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스님의 맑은 바람 드는 집
흥선스님의 맑은 바람 드는 집
  • 불교닷컴
  • 승인 2009.07.14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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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들의 발걸음 사로잡는 인터넷 공간, <맑은 바람 드는 집>

 

구름도 쉬어가고 바람도 자고 간다는 추풍령 아래의 큰절 직지사. 이 절의 박물관 홈페이지에는 적지 않은 마니아들의 발길이 꾸준하다. 그 ‘눈걸음’의 목적지는 <한시 한 소절>이다. 여기에는 지난 7년 반 동안 한 달에 두 차례, 보름에 한 번씩 꼬박꼬박 업데이트된 한시와 그에 부친 짤막한 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이곳에서는 자연을 부르는 맑은 바람 소리가 들려오고, 옛 선비를 만나는 듯 인문의 향기가 은은히 피어오르며, 낮은 곳을 향한 따듯한 시선이 느껴지고, 계곡물처럼 계절 따라 흐르는 산사의 잔잔한 일상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한 수행자의 조촐한 몸짓이 그려진다.

 

그 때문에 이곳은 오래된 글 꼭지일수록 조회수가 늘어나는 ‘기이한’ 인터넷 공간이 되었고, 어느덧 시간의 흐름에 비례하여 꾸준히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마니아들의 사이버 공간이 되었다. 마치 달고 시원한 물이 솟는 작은 샘처럼, 이렇게 떠들썩하고 요란스럽지 않게 마니아들을 불러 모으던 글들이 가려지고 정리되어《맑은 바람 드는 집》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오프라인으로 나왔다. 제목은 한때 학승들이 지혜의 칼을 벼리던 곳으로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인 <淸風寮청풍료>를 우리말로 옮긴 것. 동시에 그것은 직지사 박물관 홈페이지의 게시판을 아우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일상과 자연과 인문의 향기, 그리고 낮은 곳을 향한 조용한 시선

저자가 이 책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전하는 방법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한시이다. 날씨와 계절에 맞게 고른 한시 한 수에 넌지시 자신의 소회를 얹어 일기처럼 자신의 일상이나 계절의 변화에 감싸인 자연의 모습을 전하기도 하고, 담담하고 나지막하게 하고픈 말을 대화하듯 풀어놓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한시와 관련된 여느 책과는 지향하는 바가 사뭇 다르다. 한시를 다루는 책은 보통 한시를 소개하고 풀이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거나, 한시를 미학적·문학적·역사적으로 탐구하는 일을 중심에 두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한시가 유일한 중심은 아니다. 오히려 한시라는 징검다리를 통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저자의 의도가 아닐까 싶을 만치 저자의 짤막한 에세이들은 어떤 결을 지니고 있으며 단단하다. 말하자면 자신의 생각을 한시라는 프리즘을 통해 여러 빛깔로 변주하여 보여주고 있는 책, 저자 나름의 독특한 한시 읽기를 시도하고 있는 책이《맑은 바람 드는 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저자가 한시를 매개로 풀어놓는 생각의 빛깔들은 어떤 것일까? 우선 거기에는 계절과 자연과 일상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맑은 감성이 있다. 그래서 한 토막 글 속에 때로는 “매화와 수양버들이 점벙점벙 봄 강을 건너고” 있기도 하고, 때로는 “기도하는 스님의 목탁소리에도 차분차분 눈이 쌓이고, 법당을 새어나온 향 연기에도 눈 냄새가 사륵사륵 배어들고 있”기도 하다.  “꽃도 향기도 물론 좋지만, 그 향기와 꽃을 기다리는 설렘과 조바심도 그런대로 견딜 만합니다.”는 고백이나 “겨울산은 하얀 침묵” 혹은 “길섶 코스모스 무더기는 낮에 뜬 은하수”라는 표현에 담긴 감성은 어떤가? “죽은 채우기가 아니라 비우기를 가르치는 음식”이라는 통찰이나 실내도 실외도 아니어서 일종의 전이공간인 마루를 두고 “마루는 자유”라고 단언하는 것은 또 어떤가? 이처럼 저자의 글에는 풀매고, 예불하고, 글 읽는 산사의 일상과 분리되지 않는 자연이 있고, 계절의 흐름이 있으며, 그 모두를 떠받치고 있는 소박한 감흥이 있다.

이 책에서 또 하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옥잠화 향기처럼 낮게 깔리는 인문의 향기이다. 저자는 수좌首座들 떠난 선방禪房의 늙은 회화나무[槐] 한 그루를 보며 문득 우리를 멀리 한대漢代의 장안성에 있었던 ‘선비들의 시장’―괴시槐市로 안내하기도 하고, 대숲을 얘기하며 <양죽기 養竹記>나 <식죽기植竹記>를 곁들여 대나무에 담긴 인문정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적절한 곳에 한시의 한 구절이 천연스레 얼굴을 내밀거나 고전의 한 토막이 배치되어 있어서, 실은 저자의 글쓰기 그 자체가 상당히 문기文氣어린 양상을 띠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저자의 목소리 속에 섞여 들리는 옛 선비의 숨결을 어렵잖게 느낄 수 있다. 절집 수행자의 면모로는 다소 뜻밖이랄 수도 있는 이런 인문의 향기가 이 책에서 곳곳에 배어 있음은 분명하고, 아무튼 그것이 이 책의 매력임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책 속에서 저자의 시선이 주로 머무는 곳이 절집과 그 속에 이루어지는 잔잔한 일상이며, 또 그 속에 바라보는 계절과 자연의 변화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저자는 바로 그런 산사를 둘러싼 자연의 변화와 일상의 흐름 위에 넌지시 세상을 향한, 그 가운데서도 일하는 사람들이나 불우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뒤섞기도 한다. 이를테면 우연히 장구경을 하게 된 저자가 봄나물, 꽃모종, 묘목, 딸기 따위를 파는 사람들을 “봄을 파는 사람들”이라고 찬사를 보내는 눈길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으며, 우리들 누구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찹쌀떡 장수에 대해서도 그 떡 팔던 소년 역시 우리처럼 추운 겨울밤이 아름다웠을까, 묻는 데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세상에는 콩죽 같은 땀을 흘리며 제 집에 얹지도 못할 기와를 굽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신은 “열 손가락에 진흙 한 점 묻히지 않으면서 으리으리한 기와집”에 살고 있음을 미안해하는 마음이나, 큰 쥐[碩鼠]로 비유되는 사람들에게 은근한 야유를 보내는 심사도 실은 낮은 곳을 향하는 저자의 시선과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굳이 ‘천한 노비’였던 유희경劉希慶의 시를 고르고 그에 관한 일화를 자신의 말 한 마디 보태지 않은 채 소개하는 생각의 언저리 또한 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종교인으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이런 시선이 오늘 우리 현실에서는 흔치만은 않다 보니 자못 새삼스럽고 반갑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시―신중히 선택된 또 하나의 중심

앞에서 한시는 저자의 속내를 드러내기 위한 징검다리 혹은 프리즘이라고 했지만, 이 책에서 한시의 기능이 그 정도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공정하게 말한다면 한시는 저자가 붙인 글과 정확히 평형을 이루고 있어서 낱낱 글의 두 중심 가운데 하나이다. 이 점은 저자의 한시 선택과 번역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언뜻 보면 이 책에 실린 한시들을 예사롭게 뽑은 듯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당시唐詩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송하문동자松下問童子/언사채약거言師採藥去” 운운하는 명시나 “대동강수하시진大同江水何時盡/別淚年年添綠波”하는 정지상의 절창 따위는 이 책에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다. 너무 많이 알려진 작품은 배제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너무 어려운 글자가 섞여 있거나 이해하기 힘든 시를 들고 나오지도 않는다. 아마도 쉽고 평이하되 좋은 시, 그러나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알려지지는 않은 시, 이런 작품을 골라 소개하는 것이 저자의 선시選詩 원칙인 듯하다. 어쩌면 그것은 한시에 쉽사리 다가서지 못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배려이자 그들을 한시의 세계로 초대하는 저자의 전략인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한시 번역은 일정한 패턴이 있다. 대체로 3음보 혹은 4음보의 운율을 유지하되 간혹 의도적으로 그 리듬을 파괴하여 짐짓 일률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태도가 그것인데, 아마도 이런 태도는 정형시인 한시의 맛을 살리면서 현대인의 호흡에 다가서려는 노력의 소산이 아닌가 싶다. 한시 번역에서 의미를 충실히 전달하다 보면 맛을 잃고, 거꾸로 맛을 추구하다 보면 원시의 내용과 다소 동떨어지게 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저자 또한 이 점을 충분히 유념하고 있는 듯, 이 책에서는 세심하게 언어를 고르고 호흡을 조절하여 그런 함정을 무난히 넘어서고 있다.

이렇듯 공들인 번역과 신중한 선택을 거친 한시들은 따라서 저자가 붙인 글과 교묘히 짝을 이루면서도 동시에 독자적인 생명력을 확보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의 글에서 한시 부분만을 따로 떼어내 번역을 길잡이 삼아 내용을 음미하고 감상하는 일 또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손의 기능을 되돌아보게 하는 손글씨

이 책이 지닌 또 하나의 재미가 면마다 들어 있는 저자의 손글씨를 감상하는 일이다. 저자는 글 꼭지마다 소개하는 한시의 원문과 번역문을 일일이 손글씨로 선보이고 있고, 손글씨의 바탕이 되는 종이 또한 단 한 장도 똑같은 것을 되풀이 사용하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저자의 이런 선택은 책의 성격상 자칫 딱딱하고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산뜻하게 불식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 책장을 넘기는 또 다른 즐거움을 덤으로 선사하고 있다.

손글씨는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다. 거기에는 서정이 담겨 있으며, 주인의 개성이 녹아 있고,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의 예지와 문화가 깃들어 있다. 말할 수 없는 아우라를 두르고 있는 것이 손글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만간 우리에게 한없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될 지도 모르는 것 또한 손글씨이다. 이처럼 점차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손글씨를 애써 불러내어 도대체 우리에게 손이란 무엇인가, 하고 묻게 만드는 책이《맑은 바람 드는 집》이다.

◎ 글쓴이 흥선 스님

이 책 《맑은 바람 드는 집》의 지은이 흥선스님은 올해로 11년째 직지사 성보박물관의 책임자로 일하며 절집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가꾸는 일을 하고 있는 수행자이다. 스님은 2009년 4월까지 문화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현재도 경상북도 문화재위원회 위원으로 재직하고 있어 이 분야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는 박물관인이기도 하다.

90년대 중반 이후 우리의 문화유산을 돌아보는 일이 한창 붐을 이룰 때 <답사여행의 길잡이> 시리즈 15권이 좋은 길잡이 구실을 했음을 알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 가운데 제8권과 13권이 지은이가 집필한 책이다. 이때부터 지은이의 글은 고정 독자가 생겨날 만큼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났다. 앞뒤로 이가 잘 맞으면서도 조촐하고 깔끔한 글을 구사하던 지은이가 그 위에 맑은 서정을 무늬처럼 얹어 세상에 선보이는 글 모음이 이번에 나온 《맑은 바람 드는 집》이다.    

◎ 본문 중에서

봄입니다. 봄이 어떠냐구요? 그건 제게 묻지 마십시오. 날도 채 밝지 않은 첫새벽부터 가지가지 소리로 부산스럽게 아침을 여는 온갖 새들에게 물으십시오. 기찻길 옆 밭둑에, 그 너머 산자락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조팝나무 꽃에게 물으시고, 두 볼에 오른 홍조보다도 연연한 빛깔로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복사꽃에게 물으시고, 언덕에 들판에 모시 조각보처럼 펼쳐진 배꽃 그늘에게 물으시고, 그 배꽃 위로 꿈결처럼 하얗게 부서지는 은은한 달빛에게 물으십시오. 그리고 또 늙은 소나무 새순에도, 천 년을 버티어 온 느티나무 속잎에도 물으십시오. -본문 34쪽

사람의 일 치고 시간의 풍화를 견디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래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도로徒勞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어김없이 모든 것을 지워가는 시간에 도전하는 어리석음, 무모함이 아름답습니다. 그 어리석음이, 무모함이 꽃을 피우고, 잎을 틔우고, 열매 맺음을 믿습니다. -본문 57쪽

돌아서면 배고파지는 것이 죽이라고 합니다만, 그래서 가난한 시절을 겪은 어르신들은 외면하기일쑤인 음식이 죽이긴 합니다만, 요즘처럼 먹을 것 넘쳐나 도리어 탈인 세상에서는 쉬 출출해지는 점이 오히려 미덕입니다. … 그 빈 느낌이 좋습니다. … 대저 자유는 비어 있음에 깃듦이 예사인 모양입니다. 죽은 채우기가 아니라 비우기를 가르치는 음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본문 75쪽

저녁이면 신화 같은 달이 뜹니다. 어느 철이나 달이 동녘에서 처음 떠오를 때면 제 몸과 주위에 붉은 기를 띠고 있습니다. 이윽고 중천에 가까워질수록 그 붉은 기운은 서서히 탈색되고 달은 점점 투명하고 맑아집니다. 그러나 한여름의 달은 그렇지 않습니다. 새벽이 될 때까지 그 충혈된, 불온한, 열기 가득한 붉은빛을 거두지 않습니다. 이런 달빛 아래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마치 신화처럼. -본문 113쪽

마루는 건축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전이공간, 음예공간, 여백의 공간입니다. 마루는 실내가 아닙니다. 실외도 아닙니다. 마루는 방이 아니듯 마당도 아닙니다. 동시에 마루는 실내이기도 하고 실외이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방의 연장이지만, 어떤 때는 마당의 연속이기도 합니다. 벽 없는 방이자 지붕 있는 마당입니다. 겨울이면 마루 깊숙이 햇살이 비쳐들지만, 여름에는 그 자리가 짙은 그늘로 채워집니다. 빛과 그늘이 서로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려받는 공간이 마루입니다. 마루는 비어 있습니다. 비어 있음 그 자체가 마루의 목적이자 기능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마루는 자유입니다. -본문 141쪽

하늘도 단풍입니다. 하늘 단풍이 하도 고와 그 아래 흰 옷을 입고 서면 쪽빛 물이 들 것만 같은 나날들입니다. -본문 148쪽

어제 비계 위에서 한창 먹방망이를 두드리다 어느 순간 비각碑閣의 살창 너머로 큰키나무 자잘한 잎새들을 잔잔히 흔들고 있는 시월의 햇살과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참 고운 가을빛이었습니다. 잎새가 흔들리는 만큼 가을빛도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저 투명하게 마알간 햇살 속에 낌새처럼 섞여 있는 길 떠나는 자의 자세. 아, 하는 탄성을 속으로 삼켰습니다. -본문 160쪽

옛길 가녘, 묵은 나무들처럼 이제는 그저 심상한 풍경이 되어버린 부도들이 하나, 둘, 또 하나, 둘, 셋, 두꺼운 이끼를 얹은 채 침묵조차 잊어버린 자세로 물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석로운천추石老雲千秋―돌조차 비켜가지 않는 세월을 품어 안고서 겨울산은 어제처럼 정정하였습니다. -본문 184쪽

겨울은 응시의 계절입니다. 물끄러미 자신의 안뜰을 들여다보기 좋은 날들입니다. 잠든 대지는 안쪽에서 조용히 봄을 준비합니다. 부지런한 농부가 봄을 위해 연장을 매만지듯 겨울은 침묵 속에 봄을 예비합니다. 야심성유휘夜深星愈輝―밤이 깊을수록 별이 빛난다고 했습니다. 깊어가는 겨울, 우리의 안뜰 살림도 눈처럼 깊게 쌓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본문 189쪽

산은 겨울을 앓습니다. 무겁게, 무겁게 눈이 내리면 장마와 태풍에도 끄떡없던 정정한 나무들조차 외마디 비명을 메아리로 남기며 속절없이 꺾이곤 합니다. 그리고 그 상처 속에서 다시 봄은 옵니다. 설해목雪害木 꺾이는 소리에 기울었던 귀가 다시 행간으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산중의 겨울밤이 깊이 가라앉고 있습니다.
-본문 221쪽

자연을 부르는 정갈한 한시에세이

직지사 성보박물관장 흥선 스님의 첫 수필집이다. 지난 7년 반 동안 박물관 홈페이지에 꾸준히 옛시를 올리고, 번역을 하고, 거기에 덤덤히 일상을 얹은 글들을 추려 모았다. 이미 눈 밝은 독서가들에게 스님의 글은 아름답고 단아할 뿐만 아니라 정곡을 찌르는 깊이 있는 글로도 유명하다. 금석학에 조예가 깊은 스님이 한지에 직접 쓴 청아하고 반듯한 손글씨는 그 자체만으로도 운치가 넘치며 독자들에게 색다른 책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흥선│284쪽│152×195mm│13,500원│아름다운인연│02-720-6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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