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킹메이커를 원했다.
바울은 킹메이커를 원했다.
  • 배길몽
  • 승인 2018.12.13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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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배길몽의 ‘지피지기’ 16

대부분의 불교인들은 불교 안에 갇혀서 불교 내부만 미시적으로 들여다본다. 필자는 그런 사람들에게 충고한다. 불교 밖으로 나와서 불교라는 숲을 거시적으로 바라보고 다시 주변에 있는 기독교와 과학이라는 다른 숲도 살펴보라. 불교 안에서 발생하는 미시적인 현상만 연구하면 아무리 연구해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 불교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일어나고 있으며 그리고 그런 현상들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도 해봐야 한다. 예를 들면, 모든 종교에서 형태만 다를 뿐 공통적으로 행하는 기도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자신의 기도에만 매달리면서 그것이 실현되는지 안 되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그런데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구분이 없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행하는 기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좋은 세상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다. 그런데 그 기도는 인류 모두의 소원이며 어느 누구의 개인적인 기도보다 훨씬 훌륭한 기도인데 그런 기도를 왜 하나님이나 부처님은 들어주지 않고 있을까? 그 기도를 못 들었을까? 아니면 듣고도 모른 척 하는 것일까? 기도가 성취되지 못하는 이유가 둘 중의 어느 것이든 결과는 똑같다. 이 세상은 혼란한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는 것이며 그렇다면 우리는 남의 힘이나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우리 세상을 지키고 가꿔야 한다는 것이다.

수년 전에 세월호 사고가 났을 때에 무조건 밖으로 나온 사람은 모두 살았고 안에서 살려달라고 기도하던 사람들은 전부 죽었다. 기도가 훌륭한 행위라면 왜 위급한 상황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될까? 전쟁, 테러, 재난 등에서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지만 왜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까? 과연 기도의 효과는 무엇이며 훌륭한 기도는 무엇인지 되새겨보아야 한다. 그런데 기도의 효과와 훌륭한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기도의 출발점인 종교를 공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불교뿐만 아니라 기독교도 공부해봐야 하고 우주 현상도 탐구해봐야 한다. 높은 탑을 쌓거나 깊은 우물을 파기 위해서는 터를 넓게 잡아야하기 때문이다.

일부 승려들처럼 불교 안에서 불교만 열심히 공부하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면 그것은 아마 착각일 것이다. 올바른 깨달음을 얻으려면 과학과 기독교란 숲도 두루두루 살펴보아야 한다. 일부 현상들만 살펴보고 함부로 일반화시키면 안 된다. 과학이든 종교든 우주 전체를 설명하지 못하고 일부 현상만 설명하는 이론이나 교리는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그래서 필자가 불교인들에게 불교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과학에 대해서도 살펴볼 기회를 제공하려고 이렇게 불교 언론에 과학과 기독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교회건물을 지으라고 한 적이 없으며 자신이 가정의 다락방에서 소박하게 예배를 봄으로서 모범적인 교회의 모습을 제시했다. 예수는 종말이 임박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대한 교회보다 작은 다락방을 이용해서 우선 시급한 인적인 조직을 구성하는데 주력했다. 예수가 마태복음에서 베드로의 반석위에 세운다는 교회의 의미가 바로 이런 조직을 말하는 것인데(교회의 원어는 ‘에클레시아’이며 조직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교회 형태는 바울이 12사도를 제치고 예수의 후계자(예수왕국의 2인자)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힘을 키우려고 예수의 추종세력을 유대교의 방식으로 조직화한데서 비롯됐다.  

바울이 예수의 재림(망명으로부터 귀국)을 기다리면서 이스라엘의 재건(예수의 왕국 건설)을 위해서 이방에 나가 있는 유태인(일제 강점기에 중국이나 해외로 피신한 조선 사람들과 같음)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교회)과 자금(헌금)을 만들기 위해서 예수를 메시아(지도자)로 전도한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로 발전하게 됐다. 예수가 등불을 켜고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한 것은 자신의 재림과 왕국의 실현을 지금처럼 2천 년 동안이나 불을 켜고 기다리라는 뜻은 아니었다.

바울도 예수가 곧 재림해서(고린도전서 1:7, 4:5, 10:11, 디모데후서 4:8, 빌립보서 2:16) 왕국을 건설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자신이 베드로를 제치고 2인자가 되려는 욕심으로 사도 중에서 제일 열심히(고린도전서 15:10) 교회를 조직하고 헌금을 모았다. 바울은 임박한 환난(종말; 마태복음 24:19, 누가복음 21:23)에 대비해서 처녀들에게 결혼을 하지 말 것을 권하고(고린도전서 7:26) 또 남편들도 때가 이르렀으므로 부부관계를 하지마라고 할 만큼(고린도전서 7:29) 종말(로마의 침공과 멸망)이 눈앞에 온 것으로 착각했고 그래서 자신도 큰 일꾼(권력실세)이 되려고 결혼도 하지 않고 열심히 전도(사실은 조직 확대 작업)를 했다.

유대교의 엘리트며 친 로마파(일제 강점기의 친일파와 비슷함)로서 이중국적(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울이 12사도들의 무지함과 무능함을 얕잡아보면서 심지어는 수석제자인 베드로에게 훈계도 했고(갈라디아서 2:11, 게바는 베드로의 다른 이름, 요한복음 1:42 참조) 스스로 자신을 예수의 사도라고 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여러 곳에 조직적으로 성당(교회)을 세웠다. 그런데 바울은 성당을 세우면서 신도를 차별해서 사도, 선지자, 교사(목사나 신부), 장로, 집사, 남자, 여자 등으로 계급화하고 은사도 큰 은사와 작은 은사 등으로 구분해서 기독교의 조직을 피라미드식으로 형성함으로서 교회가 권력화 되고 부패한 원인을 만들었음은 물론 예수의 기본 사상인 만민 평등사상도 훼손했다.

엘리트 의식과 교만으로 가득 찼던 바울이(고린도전서 4:15~16) 유대교의 기본 질서인 권위주의를 그대로 답습했는데(바울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예수와 인간 사이는 물론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종속적인 질서를 주장함) 그것은 바울이 예수의 만민 평등사상( 하나님과 인간은 부자관계이고 인간은 모두 동급의 형제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자신의 주장에도 일관성이 없었는데 예를 들면 로마서(2:13)에는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다고 해놓고 갈라디아서(3:11)에는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로마서(2:1~2)에서는 판단은 하나님의 영역이니까 사람은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고린도전서에서는 자신은 남을 판단하고(5:3) 또 신도들에게도 남을 판단해서 내어 쫓으라고 권한다(5:12~13).

예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형제며 친구라 했는데, 바울이 스스로 자신을 ‘주(예수)의 종’이라고 자처하면서 역으로 신도들도 ‘바울의 종’이 돼서 바울을 잘 섬기기를 종용했다(빌립보서 2:30). 바울은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고 편지 서두에서 항상 자신이 사도임을 스스로 주장하고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교회를 세우려고 하다가(고린도전서 15:9~10) 파벌을 일으켰다(고린도전서 1:11~12). 바울은 신도의 계급화, 교회의 우상화, 복음의 왜곡화, 종교의 권력화를 조장해서 예수의 정신을 근본부터 뒤집었으므로 현재의 기독교도들은 예수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파는 바울의 조직을 섬기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구약의 시편에 나오는 ‘어린양이 뛰어놀만한 초장이나 쉴만한 물가’가 아니라 ‘재산가치가 있는 양들을 가두어 놓기 위한 시설물(울타리)이며 돈(헌금)을 받고 거짓구원을 파는 상점’에 불과하다.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의 음성을 들으면서 눈이 멀었다가 예수의 제자로부터 안수기도를 받고서 시력을 회복했다고 했으나 시력이 회복됐다는 것은 허구다. 바울 자신이 기록한 성경을 보면 신도들이 자신의 눈을 바울에게 빼어주고 싶을 만큼 바울의 눈이 나쁜 것을 안타까워했으며(갈라디아서 4:15) 또 바울이 편지를 대신 쓰게 하고 서명만 친필로 하거나(고린도전서 16:21, 골로새서 4:18) 글자를 쓸 때에 크게 썼다고 기록한(갈라디아서 6:11) 것은 바울이 여전히 눈이 나빠서 작은 글씨를 쓰거나 읽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만약에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의 환청만 들었다면 예수에 대한 확신이 약했을 것이므로 예수의 부활과 재림을 불신했을 가능성이 많은데 왜 끝까지 예수를 믿고 재림을 기다렸을까?

사도행전 9:8에서는 바울이 예수를 보지 못하고 음성만 들었다고 했는데 고린도전서 15:8절에는 바울이 예수를 보았다는 모순된 기록을 남겼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든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고린도전서의 기록처럼 예수가 정말로 바울에게 나타났다면 그것은 성경의 예언처럼 예수가 실제로 재림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예수가 승천(피신)하기 전에는 예수를 몰랐으며 그 다음에 예수를 봤기 때문에 바울이 본 예수는 재림 예수가 분명하다. 기독교도들을 앞장서서 핍박하던 바울이 철저한 예수의 신봉자로 바뀐 이유는 다메섹 부근에 피신해있던 예수를 바울이 직접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가 부활한 것과 예수가 가까운 시일에 이스라엘로 돌아올 것을 확신하고 전심전력으로 예수가 메시아(지도자)임을 전파했으나 예수는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더 먼 곳으로 피신한 후에 사고가 났거나 아니면 겁이 나서 끝내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에 대한 바울의 믿음과 독립운동 과정을 보면 바울은 독립운동가로서 매우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 다만 한 가지 흠은 지나친 자신감과 믿음에서 오는 교만과 독선인데 그 이유는 예수의 환청만 들을 것이 아니라 예수를 직접 만났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확인했고 반대로 예수는 12사도보다 훨씬 뛰어난 바울의 지적인 능력을 감지했으므로 예수가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에 해야 할 여러 가지 일을 바울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바울의 자신감(믿음)과 교만(독선)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예수의 12사도는 대부분 무지하거나 주변에 신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고 똑똑한 유다마저 죽었으니까 예수가 바울에게 의지하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울이 굳게 믿고 있던 유대교를 배설물처럼 버리고(빌립보서 3:5) 기독교로 개종한 이유는 예수의 환상이 아니라 실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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