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서 행복하자
지금 여기서 행복하자
  • 배길몽
  • 승인 2019.01.29 10: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 배길몽의 ‘지피지기’ 23

필자는 공자의 도덕주의를 존중하고 노자의 자연주의를 좋아한다. 그런데 노자의 자연주의 철학을 담아놓은 도덕경을 제대로 해석하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말했다. 그 말은 공자가 아직 도를 얻지 못했다고 자백한 것이다. 그런데 노자는 자기가 마치 도를 아는 것처럼 도덕경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도덕경을 저술했다고 도를 아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노자가 도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도덕경을 저술한 것이 아니라 제자백가가 도를 안다고 떠드니까 그들에게 일침을 놓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노자가 자발적으로 도덕경을 저술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저술한 것을 봐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노자가 정말로 도를 얻었다면 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도를 세상에 널리 알려야지 왜 감추고 산속으로 들어가려고 했겠는가? 그런데 학자들은 노자가 도를 획득했다고 가정하고 도덕경을 해석하려고 하니까 도덕경 첫머리에 나오는 ‘도가도 비상도’라는 구절을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라는 엉터리 해석을 하게 된다. 도가도 비상도는 ‘지금은 도라고 할 수 있어도 상도(변함없는 도)는 아니다.’라는 뜻이며 이 말은 도의 가변성(비상도)을 말했지만 은연중에 노자 자신도 아직은 진정한 도(상도; 변함없는 도)를 얻지 못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경을 제대로 해석하려면 제일 먼저 도덕경 제1장의 제목이 '도'가 아니고 '명'인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인식은 ‘명’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표현되므로(명은 ‘사물에 대해서 인간이 설정하는 관념’이며 언어를 통해서 그 관념이 표현되고 상대에게 전달된다.) ‘명’을 먼저 올바르게 이해해야 ‘도’에 이를 수 있다. ‘명’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도’를 깨우칠 수 있기 때문에 노자가 ‘도’보다 먼저 ‘명’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도덕경을 논하기 시작한 것이다. 철학자와 성직자를 포함해서 우주의 원리를 깨우치려는 모든 수행자들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언어에 붙들려서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철학은 언어에 붙잡히고 과학은 수학에 매달리므로 철학은 개똥철학이 되고 과학은 공상과학이 됐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그런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해서 만든 것이며 실체를 확인하고 만든 것이 아닌데 종교인들은 그런 언어에 빠져서 제자리를 맴돌고 있고 과학자들은 인위적으로 만든 수학으로 모든 자연을 설명하려고 함으로써 오류를 자초하고 있다.

노자가 도덕경 1장에서 모든 사물의 요(외형적 모습; 하드웨어)와 묘(내면적 성질; 소프트웨어)는 같은 근원에서 나오는데 그 근원을 ‘우현’이라고 말했다. 우현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암흑을 말하며 암흑은 알 수 없음 즉 불가지성을 말한다. 그런데 도덕경을 해석하는 학자들은 노자가 도를 얻었다고 생각하므로 우현을 글자 그대로 ‘알 수 없음’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알 수 없는 신비’라고 해석한다. ‘알 수 없음’은 단순히 무지를 나타내지만 ‘알 수 없는 신비’는 알지만 표현하기 어려움을 말한다. 흔히 사이비 도사들이 진정한 도를 얻지 못했으므로 도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도는 남에게 설명할 수 없고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라고 얼버무리는 것과 같다. 분명한 도를 알았다면 알기 쉽게 설명해야지 왜 ‘알 수 없는 신비’라고 얼버무렸겠는가?

중국인들의 철학이 담겨있는 천자문의 첫 줄에 천지현황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늘은 검고 땅은 붉다는 뜻이다. 필자는 그 글을 보고 소년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했고 수십 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이해했다. 하늘이 푸르다는 것은 빛의 산란에 의해서 일으키는 지구인들의 착각이고 지구 밖에서 보면 하늘(우주)은 검다. 그리고 우주의 95%가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로 되어있으며 그로부터 모든 것이 나온다는 것을 최근에야 이해했다. 만약에 노자가 우주의 근원을 암흑이라고 한 것이 우주의 근원은 암흑물질로 되어있다는 의미로 사용했다면 노자의 선견지명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노자가 과학 지식이 거의 없던 옛날에 암흑물질을 미리 알고 우주를 암흑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노자가 말한 우현(암흑)은 우주의 근원은 알 수 없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 제1장에서 현상의 불확정성을 주장했고 근원에 대한 불가지성을 논했다. 우주의 근원은 인간의 지혜로는 알기 어렵고 세상의 모습은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가변성을 가지므로 확정돼있지 않다고 했다. 노자는 도덕경의 첫 페이지에서 도란 무엇인가를 논한 것이 아니라 만물(우주)의 생성과 변화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의 불확정성과 근원의 불가지성을 말하면서 도를 깨닫기 위해서 취해야할 구도자의 자세를 언급했다. 그리고 노자가 현상의 불확정성(제행무상)은 파악했지만 근원의 불가지성을 주장한 것을 보면 부처님이 깨달은 근원(제법무아)은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노자가 도덕경 56장에서 지자의 도(처세법)는 ‘현동’이라고 하는데 학자들이 이 말의 의미를 잘 몰라서 그 다음 구절들을 이상하게 해석한다. 낮에는 사물의 모양이나 색깔이 잘 구분되지만 어두운 밤에는 모두 새까맣게 똑같아서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을 현동이라 한다. 그러므로 현동의 의미는, 진정한 지자는 겸손해서 일반인과 완전히 동화되므로 밤중에 물건들이 구분되지 않듯이 지자도 일반인들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결국에는 제자백가들처럼 잘났다고 떠들지 않고 조용하게 침묵하며 은둔하는 노자 자신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지자는 자신을 낮추고 세상(타인)을 귀하게 높인다고 했다. 그런데 학자들은 이 구절을 지자가 천하의 귀한 존재가 된다고 역으로 해석한다. 예수가 낮은 데로 임하듯이 지자도 자신을 낮추어서 세상을 높이는 것이며 노자 자신이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을 안다면 학자들의 해석이 잘못됐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지자는 현동(침묵)이라고 말한 이유는 지식을 뽐내는 제자백가들의 언행을 비난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자신도 우주의 원리를 터득하지 못했으므로 겸손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자가 진정으로 도(우주의 원리)를 깨달았다면 현동(침묵)할 것이 아니라 진리를 세상에 밝혀서 올바른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수천 년 전의 노자는 과학지식이 부족해서 근원의 불가지성과 현상의 불확정성을 주장했지만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도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정치가와 종교인 그리고 철학자들이 올바름에 대해서 갑론을박하면서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서 노력했다. 그런데 사실은 이제 갑론을박할 필요가 없어졌다. 왜냐하면 노자가 말한 것처럼 도(우주의 원리)가 비상도(가변성의 도; 상대성이론)가 아니라 상도(변함이 없는 도; 통일장이론)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은 대부분 얼굴이 밝다. 남들은 천국(극락)에 못 갈지라도 자신은 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마음이 편해서 그렇다. 세상은 혼탁하고 남들은 천당(극락)에 못 가는데 자신만 갈 수 있다고 기뻐서 얼굴이 밝은 성직자가 과연 올바른 성직자인가? 그리고 지구 곳곳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은데 부와 권력을 탐내면서 얼굴에 윤기가 흐르는 성직자가 과연 올바른 성직자인가? 그런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대로 천당을 상상해보면, 천당은 춥거나 덥지도 않고, 배고프거나 병들지도 않으며, 공부나 일을 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아무 할 일도 없고, 변화도 낭만도 없고, 결국은 꿈도 희망도 없는 곳이다. 그런 지루한 곳이라면 면벽좌선으로 9년간을 수행한 사람도 거기에서 10년을 견디기는 힘들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며칠만 계속해서 먹으면 질린다. 아무리 좋은 일도 같은 일만 계속 반복 된다면 그곳은 천당이 아니라 지옥과 다름없다.

임금이나 대통령과 같이 모든 사람이 욕심내는 자리도 매일 같은 일만 반복된다면 아마 누구도 오래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그 자리를 내려 올 것이다. ‘살아있음’의 특징은 ‘변함’이다. 변하지 않고 항상 같으면 그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며 설혹 식물인간과 같은 삶으로 영생을 유지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예수가 누가복음 24:39에서 영혼은 뼈도 살도 없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영혼에게는 오장육부는 물론 인식기능을 가진 신경도 없을 것이며 따라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입이나 아름다운 경치를 볼 눈 그리고 좋은 음악을 들을 귀도 없는데 그런 존재가 천당에서 지낸다고 무슨 행복을 느끼겠는가?

성경에 보면 천국은 금은보화로 가득 찬 곳으로 돼있다. 물리학적으로 보면 물질인 금은보화가 영적인 하늘나라에 있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설혹 물리학적으로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금은보화는 세속적인 인간세계에서는 가치 있는 물질이지만 물질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영적인 하늘나라에서 그것을 왜 쌓아두고 있겠는가? 정말로 천국에 금은보화가 많이 있다면 천국에 너무 많은 금은보화를 쌓아두었기 때문에 반대로 지구상에는 금은보화가 모자라서 귀한 물건으로 둔갑하고 가격이 폭등하게 된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논리가 성립된다..

천국이 금은보화를 불공정하게 매점매석해서 독과점 하면서 성경에는 금은보화(재물)를 탐내는 자는 천국에 못 간다고 역설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좋아하는 금은보화를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것을 싫어해서 못 가지게 하는 걸까? 사실은 예수가 말하는 천국은 하늘나라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말하므로 금은보화가 실제로 있을 수 있는 것이며, 예수가 한 유명한 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라는 말은 금은보화를 아끼면서 예수 자신에게 헌금(정치자금)을 내지 않으면 개국공신이 되지 못하고 벼슬도 못하게 된다는 말에 불과했다.

만약에 내세가 실제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현세의 행복은 여전히 중요하며 그러한 관점에서 성경을 다시 해석해보자. 예수가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등 여러 설교에서 여호와에 관한 일보다 사람과의 일을 더 강조한 이유는,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샌다는 말처럼, 지상에서 화평에 대한 예비 훈련이 돼있지 못한 자는 하늘에서도 화평하게 지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화평하지 못한 자는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구원(영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내세가 없다면 당연히 현세에 충실해야 하고, 설혹 내세가 있더라도 현세에서 먼저 행복해야 하고 또 현세에서 행복에 길들여지지(훈련되지) 않은 사람은 내세에서도 행복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것임을 깨달아야한다. 훈련되지 않은 병사가 실전에서 잘 싸울 리가 없고,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학생이 시험을 잘 볼 리가 없는 것과 같다. 현세에서의 행복(화평)은 내세의 행복(영생)을 이루는 필수 조건이다.

1년에 수백 개의 교회가 문을 닫으므로 교회를 담임하지 못하는 목사가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그들이 교회를 세울 때에는 누구나 기도해서 응답을 받고 교회를 세웠을 것이 분명한데 오래 버티지 못하고 교회를 폐쇄한다는 것은 그들의 응답이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망을 기도의 응답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교회나 기업은 실패할 확률이 같으며 10에 7, 8할은 망하거나 영세하다. 교인이나 일반인들이 교통사고나 암으로 죽을 확률도 같다. 교회나 교인이라고 하나님이 특혜를 주는 것은 없다.

지구에서 하루에 30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데,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그들의 대부분은 지옥으로 가야한다. 하나님이 공개적으로 올림픽이나 월드컵 개막식장에 한번만 나타나준다면 모든 지구인들이 기독교인이 돼서 천국으로 갈 수 있는데 하나님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일을 하지 않고 있을까?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자신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지구 방문)도 하지 않으면서 반대로 자녀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하나님에 대해서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믿는 일과 하나님을 위해서 순교하는 일)을 하라고 요구한다.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의심이 든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성폭행을 당한 어린 소녀나 식물인간으로 의식불명인 여자 환자에게 어떻게 임신을 하게 만들겠는가?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지진, 태풍, 대형 조난사고, 그리고 전쟁과 테러로 수백만 명이 몰살당할 때에 생명을 구해달라는 그들의 애절한 기도를 들어주지 않고 모두 사망하도록 방치했겠는가?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시련들을 논리적으로 분석해보면 하나님은 무능하거나 악하든지 둘 중의 하나여야 하고 그것이 아니라면 아예 존재하지 않아야 옳다.

필자는 이 세상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은 그런 무능력한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천당에 가고 싶은 생각도 없고, 지구를 고해라면서 내팽개치고 탈출해버리는 수도승들이 모여 사는 극락에도 가고 싶지 않다. 그리고 아무런 변화도 없는 천당(극락)에서 특별히 할 일도 없이 마치 식물인간처럼 영생하는 것보다 조금 힘들더라도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서로 웃고 울 수 있는 지구에서의 삶이 더 좋다.

생로병사는 고해가 아니라 삶의 고귀한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아름다운 굴곡이라고 생각하라. 음식이 무한대로 그리고 무료로 공급된다면 음식의 소중함을 알 수 없듯이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역으로 소중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런 걱정도 변화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삶의 소중한 가치를 어찌 느끼겠는가? 맛있는 음식도 못 먹고 사랑하는 사람과도 이별해서 살아야 하는 곳이 어찌 영생할 만한 천당(극락)이란 말인가? 필자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한 번 더 지구에서 태어나서 이번 생에서 못 다한 일들을 계속 추진하면서 살 수 있기를 기도한다.

[기사제보 cetana@gmail.com]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제보 newsrep21@gmail.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