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도록 하라.’ 하신 뜻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이를 다시 정리해 본 것이다. 옮긴이의 좁고 얕은 소견으로 대전 선사의 본뜻을 그르치지 않았는지 크게 저어할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고창 문수사에서 중간할 때의 발문(跋文)을 함께 옮겨 실은 것은 그것이 바로 이 책을 만나는 우리들 모두의 염원이기도 한 때문이다.   2008년 가을 옮긴이

대전선사주심경중간서

반야심경이란 것은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기 전에 온 법계(法界)에 충만한 진리며 모든 부처님이 나오시기 전에 이미 일체 중생들에게 갖추어져 있는 본래의 성품이다.

이 마음을 깨달으면 바로 부처요 이 마음을 미혹하면 그대로 중생이다. 미혹하고 깨달음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이 마음인 것은 다름이 없으니 마음이 바로 부처며 부처가 곧 마음이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되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고 하시고, 또 이르시되 ‘중생들이 중생이라 할 뿐이요 부처는 중생을 말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이 근래에 본분(本分)을 참구하는 납자(衲子)들이 일승(一乘)을 통달하지 못하고 방편에만 떨어져서 갖가지 구업(口業)으로 옛 스님들을 헐뜯기 일쑤이니 그것을 딱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많은 수행자들이 법복을 입고서도 깨달음을 등지고 세속에 영합하여 한갓 이양(利養)에만 뜻을 두어 인과를 무시하고 종횡으로 법도가 없으며, 동서양의 구도자들이 간절한 마음이 충만하여 바른 길을 가고자 하지만 그 옳고 그름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여 그 진수를 잃고 현묘한 말씀을 듣지 못하여 허다히 방황하니, 도(道)를 구하려던 간절한 본래의 뜻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이 심경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오시교(五時敎) 가운데 한결같이 말씀하신 반야(般若)이니 육백 부(六百 部)나 되는 반야경전 가운데 가장 간결하고도 가장 정요(精要)한 것이며, 팔만대장경도 알고 보면 이 마음(心) 한 글자를 이리저리 말씀하신 보장(寶藏)일 뿐이다.

대전 선사의 『반야심경』 주해는 구절구절이 모두 금옥(金玉)과 같아서 후학들에게 바른 길을 직접 가리킨 것이니, 어리석어 바른 길을 잃은 자에게는 표장(標章)이 되고, 비록 도행(道行)이 있더라도 마음 속에 삿된 소견이 들어있는 자에게는 영약(靈藥)이 되며, 어둠속에 길 잃은 자에게는 밝은 등불이 되고, 문 밖에서 헤매는 사람에게는 표본이 되는 주석이며, 바른 눈을 얻지 못한 자에게는 표준이 되는 안목이다.
바라노니 모든 대덕(大德)들이여!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길을 잘못 들지 말고 지극히 깊고 깊은 미묘한 법을 간절한 마음으로 몸소 통달하여 부처와 조사를 뛰어 넘을지어다. 그러면 얻어도 얻은 바가 없고 깨달아도 깨달은 바가 없게 되어 부처와 중생이 평등하여 둘이 아니며 생사와 열반이 언제나 맑은 물처럼 고요하여 이 사바세계가 그대로 극락세계인 것이다.

바다를 건널 때는 배를 타지만 뭍에 오르고 나면 배를 버리게 된다.
범부를 돌이켜서 성인을 이루어 중생들을 널리 이롭게 하면 위로는 은혜라 할 수 없는 은혜를 갚고 아래로는 중생이라 할 수 없는 중생들을 제도하며 마음대로 소요하면서 인연 따라 오고 감에 자재로울 것이니, 참으로 이것이 격식을 뛰어넘은 대장부의 일이 아니겠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조계의 한 길에는 문이 활짝 열렸으니
부처와 중생들이 마음대로 오고 가네.
대구의 능금은 배고플 때 더 맛나고
제주의 밀감은 목마를 때 더욱 좋네.

불기 2527년 계해 (1983년) 정월 보름날
조계총림 방장 구산 쓰다.

송광사 광원암 감원 현봉 스님

박부영 기자 [불교신문 2322호/ 2007년 4월28일자]

우연히 글을 한편 읽었다. 말미에 이런 구절이 적혀있었다. “봄을 기다리던 매화들이 이제 봄을 팔면서 매독에 찌들어 있습니다. 선비와 수행자는 청빈으로 신조를 삼아야 하고 정치인 또한 마찬가지 일겁니다. 약간의 추위가 있어야 매향이 그윽하듯이 선생님께서 늘 어려움 속에서 정치를 하시는 것이 보기에 좋습니다. 구상하시던 신문명 국가비전을 제시할 새로운 정당이 신선한 한줄기 바람으로 회오리치시기를 앙축 하옵니다.” 현봉 스님이 송광사 주지 시절 사회운동가 장기표씨에게 보낸 답 글이었다. 쉬우면서도 수행자의 체취가 물씬 풍겨나는 매력적인 글이었다. 꼭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째 벼르던 참이었다.

며칠 째 스님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거의 포기할 무렵 낯선 전화가 걸려왔다. 현봉 스님이었다. 지난 18일 서둘러 호남선 기차에 몸을 실었다. 객실 안에 설치된 TV를 통해 다음날이 ‘4.19’라는 사실을 알았다. 학교 졸업 후 자연스럽게 잊혀지고 멀어진 일상 중 하나다.

망각은 좋은 일이다. 잊는다는 것은 그 ‘무엇’이 더 이상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혹은 이미 그 무언가가 되었기 때문에 기억할 필요나 기억나지 않는 지도 모른다. 그 상태를 우리는 통칭해서 자연 혹은 일상(日常)이라고 부른다. 선사들은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으며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 일상이 곧 도(道)라고 한다.

평생 세 번 가면 많이 간다던 송광사 가는 길은 멀었다. 마지막 버스가 내려다준 송광사 앞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캄캄했다. 이른 아침 송광사 가는 길은 경쾌했다. 서울 주변 산들은 아직 벚꽃이 한창인데 조계산은 이미 연두색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사람으로 치면 10대에 해당하는 이때 나무들도 가장 싱그럽고 보기 좋다. 광원암 가는 길은 어렵게 찾았다. 송광사는 암자 가는 길을 표시하지 않았다. 아마 암자로 남고 싶은 모양이다.

대중이 많은 큰 절은 시스템에 따라 움직인다. 번잡하지만 승가의 풍습을 익혀야하는 행자나 초심자들은 대중들 속에서 하심하고 인내하는 법을 배우고 사중의 법도를 익혀야 한다. 하지만 이미 일상이 된 구참납자에게 틀은 제약일 뿐이다. 대중은 번뇌로 다가온다. 암자는 그런 납자들에게 필요한 곳이다. 송광사 암자들은 한 명의 수행자에게 필요한 규모 이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광원암(廣遠庵). 한국 간화선을 낳은 보금자리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뒤를 이어 수선사(修禪社) 법주에 오른 진각국사 혜심 선사가 주석하며 종문(宗門)의 최고 저서인 『선문염송(禪門拈頌)』을 결집, 광원유포(廣遠流布)한 곳이다. 혜심국사 부도가 절 뒤편 높은 곳에 서있다. 6.25 때 소실된 송광사 복원을 위해 해체된 것을 1992년 현봉 스님이 중건했다. 법당 옆에 요사채를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차를 따르던 스님은 “스님이나 손님들이 와도 마땅히 잘 곳도 없고 해서 요사채를 건립 중”이라고 했다. 아침에 뜬 해가 오후 늦게까지 사라지지 않는 양지바른 곳이다. 송광사 보다 250년 앞서 창건했으니 그 역사와 내력이 충분히 짐작된다.

진각국사 부도 앞에 스님과 함께 예배했다. 작고 볼품이 없다. “국사 부도치고는 너무 초라하다”고 하자 스님은 “몽고 침입으로 인해 격식을 차릴 여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스님의 부도비는 전남 영암 월남사 터에 있다. 스님은 송광사 주지를 지내고 중앙종회의원을 지내는 등 행정도 관여했지만 본분은 수좌다. 대학 다니다가 참선을 하고 싶어 서둘러 군대를 다녀온 뒤 출가할 정도로 참선 공부를 목말라했다. 송광사 주지를 마친 스님을 우연히 마주친 곳도 오후 결제를 마치고 포행하던 어느 선원에서였다. 올 여름에는 어느 산문에서 보내느냐는 질문에 스님은 “안거도 대중생활과 토굴생활이 있다. 대중생활은 규칙이 있는 반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다. 토굴은 원하는 만큼 공부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업에 빠질 우려가 있다. 어느 것이 옳다고 할 수 없다. 각자 선택할 문제다”고 대답했다. 스님은 지난 결제 때부터 광원암에서 보내고 있다.

스님의 말은 계속됐다. “말 그대로 나와 남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안거다. 꼭 좌복에 앉아 산문 출입을 금하는 등의 형식도 중요하지만 내용도 살펴보아야 한다. 반결제 지나면 기강이 해이해지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긴장을 늦추지 않고 토굴생활을 할 수도 있다. 나 개인적으로는 산철 결제가 좋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를 더 확산하면 복지나 외호 등도 모두 안거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내용 못지않게 형식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렇다고 형식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라는 것이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고 마음대로 하기를 갈망한다. 그런데 그 몸뚱아리를 석 달 동안 붙잡아 놓는 그 자체만 해도 대단하다. 속이야 온갖 번뇌망상으로 들끓던, 하고 싶은 것을 참고 인내하는 그 정신은 높이 사야한다. 내용이 무엇이든 형식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사실 맨 날 밥만 축내면서 수행이 어떻고 지껄이는 것 보다 훨씬 낫다.” 스님의 말씀은 이어졌다. “참선을 해서 좌정 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정력(定力)이 생긴다. 정력이란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힘을 말한다. 자칫 수행을 잘해서 된 것인 양 오해하는데 참선 자체가 주는 반응이다. 예를 들면 원심력이나 구심력 같은 것이다. 팽이가 돌아가는 것은 붙잡아 두는 힘 때문이다. 중심을 잡기 때문에 팽이가 도는 것이다. 오랫동안 자기를 붙들어 둘 수 있는 그것으로 여러 힘이 생겨난다.”

한나절 동안 곁에서 지켜본 스님은 소탈하고 경계가 없었다. 말 속에는 재미와 교훈이 함께 들어있었다. 오랜 실참과 깊은 공부가 뒷받침돼 나오는 사자후는 다른 선사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흡입력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무엇을 하든 걸림 없고 기개가 충만한 진정한 장부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해질 무렵 내려오는 길의 조계산은 싱그러운 풀내음이 물씬했다. ‘장부자유충천지(丈夫自有衝天志) 불향여래행처행 (不向如來行處行)’ “대장부에게는 스스로 하늘을 찌를 뜻이 있다. 여래가 간 곳을 다시 가지 않는다.”며 어디서나 주인노릇(隨處作主)하라던, 어느 법석에서 들었던 스님의 할(割)이 떠올랐다.

1949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난 스님은 어릴 적 한학자인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공부했으며 진주농고 재학시절 학교 공부보다 〈법구경〉 등 불교공부를 더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 경남 대표로 고전읽기 대회에 참가, 대학생들과 겨뤄 입상할 정도로 동서양 고전에 밝다.

참선공부를 하고 싶어 출가를 갈망하다 군제대후 곧바로 구산스님을 따라 산문에 들었다. 스님은 출가 후 3년간 원두소임을 맡아 농사일에 전념하는 한편 밭두렁에서 화두 참선에 드는 정진력을 보였다. 이후 송광사 선원에서 수선안거 이래 봉암사, 해인사, 백련사, 수덕사, 극락암, 월명암, 수도암, 칠불사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했다. 정진을 하는 가운데서도 소임이 부여되면 마다하지 않았다. 현호스님 주지 당시 재무국장을 맡아 송광사 망실 재산을 찾는데 큰 기여를 했다. 노동과 수행이 일상이 된 수행생활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노동과 수행에 묵묵히 정진하는 스님은 한번 말문이 터지면 선가의 세계는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해박한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를 비롯한 정치인들과 도예가 신경균 씨 등 문화인 그리고 인근 광주 지역 신도들이 즐겨 광원암을 찾는다.

• 불광출판사는 ․ ․ ․
불광출판사는 ‘불서(佛書)와의 만남이 부처님과의 만남’이라는 신념으로 책을 만듭니다. 부처님의 빛으로 우리에게 본래 깃든 부처의 씨앗을 싹틔우는 책을 출판, 개개인의 성장을 돕고 이웃을 밝히고 사회를 밝혀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일구는 주춧돌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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