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 선한 생명체는 없다
우주에 선한 생명체는 없다
  • 배길몽
  • 승인 2019.01.23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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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배길몽의 ‘지피지기’ 연재 22

우주를 누군가가 설계하고 제작하고 운영하는 것이 가능할까?

만약에 우주의 모든 소립자들을 컴퓨터로 통제하고 관리하려면 적어도 지구만큼의 큰 컴퓨터는 물론 우주의 모든 소립자들과 힘과 의식을 교환할 수 있는 네트워크도 필요하다. 그런데 우주의 운영자가 컴퓨터와 같은 기계가 아니고 하나님과 같은 인격체라면 그 인격체는 울트라 슈퍼컴퓨터가 해야 할 일을 단 1초도 쉬지 않고 영원히 해야 하는 지옥과 같은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데 누가 그런 일을 스스로 하겠는가?

물리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우주는 결코 창조될 수 없으며 공학적으로 살펴보면 누군가에 의해서 운영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그러므로 우주는 스스로 존재하며 오직 법칙에 의해서 작동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기존의 과학이론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바로 불교에서 주장하는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라는 단어다. 그런데 제행무상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이지만 제법무아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지난번 연재에서 필자가 산중에서 수행을 하고 있을 때에 필자의 궁핍함을 보고 어느 스님이 많이 도와주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필자가 그 스님과 원만한 소통을 하려고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참으로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필자가 오랫동안 공부해서 만들어낸 통일장이론이 불교와 너무나도 유사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현대화된 교육제도에서 수천 년간 축적된 많은 과학 지식을 체계적으로 습득했기 때문에 통일장이론을 깨달을 수 있었지만 과학 지식이 거의 없던 수천 년 전의 부처님이 우주의 원리를 스스로 깨달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불교인들은 수행을 많이 하면 무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수행을 많이 하면 열반적정에 이를 수는 있지만 무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아는 제법무아라는 단어에서 나타나듯이 수행과 상관없이 모든 것이 언제나 무아이기 때문이다. 쉽게 다시 설명하면, 무아는 수행자의 경지를 설명하는 종교적인 말이 아니라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는 과학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말하면, 제행무상은 우주가 변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말이고 제법무아는 우주가 작동하는 원리를 설명하는 말이다. 우주의 작동 원리(무아)는 누군가가 수행한다고 바뀌거나 숨어 있다가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항상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차후에 기회가 되면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겠지만 불교의 4법인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열반적정인데 이것들을 연결해서 풀이하면, 우주의 현상과 원리(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올바르게 깨달으면 고해(일체개고)에서 벗어나서 해탈(열반적정)에 도달할 수 있으므로 열심히 수행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주의 원리(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면 꽤 복잡하므로 알기 쉽게 종교적으로 4법인을 다시 풀이하면, 모든 것이 헛되며(제행무상),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도 역시 헛되므로(제법무아) 부질없는 집착에서 벗어나면(열반적정) 생로병사의 고해(일체개고)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민이 법과 질서를 잘 지키면 대통령과 같은 권력자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듯이 인간도 우주의 원리에 부합하는 자연의 법칙을 잘 이해하고 지키기만 하면 일부 종교단체들처럼 절대자를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절대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노예처럼 예속화될 필요가 없다. 설혹 창조주가 존재하더라도 인간은 창조주가 만들어 놓은 우주의 법칙을 이해하고 그것만 잘 지키면 자기가 할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종교의 경전은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우주의 법칙에는 창조주의 뜻이 가감 없이 순수하게 투영돼있으므로 오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종교경전에 매달리기 이전에 창조주가 만든 자연의 법칙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종교라는 특수 단체에 가입하지 않아도 우주의 법칙만 잘 따르면 목표(영생, 해탈)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혼자서 먼 길을 가다가 길을 잃거나 도중하차하기 쉬우므로 안전하게 종교단체에 가입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자신이 매우 영특할 뿐만 아니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적어도 30년 이상 묵묵히 한 방향으로 걸어갈 지구력이 있다면 혼자서 길을 떠나도 된다. 알기 쉽게 말해서, 석가나 예수처럼 외롭고 힘든 길을 평생 동안 묵묵히 전진할 자신이 있으면 혼자서 가도 된다는 말이다.

필자가 지난번 연재에서 자비(사랑)는 선행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면 자비(사랑)가 선행이 아니라면 무엇이 진정한 선행인지 알아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이나 단체들은 자기편이 선이고 상대편은 악이라고 생각한다. 남한은 북한이 악이라고 하고 북한은 남한이 악이라고 한다. 법원에 가보면 원고는 피고를 피고는 원고를 악이라고 생각한다. 연애도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다. 자기 종교의 신도에게 신이 들면 성령이고 남의 종교의 신도에게 신이 들면 악령(사탄)이다. 성경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선이고 다른 나라는 모두 악이다.

일반적으로 도덕은 어떤 행위의 동기를 분석해서 선악을 구분하고, 법률은 그 행위의 결과를 중심으로 옳고 그름을 구분한다. 예를 들면 생명을 살리려는 선한 도덕적 의지로 환자를 도와주다가 실수로 인해서 환자가 죽으면 법률적으로는 과실치사가 성립될 수 있다. 그런데 필자의 선악 구분은 조금 다르다. 자유와 평등을 깨트리는 행위(양극화, 결집)를 악이라 하고 그 깨진 것을 바로잡는 것(평준화, 분산)을 회개(반성)라 하며, 자유와 평등이 깨지지 않도록 미리 막거나 유지하는 것(해탈; 양극화와 평준화의 악순환적인 윤회를 정지시키는 것)을 선이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는 행위는 모두 악행과 그 회개(보편적인 개념으로 선행이라고 하는 행위)만이 존재하며 진정한 선행은 거의 불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선행이라고 하지만 필자의 사전에서는 그것은 회개이며, 진정한 선행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이 안 생기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유일하게 전지전능한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일인데, 어찌된 일인지 전지전능다고 하는 조물주가 자신의 능력을 아끼며 선행을 아니 하므로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이 우리 인간이 미력하나마 스스로 노력해서 완벽은 어렵지만 그에 가깝도록 힘써볼 수밖에 없다. 인간들이 노력해서 아무도 도와줄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들면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므로 최대한 노력해서 도와줄 필요가 있는 사람의 숫자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치료보다 예방이 더 훌륭한 의학이듯이 구제보다 구제할 일이 안 생기게 하는데 더 주력해야 한다. 치료하는 것은 회개에 속하지만 예방하는 것은 선행에 속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여호와가 그 좋은 선행을 미루고 있는 것도 여호와의 계획이라고 말하는데, 좋은 일을 미룬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인간은 능력이 부족해서 지금 당장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차근차근 실행하려고 계획을 세우지만 전지전능한 존재가 좋은 일을 나중에 하려고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 거대한 우주의 창조를 6일 만에 할 수 있는 능력자라면 조그만 지구를 개혁하는 데는 6시간이면 충분하므로 예수가 지구에 온 김에 지구를 개혁하고 가면 되는데 굳이 재림해서 개혁하겠다고 약속해놓고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선한 일을 뒤로 미룬다는 것은 능력자가 능력이 없거나 아니면 바른 세상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거대한 우주를 만드는 천지창조도 겨우 6일 만에 끝냈는데 그 보다 무한히 작은 지구의 개혁을 왜 수천 년간 미루고 있겠는가?

선과 악을 앞에서 말한 자유와 평등의 유지와 파괴의 개념으로 분류하지 않고 보편적인 개념으로 분류하더라도 관점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느냐 아니면 제3자를 포함한 전체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선과 악의 개념은 달라진다. 다시 말해서 미시적으로 보느냐 아니면 거시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가 없었다면 십자가의 보혈을 통한 기독교의 영혼구원은 없었으므로 유다가 돈을 받고 예수를 판 행위는 미시적으로 보면 악행이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인류를 구원한 선행이라고 볼 수 있다.

강도가 희생자의 입장에서는 악행이라고 보이지만, 좀 더 근원적으로 바라보면 강도를 강도가 될 수밖에 없도록 몰아간 주변 환경을 만든 사람들이 원죄를 지은 것으로서, 오히려 강도는 환경의 희생자라고 볼 수 있으며, 또 그가 있음으로 공권력의 존재가치가 인정되고 실질적으로 경찰, 교도관, 판검사들의 실업을 막아주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공권력에 종사하는 자들은 강도 행위의 간접적인 수혜자로서 강도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물론 강도의 가족도 강도에게 금전적인 혜택을 직접 받았다면 강도에게 고마워할 수 있다.

착한 사슴을 잡아먹는 호랑이를 악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사슴이 착하다는 것은 인간의 관점이나 이해관계에서 바라본 생각이다. 그런데 사슴은 호랑이를 보면 도망이라도 갈 수 있지만 오히려 사슴은 도망가지도 못하는 연약한 풀들을 뜯어먹고 산다. 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을 괴롭히는 사슴을 잡아먹는 호랑이는 선이고 반대로 사슴은 악이다. 임금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세웠는데 그것을 빼앗은 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에서는 51%가 뭉치면 선악은 물론 진실도 바꿀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일이 무수히 일어난다. 한 사람(임금)이 독재하느냐 51%가 독재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며 군주제와 민주주의 제도 중에서 어느 것이 선이라고 말할 수 없다. 현명한 군주가 민주주의 제도의 무능한 지도자보다 훨씬 나을 수 있다. 그런데 누가 현명한 사람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방법이 없으니까 차선책으로 민주주의를 택하는 것이다. 기업가가 피와 땀을 흘리며 창업했는데 기업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이 노동조합이다. 선과 악의 명확한 구분은 없으며 모두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자기중심의 분류일 뿐이다.

병균이나 해충은 인간을 괴롭힌다. 그러나 병균과 해충은 자신들의 삶을 열심히 살고 있을 뿐이며 그들이 인간의 적이라고 해서 악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모든 생명은 살기위해서 서로 투쟁하고 있을 뿐이다. 병균이 열심히 살아가면 반대로 인간이 죽어가듯이 한 생명체가 열심히 혹은 잘 산다는 것은 다른 생명체가 못 살거나 죽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주 전체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선과 악의 경계는 없다. 생명체가 하는 모든 행위는 그저 생존행위며 선도 악도 아니다. 선과 악은 인간이 분류한 것이고 우주에는 오직 작용과 반작용(연기 작용에 의한 인과응보)이 있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을 할 때에는 항상 반작용(인과응보)이 나타나므로 조심해서 행동해야 한다.

선악의 개념을 모든 생명체와 물질까지 넓혀서 생각해보자. 모든 생명체는 남을 잡아먹거나 남의 것을 뺏어먹고 산다. 인간의 식탁에 올라오는 것은 모두 살아있던 생명체들이다. 육식 동물은 온순한 초식동물을 잡아먹고 산다. 그런데 초식 동물들은 움직이지 못해서 도망가지도 못하는 불쌍한 식물들을 먹고 산다. 식물들은 뿌리를 온갖 방향으로 뻗어 흙속의 좋은 성분은 죄다 뺏어간다. 온순한 초식동물이 사나운 육식동물보다 착하다고 말할 수 없고, 저항하지도 못하는 식물이 온순한 초식동물보다 선하다고 말 할 수 없다.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를 해치거나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은 아무도 착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먹이사슬로 만들어진 생명 시스템이 자연 발생적이라면 몰라도 누군가의 작품이라면 엄청난 실패작이다. 모든 생명체가 흙을 먹거나 물만 마셔도 살 수 있으면서 단성 생식으로 번식하게 했더라면 지구는 무한 경쟁의 치열한 싸움을 하지 않고도 지상낙원처럼 살 수 있었는데 왜 조물주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엄밀히 말하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죄악이 되는 이 지구가 바로 생지옥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 세상을 고해라고 했을 것이다. 부처님이 이 세상을 고해라고 한 것은 이 세상을 설계한 자가 있다면 그의 설계능력을 비난하는 말이 된다.

지구가 자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설계하고 건설했다면 지구를 생지옥으로 설계하고 건설한 존재는 무능하거나 아니면 악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조물주가 천지를 창조할 때에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를 잡아먹지 않고 살아가면서 생명체의 진화와 번식을 함부로 못하도록 통제되는 시스템을 적용하든지 아니면 그런 좋은 시스템이 없다면 무책임하게 생명체를 만들어서 지구를 생지옥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아예 생명체를 만들지 말았어야 옳다. 독자들은 무능한 조물주가 지구를 만들었다는 것과 우주가 윤회하는 과정에서 지구가 스스로 만들어졌다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합리적인가 생각해보라.

인간을 편하게 살도록 도와주는 기술이 과학이다. 그러면 과학은 착한 기술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이 편해진 만큼 동식물은 물론 자연과 물질이 괴로워진다. 과학은 자연과 물질을 부수고 변조해서 인간을 편하게 하는 기술이다. 누군가가 무엇을 얻으면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잃게 되고 누군가가 편해지면 또 다른 누군가는 괴로워진다. 우주의 모든 변화를 합하면 제로섬이지만 부분적으로는 언제나 상대를 이겨야 존재하는 무한 경쟁의 전쟁터다. 인간이 자연을 너무 괴롭히면 자연은 엘니뇨를 일으켜 인간에게 복수한다. 인간을 편하게 만들려고 생산된 많은 화학제품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페기물이 결국은 인간을 괴롭히는 환경오염의 주범이 된다. 단기적으로는 인간이 자연에게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원한 승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영원히 승리하면 우주는 정체되고 순환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사회의 권력이나 자본도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순환한다. 그러니까 돈과 권력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도록 노력하라.

지구가 우주 순환의 법칙에 의해서 스스로 소멸되기 이전에 미리 지구를 명망의 길로 가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 바로 인간이다. 모든 나라가 국력신장과 경제발전만 부르짖으며 앞으로 나가면 머지않아서 지구의 종말이 올 수 있다. 그러므로 과학이 올바른 철학에 의해서 통제돼야 하므로 철학은 지구와 인류를 구원해야할 중차대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 미신에 가까운 이상한 종교들이 세상을 구원하게 방치해둘 것이 아니라 과학적이며 철학적인 종교가 앞장서서 세상을 구원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일부 종교인들이 믿고 따르는 신들이 지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므로 인간이 스스로 지구를 가꾸고 지켜야 한다.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편해진다는 것은 누군가를 죽이고 또 누군가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들도 너무 오래 살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너무 많이 편해지려고 과욕도 부리지 마라. 그러면 그 만큼 더 죄를 많이 짓게 된다. 그리고 너무 많이 가지려고도 하지 마라. 남에게 꾸지 않아도 살아갈 만큼만 가지면 만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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