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진]사부대중 어떻게 소통하고 화합할 것인가
[이덕진]사부대중 어떻게 소통하고 화합할 것인가
  • 이덕진/전 창원 문성대학교 교수
  • 승인 2018.11.0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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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진/전 창원문성대 교수.

사부대중 어떻게 소통하고 개혁할 것인가

이덕진/전 창원문성대학교 교수

Ⅰ. 들어가는 말

붓다가 보리수 밑에서 얻은 깨달음의 내용은 연기의 이법이라고 말해지며, 따라서 연기는 불교의 근본진리이며 불교에 의한 세계관·인생관을 이룬다. 나아가, 연기는 붓다의 출세 혹은 불출세와 무관한 진리로서 불교에만 국한되는 진리가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의 진리· 보편타당한 객관적 진리이다. 그러므로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라든가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부처를 본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연기를 올바로 본다면 불교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 된다는 말이 된다.

연기를 현재 우리의 언어로 푼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필자는 연기를 ‘수평적 사고’, ‘관용하기’, ‘상대방 배려하기’, ‘상相 없애기’, ‘처지 바꿔 생각하기’, ‘나하고 180도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과 한 공간에서 살아가기’, ‘차이를 존중하기’, ‘관계 맺기’, ‘소통하기’, ‘놓기’, ‘무소유’ 등으로 풀고 싶다. 그에 반해서 반연기는 ‘수직적 사고’, ‘나 중심’, ‘상대방 배척하기’, ‘상相 가지기’, ‘나를 고집하기’, ‘차별하기’, ‘불관용’, ‘갑질하기’, ‘불통’, ‘잡기’, ‘소유’ 등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본다면 필자에게 주어진 ‘사부대중 어떻게 소통하고 개혁할 것인가’인가 하는 주제는 역설적으로 현재 한국 불교의 상황이 반연기적․반불교적이라는 의미가 된다. 필자 역시 이러한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 글은 우리가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이러한 당면문제에 대한 고민의 결과이다.

Ⅱ. 본론

1. 베풀기와 더불어 살기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한시가 시급하다는 보건복지부의 요청을 받고 시신 수습 등을 담당할 자원봉사 전문가와 학생들을 20여 명 급하게 섭외한 다음 부랴부랴 진도 팽목항에 도착했다. 4월 18일이 오전이라 기억한다. 그때 현장의 상황과 그것을 지켜보던 참담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학생들을 급한 데로 요소요소에 배치해놓고 나니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숙박과 식사가 문제였다. 팽목항이 워낙 오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사람을 시켜 현장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읍내 근처에 겨우 잠잘 곳을 마련한 다음 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장을 둘러보았다. 놀라웠다. 현장에 있는 방파제 곳곳에 수많은 단체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개신교, 가톨릭 등의 종교단체뿐 아니라 약사회, 의사회 등을 포함하여 셀 수 없는 수많은 시민과 자원봉사 단체가 자리를 잡고 생필품을 포함하여 약과 물과 매 끼니 식사 등을 관련자들에게 제공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장을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불교 관련 단체나 자원봉사자는 없었다. 어이가 없었다. 이틀 정도 지나자 비구니 스님 몇몇이 개인적으로 학생들을 삼킨 바다 쪽을 향해 목탁을 들고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원봉사자들과 단체 등이 자리 잡고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서 외롭게. 들어갈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틀 정도 지나자 그곳에 전라남도 사암연합회 이름으로 천막이 들어섰다. 또 이틀 정도 지나자 천막에 조계종단 이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후에 4월 26일 조계종 부처님 오신 말 연등행사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의 극락왕생’과 ‘실종자 무사 귀환’을 염원하였고, 5월 20일에는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추모재’가 조계종 총무원 주최로 열리는 등 많은 행사가 잇달아 열린다.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롯해 중앙종무기관 및 산하기관 스님들이 5월22일 오전 여객선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진도 팽목항을 방문해, 진도 앞바다를 향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하지만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것은 ‘현장성’이다. 대형 참사가 일어나면 다른 종교단체나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은 그 현장에 발 빠르게 찾아 나선다. 그런데 불교는 어떤가? 대형 참사가 벌어질 때 그 문제에 발 빠르게 대처할 기구가 있는가? 있다면 그 시스템이 나라 곳곳의 문제에 바로 대처할 정도의 현장성을 가지고 있는가? 필자는 그랬던 적을 본 적이 없다. 왜 이렇게 되었을 까? 부끄러움과 함께 자책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지하듯이 ‘중생衆生이 곧 부처’라는 명제는, 2500여 년 불교 역사를 관통하는 정신이다. 이 명제는 세 가지 함의를 가진다. 첫째,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 둘째, 부처의 수만큼 중생이 있고 중생의 수만큼 부처가 있으므로, 중생이 부처이고 부처가 중생이다. 셋째, 불․보살의 존재의미는 중생이다. 따라서 저잣거리로 나아가 중생과 동참同參할 때 비로소 불․보살이 된다.

나의 병은 모든 중생의 어리석음과 애착으로부터 생겼습니다. …… 만일 모든 중생의 병이 나으면 그때 나의 병도 낫게 될 것입니다. …… 중생이 병을 앓을 때 보살도 병을 앓으며 중생의 병이 나으면 보살의 병도 낫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의 병은 대비심大悲心에서 생깁니다.

유마힐維摩詰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불‧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의미에 다름이 아니다. 불교가 오늘날 세계적인 종교가 된 이유는 ‘중생을 부처’처럼 여기는 정신을 일관되게 가지고 주장하고 수행하며 더 나아가서 사회적 실천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기업, 국가, 조직, 종교 던지 이러한 사고를 가진다면 흥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역설적으로 이러한 진리에 반하는 기업, 국가, 조직, 종교는 그 생명이 길 수가 없다는 점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물론 이 진리는 불교 자체에도 당연히 적용된다.

따라서 불교가 표방하는 ‘중생이 곧 부처’라는 명제는 시간과 공간을 일관하는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인 진리’이자 ‘행동을 담보로 하는 시대정신’이지 과거불교의 흔적이거나 선언적 명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정신을 지금 당장 복원시켜서 중생을 부처처럼, 백성을 하늘처럼 여겨야 한다.

대승불교는 상구보리[自利]와 하화중생[利他]의 ‘상호통행을 통한 상승효과’를 중시한다. 자리와 이타는 서로가 서로에게 복전福田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자리[상구보리]가 이타[하화중생] 될 때의 공능’에 더 무게중심을 두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다른 시각으로 보면, ‘이타[하화중생]가 자리[상구보리] 될 때의 공능’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보살이 대 사회적 실천행위를 하고[利他] 그 결과를 대승의 수행으로 회향한다면, 이 행위는 대승의 깨달음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며, 보살의 수행에 큰 이익을 주어서 ‘더 크고 빠르게’ 깨달음을 얻게 하기[自利]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희로애락이 뒤엉킨 생활 속에서의 작은 불씨 하나, 작은 자비심 하나가 불법을 살린다. 높다랗게 앉아 있는 부처님과 위엄을 갖춘 큰스님 네에게서가 아니라 하찮고 비루한 속에서 실로 고상함이 나온다. 모든 생명이 그렇고 정법이 그러하다.”

부처는 중생을 건지기 위해 마구니 소굴이나 오무간지옥에도 들어간다. 왜냐하면 구더기를 건지려면 구더기가 되어야 하고 짐승을 건지려면 짐승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병든 자 같은 덧없고 허무하고 비천한 중생들이 바로 진짜 부처의 모습이다. 그뿐만 아니다. 부처님이란 개미 새끼 한 마리, 풀 한 포기 안에도 깃들여 있으므로,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불심은 온 법계의 일체 대상을 모두 둘이 아니고 하나라고 보는 것이다.

보살은 중생에 대한 그의 행위가 공空하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면서도 중생의 구제를 위해 부단하게 허깨비[空] 같은 노력을 지속하는 자이다. 이때 보살은 두 가지 실천을 하게 된다. 그는 먼저 연기를 통해 중생과 자신의 동일성[自他不二]을 인식한다. 다음으로 자타의 동일성[同體]을 통달한 후에, 중생의 고통을 자신의 기쁨과 교환하는 적극적인 보살행의 단계[大慈大悲]로 나아가는 것이다. 동체대비同體大悲이니 중생이 있는 만큼 부처가 있고, 부처가 있는 만큼 중생이 있게 된다. 내가 있기에 부처가 있고 부처의 형상이 내 형상이며 부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는 것이다.

앞에서 진술했듯이,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을 말할 때, 깨달음과 중생교화의 관계에서 깨달음을 선先의 자리에 중생교화를 후後의 위치에 놓는 경우가, 중생교화를 선先의 위치에 깨달음을 후後의 자리로 놓는 경우보다 일반적으로 더 많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서 깨달음을 앞에 놓을 때 깨달은 자는 강렬한 자의식自意識을 드러내게 되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각자覺者의 자의식, 즉 상相을 인정하고 수용하게 된다. 이때 각자覺者의 이러한 행동은 동체대비同體大悲를 바탕으로 한 동참의식同參意識이라기보다는 출세간出世間에 서서 세간世間에 대하여 시혜施惠나 구원救援을 베푸는 우월의식優越意識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골목에 들어 손을 드리우다[入廛垂手]
비록 누더기를 걸쳤어도
언제나 모자람이 없고나
길거리와 장터에서
뭇 사람과 섞인 채
그들의 고통은 절로 사라지니
이제 내 앞에서는
죽은 나무도 살아나는구나.
깊은 골에 물줄기도 젖지 않는다 하리.

그러나 입전수수入廛垂手의 본래 의미는 깨달은 자의 자의식[相]에서 비롯된 은혜 베풀기[施惠]나 세상을 구원하기[救世意識] 등의 상근기 놀음이 아니다. 출세간에서 세간으로 돌아와 저잣거리 한가운데에서 범부중생들과 동참同參, 즉 더불어 사는 것을 입전수수라고 하는 것이다. 잘되는 사람을 보면 내일 같이 기뻐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같이 아파하고 슬픈 사람을 보면 같이 눈물을 짓는 것이 바로 대승 보살행의 진정한 의미이다.

2. 사부대중의 위치 바로잡기

전공이 그렇다 보니 1년에 반은 절집을 오가며 사는 세월이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출가자가 재가자를 대하는 태도이다. 다음을 보자.

한국 불교에선 붓다가 없앤 계급이 부활했다. 정작 힌두교의 인도에선 유명무실화한 브라만을 대신한 계급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불자는 젊은 승려에게도 큰절 3배를 할 것을 강요받기도 한다. 절 공양간에서 식사할 때도 ‘스님 석’에 일반 불자가 접근했다간 욕을 보기 일쑤다. 왕조가 존속 중인 영국이나 일본, 타이 등 왕실에서도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한국불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고학력자와 남성 비율이 현저히 떨어지는 이유가 이런 3배와 같은 비상식적 권위주의 때문이라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왔다. 한 불교학자는 “어느 종교 종단에도 없는 신격화 양상”이라며 “승려들이 돌부처처럼 숭상받기 원하면 금욕과 무소유의 계율 준수가 뒤따라 야한데도 현실에선 출가의 본문을 망각한 채 세속인보다 더 세속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해 대중들이 분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불교단체 실무자는 “타종교와 공동행사를 하던 중 보살들이 스님에게 큰절로 3배를 올렸을 때, 가톨릭 신부와 개신교 목사 등 다른 종교인들이 부러워하면서도, 경멸하는 눈빛이 느껴졌다”면서 “정작 이런 부분에 대해 타 종교인들과 불자들이 어떻게 보는지 스님들만 모르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대한불교청년회의 한 간부는 “종헌종법엔 조계종이 사부대중으로 구성된다고 돼 있지만 평등하지 않다”고 질타했고, 조계사에 결혼식을 올렸다는 50대 후반의 남성불자는 “함부로 말하는 젊은 스님에게 노보살님이 ‘스님이 숟가락 들기 전부터 이 절에 다녔다’고 노여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면서 반말을 지껄이며 불손한 승려들의 행태를 질타했다. 이어 불교자원봉사연합회에서 봉사해왔다는 한 여성은 “스님들이 보살들을 너무 함부로 대하는 것에 화가 나서 삭발을 한 적이 있다”면서 “재가자들도 삭발하고 승복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울먹였다.

그뿐 아니다. 출가자들 사이에도 갑을관계가 있다. 다음을 보자.

심각한 차별문화는 비구와 비구니 사이에서 두드러진다. 비구니의 참종권 제한이 대표적이다. 조계종의 경우 비구니는 중앙종회의원 81석 중 10석만이 배정돼 있으며, 총무원장 선거인단 321명 중에서도 극히 미비한 수준이다. 이마저도 1994년 종단개혁과 함께 신설된 것으로 이전에는 비구니에게 투표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또한 종정과 원로의원 역시 비구만 가능하다. 그 때문에 중앙종회서 비구니 권리 신장을 포함한 종법개정안이 부결됐을 때 비구니종회의원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회의장을 떠나기도 했다. 더욱 더 안타까운 점은 재가불자들 사이에서도 비구니보다 비구를 더 선호하는 분위기가 짙다는 것이다. 비구니 B스님은 “어느 재가불자는 ‘비구니스님한테 천도재를 지내니까 비구스님보다 조상 천도가 잘 안 되는 것 같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며 “그만의 문제로 치부하기엔 전반적으로 비구니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이 지난 3월 열린 사부대중 100인 대중공사서 “총무원장 직선제를 하면 비구니스님들이 미는 후보가 당선될 수밖에 없어 종단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며 비구니들의 세력화를 우려한 것을 미뤄볼 때 비구니 권리 신장에 대한 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외에도 출가자와 재가자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인한 마찰도 적지 않다. 최근에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이사회서 이사 중 한 스님이 부회장인 진각종 통리원장 회정 정사에게 “진각종은 승가냐 재가냐” 물으며 ‘스님 대하는 재가의 태도’를 강요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2018년 간선제인 제36대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 교구 선거인단 240명 가운데 비구니는 23명에 불과했다. 비구니 종회의원 10명을 더하면 36대 총무원장 선거에 참여하는 비구니 스님은 33명이다. 전체 318명 가운데 약 10%에 불과하다.

불교는 비구와 비구니, 재가와 출가라는 신분에 의해서 결정되는 종교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불교는 신분으로 결정된다고 믿는 것 같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구조적 요인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한국불교 내부의 구조적 요인과 그 역학관계가 그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우선 ‘종단 내부의 불평등구조’에 대해 살펴보자.

불교는 인류 지성사 사상 그 유례가 없는 평등사상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불교의 상황은 어떠한가? 불평등으로 가득 차 있다. 종단 내부의 불평등 구조는 크게 3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승가와 재가 불자 사이의 불평등이다. 재가 불자는 종단의 일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방법이 없다. 그 결과 주변인으로 겉돈다. 둘째, 비구스님과 비구니스님간의 불평등이다. 현재 조계종에 따르면 전체 승려 1만 3000여 명 중 비구니스님은 약 6000명[46%]이다. 그런데 조계종은 종헌·종법으로 종정을 비롯해 총무원장, 교육원장, 포교원장, 호계원장, 총림 방장, 본사 주지 등 종단 주요 소임자의 자격 요건을 ‘비구’로 못 박고 있다. 모든 분야에 걸쳐 제약 속에 비구니스님들이 있는 것이다. 셋째, 소속집단의 구분에 따른 불평등이다. 이는 비구스님들 사이에서 문중이나 소속집단 및 세력에 의한 불평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불교 내부의 불평등 구조로 인해 한국불교는 정치경제적 능력이나 종교적 위신을 지닌 일부 집단이나 그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비구 스님들에게 한정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이러한 집단이나 그 집단에 소속된 스님들은 그 맡은바 임무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

다음으로 한국 승가 내부의 ‘세력 간의 갈등’을 살펴보자.

승가공동체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형성된 제반 세력이나 집단 간에 수많은 역학관계가 형성되어 왔으며, 그러한 역학관계가 때로는 갈등과 분규로 현상되기도 하였다. 비구―대처 간의 싸움,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등의 분종, 보수세력과 진보세력 및 개혁세력 사이의 갈등, 그리고 각 문중 간의 역학관계 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건들이 발생할 때마다 ‘분종이나 분규가 불교의 포교를 방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기독교의 선교를 도와주고 있다’라는 현장의 볼멘소리가 들린다는 점이다. 결국 승가공동체 내부의 분열, 대립, 그리고 분규는 불교에 부정적 인식과 이미지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불교발전을 저해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한국불교는 시대마다 다양한 원인에 의해 다양한 유형의 집단이나 문중 세력이 형성되고 소멸하면서 변화해왔다. 그 결과 승가공동체가 재가자들의 종교생활 및 사회생활의 모델이 되지 못하는 결과를 연속해서 가져왔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의 불교신자 뿐 아니라 미래의 불교신자가 될 ‘예비불자’들의 이탈과 타종교로의 탈출을 가져왔다. 결국 조계종단 내의 분규와 불평등이 불교의 발전을 방해할 뿐 아니라 기독교를 도와주는 셈이 된 것이다.

위의 분석은 우리에게 많은 반성의 기회를 준다. 다시 말해서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불교가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불교 내부의 불평등 구조를 극복하고 나아가 사회의 제반 영역에서 전문적인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사부대중들을 최대한 동원하고 조직화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붓다 당시의 인도사회는 철저한 계급사회였고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 그러나 붓다는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요 태어나면서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바라문도 되는 것이다”라고 가르치면서 계급 차별의 부당함을 깨우쳐 주었다. 그리하여 불교교단에 들어오면 누구나 다 평등하다는 것을 바다의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한다. “갠지스강과 같은 대하大河가 바다에 흘러들면 이전의 강 이름을 잃고 단지 바다라는 이름을 얻는 것과 같이 사성(四姓 : 바라문,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도 여래가 가르친 법과 율을 따라 출가하면 이전의 종성種姓을 버리고 똑같이 석가세존의 아들, 즉 석자釋子라 불린다.”

연기법을 참다운 진리로 삼는 불교는 법의 보편성에 따라 사성평등과 남녀평등, 나아가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까지를 주장한다.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佛性이 있으므로 그 인연이 성숙하면 언젠가는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출가자와 재가자의 깨달음의 능력을 구분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붓다 당시의 인도 사회에는 모두가 바라는 가장 중요한 일이 있었다. 하나는 전륜성왕이 되어 온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출가수행자가 되어 위대한 성자가 되는 것이다. 붓다의 전기에서도 고타마 싯달타가 ‘출가하면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어 불타가 될 것이고 출가하지 않으면 전륜왕이 될 것이다’는 예언의 내용이 나오고 있다. 다시 말해서 붓다와 전륜성왕은 인간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 구제자의 양면이다. 즉 붓다는 출세간을 대변하고 전륜왕은 세간을 대변한다. 이러한 사유방식과 사상적 전통은 마침내 유마경이나 승만경같은 대승경전 속에 계승된다.

유마경의 주인공인 재가자 유마힐은 붓다의 어떤 제자들보다도 수행력이 뛰어난 인물이다. 그의 법력은 사리불, 목건련, 가섭, 수보리, 부루나, 아나율 같은 뛰어난 제자들이 그에게 문병問病 가는 것 마저 겁이 나서 꺼릴 정도로 높았다.

승만경 역시 그 주인공이 재가여성이다. 승만 부인은 부처님 전에 열 가지 서원을 일으키고, 다시 세 가지 큰 원을 세우면서 그것을 충실히 지킬 것을 다짐한다. “몸과 생명과 재산을 던져서라도 바른 진리를 지키겠다.”고 하는 승만부인의 염원은 출가자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출가자와 재가자는 깨달음의 길에 있어 빠르고 더딘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재가자가 출가자보다 하열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모든 대승경전은 보살상을 통해 출가와 재가의 벽을 허물고 있다. 이 말은 재가자로서도 스스로가 근행 정진한다면 깨달음의 세계에 능히 이를 수 있고 성자의 길을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유마경이나 승만경 등의 경전은 출가와 재가를 계급화하려는 데 대해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3. 수요자 중심으로 전환하기

역사적으로 중국에서는 불교사원의 힘을 분쇄하고 그 재화를 몰수하려는 급진적인 시도인 많은 法難이 있었다. 그 결과 중국불교의 황금기인 수․당 시대에 발전했던 수많은 종파 가운데 선종과 정토신앙만이 살아남는다. 이 점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의 법난보다도 훨씬 강도가 심한 조선 왕조 5백 년의 모진 탄압에도 불구하고 선종과 정토신앙은 그 명맥을 유지한다. 그뿐만 아니라,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우리 사회의 전통적이고 고급스러운 종교와 문화 등이 대부분 유실되었지만, 한국 간화선만은 유독 더 활발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영향력을 점점 확대해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주목할 만하다.

이조 5백 년 모진 박해를 견디어 낸 정신과 근대 이후 서구 세력의 강력한 침탈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는 한국선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러나, 선이 종래에 보기 드문 융성을 보인다고 해서, 비록 21세기의 대안이라고 회자膾炙되기도 하지만, 한국선의 장래가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고, 한국선의 과거가 모두 모범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그 반대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지금이 바로 한국선의 가장 큰 위기이자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어떻게 슬기롭게 풀어나가느냐 하는 것은 사부대중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의 범주 안에 있는 선 또한 현실에 바탕을 두어, 나와 남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중생이 있는 곳에 부처님이 계시다고 믿는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연관 관계를 찾아서, 그 어렵고 고달픈 현실에서 참된 불교의 길을 찾아 무소유의 삶을 실행하고 무주상의 보시를 실천하는 보살행을 꿈꾼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있음은 자비에 의한 지혜 그 자체로 스스로 체화된 결과, 나의 것을 나누고, 나의 것을 버리며, 나의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고 아는, 무소유無所有․무주상無住相․무집착無執着에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선에는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중생에 대한 배려’를 소홀히 할 가능성이다. 이것은 선의 중점적 관심이 견성성불見性卽佛, 곧 구경각究竟覺의 증득證得에 있기 때문에 생기는데, 여기에서는 중생구제의 강력한 이론적 배경이 되었던 대승불교의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는 이념이, ‘분별심分別心에 계박繫縛’된 발언이라는 죄목으로 배격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구제 대상으로서의 중생이 들어설 틈이 없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견처는 깨달음에 너무 천착하여 보살행에 충실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대승불교의 시각에서 볼 때 ‘방법론적인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된다.

정색하고 한번 반문해보자. 깊은 산속 조용한 곳에서 선승禪僧이 가부좌를 틀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향유享有하는 그 자리에 중생이 끼어들 여지가 있을까? 중생이 무시되고 잊히는 불교가 과연 불교일까? 그 선사들 가운데에서 각자覺者라는 계급階級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그들의 공부를 귀하게 여기는 만큼, 미천한 ‘중생의 삶’에 연민을 느끼는 불승이 있을까? 대답이 쉽지만은 않다. 최상근기이자 일종의 선민選民인 그들에게는 보살행이 실제로 저잣거리에 뛰어드는 실천이 아니라 머릿속에 공허한 말장난이나 관념으로만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주 특수한 경우가 있을 수가 있다. 최상근기 수행자들의 경우 때때로 ‘중생과의 격리’가 필요하다. 그 능력을 발휘함에 있어서 세간보다는 사원이 더 적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때 그가 도량에서 참선 수행을 통하여 얻은 경지는 불교적 사유와 보살행의 지평을 넓히는데 많은 공헌을 할 것이고, 더 나아가서 불교 지성사 및 사부대중에게 절대적이고도 엄청난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특수한 경우이다. 따라서 이것을 일반화한다면 우리는 ‘거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중하근기 중생에게 곁을 주지 않는 선종의 기본적인 성격에 관해서이다. 우리는 한국선의 근본적인 정체성이 대승불교에 있다는 점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선에 알게 모르게 깃들여 있는 ‘정체성의 혼동’이나 ‘특수의 보편화’ 등의 오류를 제거하여, 대승불교 본래의 정신을 환기시켜야 한다. 이것은 지금 현대의 한국선이 과거를 반성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에서 아주 절실하다.

주지하듯이 우리나라 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은 선종을 표방하고, 그 구체적인 수행방법으로 간화선을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간화선 수행전통을 특화하여 국내․외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한국 간화선 정체성의 입장에서나, 다른 종교나 종파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상대적으로 비교 우위적 측면을 가질 수가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다. 더 나아가서 한국선의 발전을 도모하고 간화선을 세계화 하는 데에도 유리하다.

다른 한편 간화선이 최상승법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도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주장한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선종사의 적통 문제에 있어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강력한 ‘분별심分別心’이 있을 수도 있다. 더불어 이러한 ‘축소 지향적’인 자기 순수성의 확보가 간화선 정체성의 인식에 얼마나 순기능을 할 것인지도 의문이다.

따라서 간화선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과 간화선이 최상승법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을 별개의 문제이다. 이때 한국선의 발전을 도모하고 간화선을 세계화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부대조건이 있다. 그것은 간화선을 시대에 걸맞은 수요자 중심의 선적수행체계로 재정립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첫째, 선과 교학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간화선의 대성자 대혜는 화두 공부를 함에 있어서 경전의 가르침을 무시하거나 경시하거나 폐기하라고 문도들에게 가르친 적이 없다. 단지 교를 의존하여 선으로 가되 문자의 공능을 과신하거나 집착하지 말라고 하였을 뿐이다. 즉 문자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문자를 교조화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간화선 공부를 하는 많은 분들은 이 문제와 관련하게 지나칠 만큼 문자를 무시하거나 경시하고, 심지어 폐기하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기까지 하고 있다. 잘못 이해한 사교입선捨敎入禪 전통으로 인하여 체계적 교육이 부정되고 그 결과는 간화선 수행에 많은 혼동과 오류를 주고 있다.

둘째, 선 수행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서장書狀에서 대혜는 전부 42명에게 62편의 서신을 보낸다. 특기할 것은, 여성 1인[泰國太夫人], 승려 2인[聖泉珪和尙, 鼓山逮長老]을 제외하고는, 서장에서 대혜가 가르침을 내리는 대상인 39명은 모두가, 당시의 지식인이자 관료인, 사대부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선수행의 주인공이 승려라기보다는 오히려 재가불자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선은 수요자 중심으로 재정립돼야 한다.

셋째, 다른 수행방법의 장점을 포용하여야 한다. 이것은 간화선을 수요자 중심의 체계로 재정립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존재하고 있는 다른 수행법의 장점을 간화선의 정신에 따라서 보다 유연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간화선’이라는 상相에 구애되는 것은 간화선의 정신을 배반하는 것이다. 일찍이 임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각종 불교유사수행법의 확산과 위빠사나의 보급 등은 간화선의 정체성을 확립시키는 계기로도 작용할 뿐만 아니라, 간화선을 건강하게 만드는 데에도 큰 몫을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수평적 문화구조 속에서 경쟁력을 키워나간다면 가까운 시일 안에 간화선이 한국선, 더 나아가서 한국의 주류문화로 확실하게 자리매김 할 것이다.

넷째, 수요 당사자의 눈높이에 맞는 간화선 수행법에 대한 지침서를 만들어서 재가 수행자 양성과 지도에 진력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간화선은 모든 공부가 중생衆生이 아니라 각자覺者, 재가자가 아니라 출가자, 중·하근기가 아니라 최상근기의 입장에서 펼쳐지고 있다. 범부중생에 대한 배려를 전혀 하고 있지 않다는 점 간화선의 주요한 특징인 것처럼 회자되고 있다. 그 결과 많은 불자가 간화선 이외의 수행법에 관심을 보인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간화선을 하고 싶지만, 너무 어려워서 할 수가 없다고 하소연을 한다.

왜 그렇게 생각할까. 출발점과 도착점만이 있고, 도착점까지 도달하기가 너무 난감할 뿐 아니라, ‘한 소식’을 하기 까지의 단계 단계에서 중간 점검을 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사실 난감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간화선의 정체성과 직접 연관되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선은 어떤 모방도 허용하지 않고 스승과 제자의 1:1의 직접적 가르침이라는 반복 불가능한 일회적 사건을 통하여 법을 전승한다. 그러나 지금은 다수를 위한 가르침으로 변해야 하는 시대이다. 동시에 문헌 등을 통하여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여야만 한다. 이 문제는 위에서 말한 간화선과 교학의 문제와도 맞물려 있다. 왜냐하면 간화선이 교설을 선의 방식으로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 터에 그것을 교설로 되돌려 놓고 흡족해한다면, 간화선의 정체성이 교란되고, 더 나아가서 간화선의 존재 이유가 없어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과 교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나 간화선 수행법에 대한 매뉴얼을 만드는 것은 가치 있는 작업이지만, 이러한 천착은 간화선을 걸고 벌이는 도박에 가까울 수도 있다. 우리는 그 방법상의 묘수를 찾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선지식이 재가 수행자들을 지도 점검하는 체계적 방법을 시스템화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간화선이 하나의 독창적이고도 의미 있는 문화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포교의 방법을 현장 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포교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그 하나는 큰 스님을 통하여 신도를 간접적으로 확보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반 스님들이나 재가 불자들의 포교 활동을 통해 신도를 직접 확보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세기 동안 이 중에서 전자에 주력해왔다. 이 방법은 상당히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치명적인 결함을 두어 가지 가지고 있다. 우선, 포교주체의 의식이나 노력 그리고 종단의 포교정책이나 전략, 그리고 종단, 교구본사, 단위사찰의 행정적․재정적 지원 등의 부대조건이 구비되어야 하는 포교의 기본원칙이 무시되고 그 준비를 게을리하거나 아예 하지 않는 것이다. 다음으로, 현실적으로 다수의 스님들이 정안종사正眼宗師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아주 뛰어난 선지식을 제외한 나머지 스님들과 특히 ‘재가 포교사’들의 행동 여지가 줄어들게 된다. 따라서 포교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두 가지의 경로를 포교에 모두 활용할 수 있다면 그 이상 좋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오히려 후자가 더 실질적이고도 효과적인 포교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자를 강조해왔고, 후자는 무시하거나 봉쇄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따라서 미래사회에 포교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회의 제반 영역에서 전문적인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사부대중들을 최대한 동원하고 조직화하여 활동에 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Ⅲ. 나가는 말

필자는 ‘사부대중 어떻게 소통하고 개혁할 것인가’에 대한 방안을 크게 세 가지로 줄여서 강구했다. 그것은 ‘베풀기와 더불어 살기’, ‘사부대중의 위치 바로잡기’, ‘수요자 중심으로 전환하기’이다.

첫째는 ‘베풀기와 더불어 살기’이다.

불교가 표방하는 ‘중생이 곧 부처’라는 명제는 시간과 공간을 일관하는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인 진리’이자 ‘행동을 담보로 하는 시대정신’이지 과거불교의 흔적이거나 선언적 명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정신을 지금 당장 복원시켜서 중생을 부처처럼, 백성을 하늘처럼 여겨야 한다.

보살은 중생에 대한 그의 행위가 공空하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면서도 중생의 구제를 위해 부단하게 허깨비[空] 같은 노력을 지속하는 자이다. 이때 보살은 두 가지 실천을 하게 된다. 그는 먼저 연기를 통해 중생과 자신의 동일성[自他不二]을 인식한다. 다음으로 자타의 동일성[同體]을 통달한 후에, 중생의 고통을 자신의 기쁨과 교환하는 적극적인 보살행의 단계[大慈大悲]로 나아가는 것이다. 동체대비同體大悲이니 중생이 있는 만큼 부처가 있고, 부처가 있는 만큼 중생이 있게 된다. 내가 있기에 부처가 있고 부처의 형상이 내 형상이며 부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는 것이다.

대승 보살행을 상징하는 입전수수의 본래 의미는 깨달은 자의 자의식[相]에서 비롯된 은혜 베풀기나 세상을 구원하기 등의 상근기 놀음이 아니다. 입전수수는 출세간에서 세간으로 돌아와 저잣거리 한가운데에서 범부중생들과 동참, 즉 더불어 사는 것이다. 잘되는 사람을 보면 내일 같이 기뻐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같이 아파하고 슬픈 사람을 보면 같이 눈물을 짓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는 ‘사부대중의 위치 바로잡기’이다.

불교는 인류 지성사 사상 유례가 없는 평등사상으로 비구와 비구니, 재가와 출가라는 신분에 의해서 그 위치가 결정되는 종교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불교는 신분으로 결정된다고 믿는 것 같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구조적 요인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한국불교 내부의 구조적 요인과 그 역학관계가 그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우선 ‘종단 내부의 불평등구조’에 대해 살펴보자. 현재 종단 내부의 불평등 구조는 크게 3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출가자와 재가자 사이의 불평등이다. 둘째, 비구스님과 비구니스님간의 불평등이다. 셋째, 소속집단의 구분에 따른 불평등이다. 이는 비구스님들 사이에서 문중이나 소속집단 및 세력에 의한 불평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으로 한국 승가 내부의 ‘세력 간의 갈등’을 살펴보자. 승가공동체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형성된 제반 세력이나 집단 간에 수많은 역학관계가 형성되어 왔으며, 그러한 역학관계가 때로는 갈등과 분규로 현상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승가공동체 내부의 분열, 대립, 그리고 분규는 불교에 부정적 인식과 이미지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불교발전을 저해해 왔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불교가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불교 내부의 불평등 구조를 극복하고 나아가 사회의 제반 영역에서 전문적인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사부대중들을 최대한 동원하고 조직화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셋째는 ‘수요자 중심으로 전환하기’이다

우리나라 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은 선종을 표방하고, 그 구체적인 수행방법으로 간화선을 채택하고 있다. 한국선의 발전을 도모하고 간화선을 세계화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부대조건이 있다. 그것은 간화선을 시대에 걸맞은 수요자 중심의 선적수행체계로 재정립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첫째, 선과 교학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간화선의 대성자 대혜는 화두 공부를 함에 있어서 경전의 가르침을 무시하거나 경시하거나 폐기하라고 문도들에게 가르친 적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간화선 공부를 하는 많은 분들은 지나칠 만큼 문자를 무시하거나 경시하고, 심지어 폐기하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기까지 하고 있다.

둘째, 선 수행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선수행의 주인공은 승려가 아니라 재가불자이다. 따라서 선은 수요자 중심으로 재정립돼야 한다.

셋째, 다른 수행방법의 장점을 포용하여야 한다. 이것은 간화선을 수요자 중심의 체계로 재정립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존재하고 있는 다른 수행법의 장점을 간화선의 정신에 따라서 보다 유연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간화선’이라는 상相에 구애되는 것은 간화선의 정신을 배반하는 것이다.

넷째, 수요 당사자의 눈높이에 맞는 간화선 수행법에 대한 지침서를 만들어서 재가 수행자 양성과 지도에 진력해야 한다. 선지식이 재가 수행자들을 지도 점검하는 체계적 방법을 시스템화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간화선이 하나의 독창적이고도 의미 있는 문화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포교의 방법을 현장 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미래사회에 포교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회의 제반 영역에서 전문적인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사부대중들을 최대한 동원하고 조직화하여 활동에 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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