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문명의 상호연관성: 한국의 불교
동아시아 문명의 상호연관성: 한국의 불교
  • 로버트 버스뤨
  • 승인 2009.05.27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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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2009포스코아시포럼 기조연설문


이 논문은 포스코 청암재단이 5월 20일 개최한 "아시아 사회의 다양성과 상호 보안성"을 주제로 열린 <2009 포스코아시아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한 로버트 버스웰 박사의 강연 전문이다. 청암재단의 도움으로 전문을 게재한다.(편집자 주)

로버트 버스웰 박사 (Robert Buswell, Ph.D.)
UCLA대학교 아시아학부 교수 겸 학장

대부분의 지역학이 그렇듯이, 아시아학도 여전히 국가중심 구조를 갖고 있어, 보다 설득력 있고 중대한 분류법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학계는 한국학, 중국학, 일본학 또는 인도학 등 국가별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국가중심 접근법이 아시아학 교육과 저술 모두에 깊이 뿌리 박혀 있어 그 타당성에 대해 고민해 보는 일조차 드뭅니다. 대신 우리 학자들은 신성한 국가적 전통, 주변국과의 다원적 수준의 상호작용 및 상호의존관계를 수반하는 문화적 현상, 다양한 행위자 및 대리자들 간의 일련의 복잡한 정체성 등을 구체화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런 국가중심 연구관행은 전근대 및 근대의 아시아권 문화와 사회들이 갖는 다양성과 공통된 속성에 대한 학계의 의식을 제한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불교학과 한국학 모두를 연구하는 학자인 저는 오늘, 한국의 영향이 어떻게 중국, 일본, 티베트 불교의 국가별 전통의 형성을 촉진했는지를 폭넓게 살펴봄으로써 『2009 포스코아시아포럼』의 주제인 “아시아 사회의 다양성과 상호 보완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해 보고자 합니다.

불교가 인도아대륙으로부터 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된 것은, 약간의 과장을 보탠다면, 세계 최초의 세계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장 대품(Mahāvagga)》에는 기원전 6세기 혹은 5세기에 불교 교단이 형성된 직후 붓다가 그의 제자들에게 지시했다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옵니다: “비구들이여, 가라! 많은 사람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세상에 대한 자비심으로, 인간과 하늘에 있는 존재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이에 따라 서쪽의 카스피 해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는 중앙아시아의 초원, 동쪽으로는 일본 열도, 남쪽으로는 인도네시아 군도에까지, 세계 종교사에서 가장 위대한 전도로 손꼽히는 천 년 불교의 전도가 시작됩니다. 주로 아시아의 지리적, 문화적 지역들 사이로 오래 전에 형성된 교역로를 따라 전파된 불교는 기원후 1세기경 중국에 전래되었고 그 후 몇 백 년 이내에 동아시아 전역으로 뻗어갔습니다. 현대에는 미국과 유럽에서도 상당한 교세를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꾸준히 동방으로만 전파되었다는 설명은 불교 전법사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 큰 흐름에서 중요한 ‘소용돌이’ 또는 ‘역류’가 생겨나 근원지로 되돌아 가는 현상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동아시아 발달사에 있어 중국이 문화•정치적 구심점 역할을 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불교의 발달도 중국 본토에서 시작되어 불교가 융성했던 기타 한자문화권으로 전파되었다고 가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중국 불교 특성의 혁신적 요소 중 상당 부분이 동아시아의 변방에서 시작되어 중국 본토로 흘러 들어간 것입니다. 이러한 ‘역류’가 인접지역의 전통에 다양한 방식으로 심대한 영향을 미쳤을 수 있습니다.

사실, 전체 불교의 “중국적” 전통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는데 있어 동아시아의 “변방지역”, 즉 일본, 베트남, 티베트, 특히 한국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저의 확신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중국 불교의 성장을 촉진했던 힘들이 대다수 한국에도 작용하고 있었고, 한문으로 된 한국의 경전 및 주해서가 종종 중국의 것보다 동아시아 전역에 더 큰 영향력을 갖고 보급되었습니다. 제가 제안하는 동아시아 불교전통의 유기성을 고려할 때, 중국 중심부로 전해진 그 같은 “변방”의 창작물들은 중국의 중심부로 전해져 자국의 창작물들과 마찬가지로 쉽게 수용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국의 경전 주해서와 관련해 그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불교전통들 사이의 계통을 고찰할 때, 우리는 늘 해오던 것처럼 중심에서 주변으로 살펴 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중심으로 살펴 들어오기도 해야 합니다. 특정 지역의 불교가 동아시아 전체 불교에 끼칠 수 있는 다른 종류의 영향을 보여주기 위해 한국의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한국 불교가 동아시아에 끼친 영향의 패턴을 살펴봄으로써, 한국을 단순히 불교와 중국문화를 일본열도로 전해주는 “교량”으로 보는 학계의 전통적 견해도 넘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같은 학계의 오랜 일본중심적 견해는 오래 전에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고, 종국에는 완전히 불식되어야 합니다. 사실, 초기 불교 전파는 대부분 중국에서부터가 아닌, 한국으로부터 직접 이루어졌습니다. 초기 일본 불교에 미친 한국의 영향만큼이나 덜 알려진 것이 바로 중국으로 간 한국 승려들이 중국의 몇몇 불교 종파에 끼친 영향입니다. 한국 불교는 시추안성이나 티베트같이 한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국은 단순한 “교량”이 아니라, 전체 불교전통의 발달에 중대한 역할을 했을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보루였습니다.

불교의 동방 전파에 있어서 한국의 역할

일찍이 한국을 찾았던 서양인들이 붙여 준 “은자(隱者)의 나라”라는 유감스러운 명칭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역사를 통틀어 결코 인접국들로부터 소외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한국은 기원 전후 무렵부터 중국문화권의 뗄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중국문화의 한반도 침투는 승려들의 포교활동에 의해 가속화 되었는데, 이들 승려들은 교리나 의식뿐만 아니라 폭넓은 중국의 지적 문화도 한국에 들여왔습니다. 한국인들의 한문에 대한 지식과, 궁극적으로 유교철학, 문학, 역학, 점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중국 저술에 대한 친밀도를 높이는데 상당 수준 기여한 것이 바로 방대한 양의 경전을 갖고 있는 불교였습니다.

한국은 불교와 중국문화의 동방 전파에 필수 불가결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한반도의 승려, 기술자, 장인들이 불교를 포함한 일본문화의 발달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9세기 서구 문화와의 조우와 더불어 일본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 바로 한국의 고대 왕국이었던 백제가 일본열도에 불교문화를 전파한 것이었습니다. 6세기 중반부터 7세기 후반까지 최소한 한 세기 동안, 백제의 영향이 일본의 문화 생산을 지배했고, 일본 불교 전파의 주류를 형성했습니다.

백제의 학자들은 유교 고전, 불교 경전, 그리고 의술을 일본에 전했고, 기술자들은 중국 사찰 건축양식, 축조술, 심지어 재봉술까지 소개했습니다. 7세기 초 대승 삼론종의 대가로 알려진 백제의 승려 관륵(觀勒)은 역학, 천문학, 기하학, 점술, 수비학 관련 문헌을 전해 주었습니다. 한국 승려들은 또한 일본 승단 체계를 세우는데 절대적인 도움을 주었고 승단의 첫 관리직을 맡기도 했습니다. 일본 비구니 승단도 6세기 말, 백제에서 3년 동안 율장을 배운 세 명의 비구니를 포함하여, 백제에 유학을 온 일본 비구니들이 들여온 한국의 영향으로 성장했습니다.

7세기 말경 중국 본토에서 일본으로 문화가 직접 유입되어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였지만, 그 후에도 가마쿠라 막부 시대(1185~1333)에 강력한 한국의 역류가 재등장했으며, 이는 호넨(法然, 1133~1212), 그리고 특히 신란(親鸞, 1173~1262)의 정토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신란(親鸞)은 선대 중국 논사인 담란(曇鸞, 476~542)과 선도(善導, 613~681)를 제외하면 7세기 한국의 불교 주석가인 경흥(憬興, 생몰년도 미상)을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신란(親鸞) 이전의 정토 관련 저서들에 관한 광범위한 연구들을 살펴보면, 그 또한 원효(元曉, 617~686), 법위(法位, 생몰년도 미상), 현일(玄一, 생몰년도 미상), 의적(義寂, 생몰년도 미상) 등 통일신라 초기 사상가들의 저서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이 드러납니다.

중국 등지의 불교에 끼친 한국의 영향

근대 이전 한국의 승려들은 중국 불교의 학문적, 수행적 중심지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었음에도 대개는 본토의 사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만주를 가로지르는 육로가 한국과 북 중국을 가깝게 묶어 주어 한반도와 대륙 간의 친밀한 외교적, 문화적 관계가 성립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4~7세기)와 통일신라(668~935) 시기의 한국은 동아시아의 페니키아와 같은 존재였으며, 그들의 항해술과 잘 정비된 해로덕분에 한반도의 항구들은 지역 상업의 허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승려들은 비교적 수월하게 중국으로 떠나는 상단과 함께 중국으로 가, 그곳 승려들과 함께 수행, 정진할 수 있었습니다. 9세기 중엽 중국에 있던 일본인 순례자 엔닌(円仁, 793~864)은 당나라 수도 장안에 있던 외국인 승려들 가운데 한국 유학승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중국 동부 연안을 따라 치외법권과 자치행정권을 갖고 있는 한국인 집단거주지역들이 형성되어 있음을 기록한 바 있습니다. 이들 한인 지역에는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다수의 한국 승려와 상인들을 위한 민족적 구심점 역할을 했던 사찰이 건립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의 발길은 중국을 넘어 불교의 발원지인 인도에까지 미쳤습니다. 인도로 순례를 떠났던 한국 승려들 중 가장 잘 알려진 분이 혜초(慧超, 720~773)입니다. 그는 8세기 초, 해로를 통해 인도로 건너가 인도아대륙 전역을 순례한 후 727년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동아시아 지역의 전 문화권에 걸친 활발한 교류를 통해, 한국의 독자적인 불교 사상들(역시 한문으로 쓰여졌습니다)이 중국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티베트에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중국과 한국의 저술은 특히 빠르게 기타 지역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에 동아시아 전역의 학자들은 중국과 한국 학자들이 만든 진전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승려들은 의상(義湘, 625~702), 원효(元曉, 617~686), 경흥(憬興, 7세기경)과 같은 신라 승려들이 쓴 논서와 주해서를 높이 평가했고, 이들의 식견이 중국 화엄종의 체계를 잡은 법장(法藏, 643~712)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제 초기 저서인 《중국과 한국 선종의 형성 (The Formation of Ch’an Ideology in China and Korea)》에서 저는 한국의 초기 선승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믿어지는 위경인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Vajrasamādhi-sūtra)》이 선불교의 가장 오래된 저술 중 하나임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금강삼매경》은 보리달마로부터 중국 조사들로의 선형적 선의 전파, 즉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심심상인(心心相印)” 전수법이 등장한 최초의 문헌입니다. 심심상인 전수법은 선종의 독립적 정체성의 발달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금강삼매경》은 저술된 지 50년도 되지 않아 중국으로 전파되었는데, 그 곳에서는 그 기원이 완전히 가려진 채 세린디아 지역 경전을 원전으로 한 번역서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이후에 중국과 티베트에까지 소개됩니다. 이 같은 중국, 한국, 일본, 그리고 기타 인접국 불교 전통 간의 원활한 교류를 저는 “동아시아” 불교 전통으로 칭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각국의 불교 전통을 합한 것을 넘어서는 개념입니다.

또한 한국 승려들은 중국을 자주 방문하는 순례자들이었으며 중국 본토 불교의 활발한 참여자였습니다. 이들 대다수가 한반도로 귀환했으나 일부는 중국에 상당기간 잔류해 중국 불교 종파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몇몇 사례를 들어 보면 중국과 한국의 영향이 얼마나 폭넓고 다양하게 미쳤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 불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최초의 한국 승려로 알려진 사람은 고구려의 승랑(僧朗, 대략 490년대에 활동)입니다. 그는 인도의 중관학파와 대응되는 중국 삼종론의 선구자로 전해 오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민족성과 중국 불교에 대한 기여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사실, 승랑이 요동출신 중국 조상을 두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논란이 덜한 사례가 중국 법상종((法相宗, Yogācāra School) 발전에 기여한 신라 승려 원측(圓測, 613~696)입니다. 원측은 중국 당대 최고의 역경승이었던 현장(玄奘, 664년 입적)의 두 수제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유골은 서안에 있는 현장탑에 스승 현장과 함께 봉안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원측은 한국이나 중국에서보다는 티베트에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이는 현지에서 “위대한 중국 주해서”로 알려진 그의 대표 저서 proselytists 때문입니다. 원측의 저서는 중국 변경인 둔황에서 엄청난 사랑을 받았고, 국왕 랄파첸(재위 815~841)의 명으로 법성(法成, Chsgrub, 775~849)에 의해 티베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로부터 500여 년 후, 저명한 티베트 학자 총카파(1357~1419)는 티베트 불교의 교리 전통을 개혁하는데 원측의 저술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삼전법륜(三轉法輪)에 대한 해석 방법, 아홉 가지 식(識)의 모습, 아홉 번째 식인 '청정식(淸淨識amalavijāna)'의 성질 등이 티베트에서 형성됨에 있어 원측의 견해는 결정적이었습니다. 티베트 불교의 모든 주요 학파들이 사용했던 해석학적 기술, 즉 정교하게 구분된 장과 절을 사용하는 방식 또한 원측의 주해 방식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후 송대(宋代)에는 제관(諦觀, 971년경 사망)이 빈사 상태이던 중국 천태종을 부흥시켰고, 천태종의 교리적인 분류에 대한 결정적인 논서인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저술했는데, 이 책은 “중국” 불교 고전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기타 몇몇 한국 승려들도 송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천태종에 깊이 관여했는데, 여기에는 고려의 왕자이자 승려이면서 서적 수집가였던 의천(義天, 1055~1101)도 포함됩니다.

이러한 중국 불교와 한국 불교의 만남은 중국 문화권 내 선불교 전통을 보면 특히 명확해집니다. 서남쪽의 미개척 지역이었던 쓰촨성을 본거지로 한 정중종(淨衆宗)과 보당(保唐宗)이라는 두 초기 선종 학파가 있었습니다. 이 두 종파는 모두 자신들의 조사가 한국의 선사 무상(無相, 684~762)이라고 주장했는데, 고향 한국의 성씨를 그대로 사용한 김화상(金和尙)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무상은 선종의 모든 가르침을 계(戒)에 해당하는 무억(無憶), 정(定)에 해당하는 무념(無念), 혜(慧)에 해당하는 막망(莫妄)이라는 세 구절로 축약하였던 인물입니다. 그의 입적 이후에도 무당의 가르침은 종밀(宗密, 780~841)과 같은 선종의 유력한 학자들에 의해 계속 면밀하게 연구되었습니다.

한국 불교의 자기 정체성

한국 출신 승려들이 한자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들이 중국인이 아니라 변방 국가 출신이라는 사실을 가끔 망각하게 됩니다. 중국의 영향력 있는 한국 출신 승려들은 철저히 중국화 되었지만 (한반도의 동료들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는 등) 한국 출신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일례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의상(義湘)은 스승 지엄(智儼)이 입적한 후 중국 화엄종의 차기 수좌 자리가 유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국의 왕에게 중국이 침략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리고자 670년 귀국했습니다. 중국의 침략은 무마되었고, 의상은 그 보답으로 왕실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게 되어 그 이후 화엄종이 한국 불교계를 지배하게 됩니다. 의상의 후임자인 중국 화엄종의 법장(法藏, 643-712)은 의상이 귀국한 한참 이후까지도 계속 서신을 보내 조언을 구했고, 의상의 답신이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들 한국 승려들이 중국 불교에 동화되었다 해도 그들의 민족성은 종종 사회적, 종교적 정체성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지속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무상이라는 승려가 당대 사람들에게 ‘김화상’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던 사실은 조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중국 내륙지역에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민족적 유산에 대한 인식을 잃지 않고 있었음을 명백히 입증하는 것입니다. 원측이 경쟁자였던 중국 승려 규기(窺基, 632~682)의 추종자들이 벌인 흑색선전과 그에 의한 격렬한 반대 여론을 물리치고 현장의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 것은 아마도 한국 출신 학자에 대해 인종적 편견이 싹트는 것을 막은 것이기도 하겠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는 원측이 한국 출신 승려라는 것이 중국인들에게 문제가 되었음을 시사한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중국화된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한국인들의 중국 불교 승단 내 왕성한 활동이 한국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아시아문학의 국가중심주의를 넘어서

한국 승려들은 어떻게 한국인의 특색을 유지하면서도 지리적, 역사적으로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들이 자신을 ‘한국’, ‘일본’ 또는 ‘중국’과 같은 특정 국가의 승려로 생각하기 보다는, 근대적인 국가나 시대라는 개념을 넘어선 보다 큰 종교적 전통에 있어서의 조력자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 승려들의 자아 인식은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근대 역사의 축소된 상상력 (the shrunken imaginings)”으로 표현했던 ‘국가주의’보다 넓은 개념이었습니다. 전근대 한국 승려들은 스스로를 ‘한국의’ 승려라기 보다는 어떤 법맥(法脈)이나 학파, 또는 수행 전통의 일원으로 생각했던 경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어떤 명칭으로 칭하고자 했다면, 그것은 “한국의 승려”가 아니라 그 역사가 6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다양한 《고승전(高僧傳)》에서 발견되는 승려 분류법에 따른 ‘역경(譯經)’, ‘의해(義解)’, ‘습선(習禪)’, ‘명율(明律)’, ‘호법(護法)’ 등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분류법은 (중국의 ‘한국 승려’나 ‘일본 승려’ 같은 범주가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국경과 문화의 경계를 초월하는 것이었고, 중국의 고승전들은 큰 분류 아래에 작은 분류로써 ‘한국 승려’, ‘인도 승려’, ‘아시아 내륙 승려’, ‘일본 승려’ 등의 범주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승전에서 특정 승려가 “신라 승려” 또는 “해동의 현자” 등으로 언급되었다 해도 그들의 주된 분류는 ‘습선(習禪)’, ‘명율(明律)’ 등이기 때문에 “X의 역경(譯經)”, “Y의 의해(義解)”, “X의 호법(護法)” 등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민족적, 지역적 정체성, 조국 및 군주에 대한 충성, 종파 및 법맥과의 관계 등을 인식하고 있음과 동시에, 전근대 불교 승려들은 공간적, 역사적으로 인도와 붓다로 소급되는 가르침(dhama)의 전세계적 전파에 참여하고 있는 일원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각을 갖고 있기에 불교인들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모두 먼 기원을 가진 불교라는 종교적 전통에 적극 동참해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근대기의 동아시아인들은 불교를 사상, 수행, 깨달음이 태고의 순수함을 갖고 있는 범우주적인 종교로 여겼습니다. 이 때문에, 각각 불교 본래 모습이라고 주장하지만 종종 서로 정반대로 보이는 불교의 문헌들과 수행법들이 사실은 큰 천 하나에서 떨어져 나온 각각의 조각천과도 같이, 일관성 있는 수행체계에서 파생된 일부분들임을 설명하기 위해, 해석학적 분류법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범우주적 불교 전통이라는 시각이 “한국”, “중국”, “일본” 그리고 심지어 “인도”의 불교라고 하는 구체적 개념과 함께 공존했습니다. 우리 학자들이 역사를 통틀어 아시아의 다양한 불교 전통이 갖는 문화적 다양성을 보다 미묘하게 설명하고자 한다면, 단순한 국가중심적인 접근법을 버리고 불교인들이 결코 버리지 않았던 불교에 대한 광의적 시각에 학문적 관심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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