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학원, 친일 사판계 대응한 이판계 수장 만해의 근거지로 설립”
“선학원, 친일 사판계 대응한 이판계 수장 만해의 근거지로 설립”
  • 서현욱 기자
  • 승인 2019.06.07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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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리연구원장 법진 스님, 4일 ‘만해의 독립운동과 선학원’ 발표
“김광식 교수의 ‘만공 스님 홀대·역사왜곡 주장은 심각한 오류”
▲ 지난 4일 재단법인 선학원이 3·1운동 100주년 기념 ‘만해 한용운과 독립운동’ 세미나를 개최했다.

선학원이 만해 한용운 선사의 독립운동의 핵심 거점이었고, 선학원 설립과 만해 스님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점이 드러났다.

지난 4일 재단법인 선학원이 주최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만해 한용운과 독립운동’ 세미나에서 한국불교선리연구원장 법진 스님은 대한민국 법원의 판결문과 1919년 3·1운동으로 일제에 끌려가 옥고를 치르던 만해 스님이 1921년 12월 출옥한 뒤 일제강점기931년까지 선학원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편친 만해의 행적을 추적했다. 법진 스님은 이를 통해 “선학원의 설립이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뿌리 깊은 보종(保宗)과 항일운동의 정신계승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선학원 설립 이후에도 만해를 중심으로 한 불교계의 항일운동의 근거기로 기여했음”을 살폈다.

만공 스님 조차 “사찰령과는 관계없는 조선 사람끼리만 운영”

이 같은 주장은 마침 국가보훈처가 만해 스님을 올해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시점에 나와 더욱 눈길을 끈다. 나아가 최근 김광식 교수가 선학원미래포럼이라는 단체가 ‘선학원 미래를 열다’라는 주제로 연 ‘2018워크숍’에서 ‘선학원 정체성의 재인식;만공과 한용운, 계승의 문제’ 주제발표를 통해 “만해 한용운 선사는 선학원 설립의 주역이 아니며, 3·1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이어서 1921년 선학원 건물 공사에 관여할 수 없었다”며 “한용운은 선학원 창건에 관여하지 않았다. 한용운을 선학원 설립 ‘조사’에 포함시킨 것은 명백한 역사적 오류이자 억지의 역사인식”이라고 주장한 것을 선학원의 대표자가 직접 반박한 것이어서 더욱 눈에 띤다.

또 김광식 교수의 발표는 선학원 설립의 핵심 주역은 만공 스님으로, 만해 한용운 선사는 선학원과 ‘연관된 인물’일뿐 ‘직접적인 연관은 희박하다’고 주장했지만, 법진 스님은 법원 판결문과 선학원을 거점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한 만해 스님의 행적 등을 근거로 반박했다.

만해 스님은 1919년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였다. 선학원은 1921년 8월 10일 공사를 시작해 같은 해 10월 4일 상량식을, 그리고 같은 해 11월 30일 준공했다. 현재 선학원은 만해 용운(萬海 龍雲 1879~1944)· 남전 한규(南泉 翰奎1868~1936)· 도봉 본연(道峯 本然 1873~1949)· 석두 보택(石頭 寶澤1882~1954)· 성월 일전(惺月 一全 1866~1943)· 만공 월면(滿空 月面 1871~1946)· 용성 진종(龍城 震鍾 1864~1940)· 초부 적음(草夫 寂音1900~1961)을 설립조사이자 중흥조로 모시고 있다. 남전· 도봉· 석두 스님은 선학원 창설제의부터 건립자금 수합, 공사 진행, 대지 명의(垈地 名義) 등 창설을 전반적으로 주도하였고, 성월 스님은 건립자금을 희사했다. 만공 스님은 은 1921년 5월 15일 석왕사 포교당에서 선학원 건립비용을 모금하기 위해 보살계 계단을 개최하면서 “우리는 사찰령과는 관계가 없는 순전히 조선 사람끼리만 운영하는 선방(禪房)을 꾸려 불조 정맥(佛祖 正脈)을 계승하자”고 천명했다.

▲ 주제발표하는 한국불교선리연구원장 법진 스님.

“선학원은 사판계(친일) 대응한 만해 중심 이판계 수도장”으로 설립

1954년 9월 27일 대한민국 대법원(판사 이성욱)은 판결문을 통해 “康道峰·金南泉·金石頭 등은 기미독립운동 당시 33인 중의 1인이며 理判系의 선종의 지도자인 한용운이 (감옥에서)복역하다가 단기 4254년도(1921)에 출옥하게 되자 同人(한용운)을 중심으로 한 事判系에 대응하여 理判系의 수도원(을)창립하고자 신도 崔昌勳 외 다수인으로부터 기부를 받아 서울특별시 안국동 40번지 대지190평을 매입한 후 동 대지상에 목조기와집을 건축, 그 당시 범어사에서 인사동포교당을 폐지철거하고 옛 목재와 기와 약간을 (선학원)건축에 기증하였다.”고 했다.

이 판결문은 선학원이 1934년 재단법인 인가 이후 1921년 최초 설립된 직후 당시 일제의 경제적 탄압을 피하고자 범어사에 신탁했던 재산을 환원하고자 제기한 소송 최종 결과로 나온 것이다. 선학원은 설립직후 남전· 도봉· 석두 스님 3인의 명의(名義)로 하였다가 과중한 세금문제로 범어사에 명의를 신탁했다. 신탁 이후 선학원은 범어사에 기부재산의 소유권 이전등기를 요구하였지만, 범어사 내부의 일부 반대에 의해 신탁재산을 돌려주지 않자 선학원은 1953년 범어사를 상대로 법인재산환수를 위해 제소하면서 이루어진 소송이다. 특히 이는 법원 판결문이라는 점에서 매우 신뢰할 수 있으며, 선학원과 만해 스님의 직접적 관계를 증명하는 매우 구체적인 근거자료로 판단된다. 만공 스님이 보살계 계단을 개최하면서 “사찰령과는 관계가 없는 순전히 조선 사람끼리만 운영하는 선방(禪房)을 꾸려 불조 정맥(佛祖 正脈)을 계승하자”고 천명한 점도 이판계의 지도자인 한용운을 중심으로 한 수도원을 만들려 했다는 법원 판결과도 연결된다.

“만해 출옥하자 보종과 항일운동 지속해 한국불교 정체성 구현”

법진 스님은 “선학원 설립에 실질적 역할을 했던 남전·도봉·석두 스님은 1919년 3·1운동 당시 33인 가운데 1인이었던 만해가 출옥하자 그를 중심으로 한 보종과 항일운동 등을 지속하여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구현하고자 했다.”고 했다.

만해 한용운의 독립운동에 대해 국가보훈처는 올해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면서 “1919년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불교계 만세운동의 동참을 권유하고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실제 만해 스님은 1919년 2월 28일 오후 이종일로부터 독립선언서 3천매를 인수해 귀가한 후, 중앙학림의 정병헌․ 신상완․ 오한현․ 김법린․ 김동신 등 불교청년학생들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준 후 3월 1일 밤에 시중에 돌리도록 당부했다. 이들은 3월 1일 파고다공원에 집합해 시위행진에 참여하고 3월 2일에는 서울 동북부 일대에 선언서를 배포했고, 지방 사찰로 내려가 시위운동을 주도ㅎ했다. 김법린과 김상헌은 범어사로, 김동신은 해인사로, 오택언은 통도사로, 김대용은 동화사로, 정병헌은 전라도 방면으로 파견되어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이와 같이 만해 스님은 독립선언서 배포 및 시위의 전국적 확산을 도모함으로써 3․1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만해와 항일 독립운동이 선학원 설립의 결정적 원인“

판결문에 따르면 만해 스님은 일제 강점기 친일 구류 불교계에 반대하는 ‘이판계의 수장’으로 친일 사판계에 대응해 이판계의 수도원으로 선학원을 설립했다. 도봉 남전 석두 스님 등 선학원 설립 3인의 조사는 만해 스님의 항일운동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친일 사판계에 대응해 이판계 수장으로 만해 스님을 모시기 위해 수도원을 설립했다는 점이 판결문에 적시돼 만해 스님과 항일 독립운동이 선학원 설립에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법진 스님은 “선학원 설립조사 3인은 선학원 설립 이전부터 만해 스님의 행적을 잘 알고 있었다.”며 “설립조사 중 도봉 스님과 석두 스님은 조선불교청년회에 적극 참여했고, 당시 불교계에 경각심을 일으킨 임제종 운동이나 3.1운동 참여는 불교계 차원을 넘어 독립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민족불교의 가치와 독립정신이 투철했던 이들은 1921년 12월, 3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만해를 선학원 설립이념과 운영의 상징으로 설정하고, 만해를 구심점으로 하여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독자적 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고 강조했다.

“선학원서 독립운동 하던 만해 스님, 검거 투옥되기도“

만해 스님은 출옥 후 선학원을 거점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는 선학원 건물이 준공된 직후인 1921년 12월부터 선학원에 주석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그의 행적은 1922년 3월 법보회 발기, 같은 해 11월 민립대학 건립 운동, 대중강연, 2913년 2월 물산장려운동 지원 강연, 4월 민립대학 설립운동 지원 강연,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총재 취임, 같은 해 11월 선우공제회 수도부 이사, 1926년 십현담 주해 발행, 님의 침묵 발행, 1927년 1월 신간회 발기 같은 해 5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및 경성지회장, 1929년 11월 광주학생의거를 조병옥 김병로와 함께 전국적 확대 및 민중대회 개최, 1930년 신간회의 광주학생운동 지원 연설하려다 체포, 같은 해 1월 석방, 같은 해 김법린 이상호 이용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청년비밀결사 만당 영수 추대, 1931년 권상로가 발행인이던 <불교>지 인수 사장으로 취임 등의 독립운동이 대부분 선학원을 거점으로 진행됐다. 선학원이 당시 불교계의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 법진 스님 발표에 논평하는 심규탁 연세대 교수.

“발각된 모 중대사건으로 인하야 시내 종로 경찰서(警察署)에서는 경긔도 경찰부(道警察部)의 지휘를 바더 재작일 아츰부터도 활동을 게속하야 북촌일대에서 유력한 련루자로 인뎡하는 사람을 검거하여 들이는데 재작 칠일 아츰 여덜시경에는 다시 사오명의 형사대가 시내 안국동(安國洞) 사십번디 동래 범어사(東萊 梵魚寺)에서 경영하는 선학원(禪學院)을 에워싸고 수개월전부터 그곳에서 류숙하고 잇든 강원도 린뎨군 백담사(江原道 麟蹄郡 百潭寺) 승려로 이전 삼십삼인 중에 한사람인 한모(韓某)가 맛츰 문밧그로 나오는 것을 돌연히 검거하는 동시에 그가 잇던 방지 엄밀히 수색하엿다더라.” <동아일보> 1926년 6월 9일자

만해 스님은 1926년 선학원에서 나오다가 일제 경찰에 강제 연행되기도 했다. 이 같은 내용은 <동아일보> 1926년 6월 9일자 기사로도 확인된다. 이 기사에 따르면 선학원은 수개월 동안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고, 수색까지 받던 곳이었다. 감시 대상이었던 것은 불교계 대표 독립운동가인 만해 스님이 주석했기 때문이다.

1930년 “안으로 교정을 확립하고 밖으로 대중불교를 건설하기 위해 신명을 바쳐 과감히 전진하기로 선언”하며 출범한 ‘만당’은 만해 스님을 당수(영수)로 추대했다. 만당의 핵심세력은 1931년 3월 23~24일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전환해 출범했다.

법진 스님은 “만해 스님은 만당의 핵심세력이 당수로 추대됐고, 중대현안에 대해 보고하고 논의한 만큼 조선불교청년동맹의 현안 역시 만해 스님에게 가르침을 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며 “일제강점기 한국불교의 일본화가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친일불교의 장악은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독자성까지 위협하였다. 만해 스님은 보종운동부터 독립운동과 불교계의 항일운동에 이르기까지 일제강점기 전 시기동안 그 상징적 인물이었다. 때문에 만해는 불교계의 보종운동과 불교개혁운동, 항일운동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실질적인 활동과 참여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선학원의 근현대불교사적 의미는 만해가 설립조사란 점에서 출발”

김광식 교수는 2018년 선학원미래포럼이 개최한 워크숍에서 “만해는 선학원 설립에 관여하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선학원에 주석하지도 공사에 참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법진 스님은 “당시 불교계는 만해 스님이 1910년 임제종운동이나 1919년 3·1운동을 주도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옥중에서 자신의 독립정신, 한국독립의 타당성을 개진한 <조선독립의 감상>이 당시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25호(1919.11.3.)에 게재되어 독립운동가 뿐만 아니라 불교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당시 불교계의 보종운동이나 항일운동의 중심에는 만해가 있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만해 스님과 선학원이 지닌 근현대불교사적 의미는 우선 만해스님이 선학원의 설립조사라는 점으로부터 출발한다.”며 “이미 소개한 선학원재산환수승소판결문은 선학원 역사에서 양자의 관계를 구체화시켰으며, 만해의 가치를 확대시키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만해 스님은 일제강점기 불교계뿐만 아니라 독립지사로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고 했다.

또 “남전· 도봉· 석두 스님은 만해 스님을 선학원에 주석시킴으로써 미완으로 끝난 독립운동을 완성시키고자 했으며, 불교계의 보종운동과 항일운동의 구심점으로 삼고자 했다.”며 “만해의 선학원 주석은 불교계에 국한되지 않는 범민족운동의 전개”라고 평가했다.

▲ 전보삼 만해기념관장이 법진 스님 발표에 의견을 내고 있다.

“공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관계없다는 것은 심각한 오류”

이어 법진 스님은 “판결문은 만해스님이 선학원의 설립조사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남전·도봉·석두 스님은 독립운동으로 복역하고 있는 만해가 출옥하면 그를 구심점으로 민족의식이 투철한 불교계 인사들의 수행처를 만들고자 하였다는 것”이라며 “만해 스님은 복역 중이어서 선학원 설립공사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그 설립이념의 명분과 구심점을 명확하게 제공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만으로도 만해 스님이 선학원 설립의 민족불교 이념과 상징적 구심점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고 강조했다.

김광식 교수는 “선학원을 설립한 주역인 7인의 명단에서 만공을 6번째로 배열하였다는 것은 역사왜곡”이며 “선학원의 역사 및 이념의 정비에서 만공을 적절히 강조해야 한다.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기존 선학원의 선양사업은 의도적으로, 편의적으로, 몰역사 의식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법진 스님은 “현재의 선학원이 설립조사 만공 스님을을 홀대한다거나 설립조사 명단의 후반부에 배열하고 있는 것이 역사왜곡이라는 지적은 역사적 사실이나 인식의 문제에서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면서 “선학원은 만해 스님만 설립조사로 인식하지 않는다. 설립조사를 명시한 순서가 중요한가.”라고 물었다.

“순서가 중요한가, 만공 스님 등 모두 설립조사로 모셔”

그러면서 “그 순서에 따라서 기여도가 정해지는가. 이제까지 선학원 설립조사의 표기상 배열 순서를 가지고 문제제기를 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찾아볼 수 없었다.”며 “더욱이 민족불교의 회복을 위해 노심초사했던 선학원의 설립조사를 편 가르기 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고 강조했다.

지난 2월에는 선학원미래포럼 회장 자민 스님이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에서 “만해 스님은 선학원에 식객으로 있으면서 밥이나 얻어먹던 분”이라고 만해 스님을 평가절하했다. 국가가 인정하고 불교계가 높이 추앙해야 할 만해 스님을 “식객”으로 비하한 것이다.

이에 대해 법진 스님은 “그들에게 만해 스님은 한낱 식객에 불과했으며, 민족불교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동상조차도 세워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이것이 우리불교의 현주소이고 수준인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법진 스님은 석주 스님과 학담 스님의 대담을 예로 들면서 “석주 스님은 만해 스님이 선학원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신간회 경성지회장 시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며 “그러나 선학원의 6대 이사장을 역임한 석주 스님은 사실만을 말했다. 만해 스님을 추켜세우지도 낮추지도 않은 채 선학원 역사에서 만해의 가치를 실증(實證)할 뿐이었다.”고 설명했다.

법진 스님은 “만해 스님과 선학원은 한국근현대불교사를 본질적으로 이해하는 실마리를 지니고 있다.”며 “오늘날 학계나 교계의 일부에서는 만해 스님과 선학원의 관계를 평가절하하거나, 선학원 설립과 운영에서 만해의 가치를 왜곡하는 심각성까지 대두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만해 스님이 식객? 만해 가치 왜곡 심각성 대두”

이어 스님은 “만해 스님을 ‘선학원의 식객으로 밥이나 얻어먹던 분’이라거나 선학원의 설립부터 운영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공헌을 한 만공 스님의 업적을 평가 절하하는 것은 역사왜곡, 현재 선학원이 추진하고 있는 만해선양사업은 몰역사 의식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상식적이어서 부끄럽기까지 하다.”며 “더욱이 타종교와 같은 불교계외부가 아닌 현대한국불교계 내부에서 자행되고 있는 실상이다 보니 그 충격은 더욱 크다. 한국근현대불교사와 선학원 역사에 대한 객관적 이해는 더더욱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법진 스님은 “미완과 왜곡으로 쓰여 진 한국근현대불교사를 기억하고 그 반성 위에 객관적으로 정립하는 일은 과거의 모순과 한계를 극복하고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부정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고, 선학원 설립 100주년을 준비해야 하는 시점에서 만해와 선학원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법진 스님의 발표에 동의와 선학원 미래포럼에서 발표된 내용에 대해 질타했다.

“만해 스님 선학원 설립관여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가치 없어”

전보삼 만해기념관장은 “지난해 선학원의 만해 스님 선양 사업을 선학원 미래포럼에서 김광식 교수가 비판한 사실을 최근에 알았다. 이에 대해 문장으로 짚고 밝혀야 할 필요가 있다.”며 “만공 스님은 선승이었고 만해 스님은 선과 교에 모두 밝았다. 만공 스님이 만해 스님에게 경허어록을 맡긴 이유가 있다.”고 했다.

이어 “만해 스님은 3년여에 걸쳐 만공 스님이 준 자료를 분석하고 보완해 경허어록을 만들었다. 만공과 만해 두 분은 지향은 같지만 방법이 다른 분이었다.”면서 “선학원이 만공 스님을 6번째로 두었다는 식으로 지적하는 것은 못된 짓이다. 만해 스님과 만공 스님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고 했다.

또 “만공 스님은 만해 스님이 세상을 떠나자 ‘세상에 사람이 하나 반 있다’ 그중 하나가 없어졌다고 했다. 만해가 없는 조국에서 할 일은 기도뿐이라며 100일기도에 들어갔다.”면서 “만공 스님과 만해 스님을 비교해 선학원을 비판하는 것은 학자가 할 일이 아니다. 만해 스님이 선학원 설립에 관여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가치가 없는 말”이라고 했다.

“법원 판결문으로 분명한 근거대기 정당한 주장”

신규탁 연세대 교수 역시 “법진 스님의 발표는 법원 판결문이라는 분명한 근거대기로 정당한 주장을 펼친 것”이라며 “선학원이 만해 스님만 설립조사로 인식하지 않고 있는 점 등을 볼 때 현재 선학원이 설립조사 중 한 명이 만공 스님을 홀대하거나 설립조사 명단 후반에 배열된 것이 역사왜곡이라는 지적은 역사적 사실이나 인식의 문제에서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그는 “불교 역사를 학문적으로 연구할 경우 ‘현실적 이념과 역학적 구도와 거리두기를 해야 할 것”이라며 “반성 없는 평가나 단순한 구도 도입은 학문의 객관적 자기 정립의 엄밀성을 스스로 떠올리는 점검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이날 세미라 사회를 본 차차석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도 “학계에 학문 외적인 것에 끄달려 연구 발표하는 사례들이 있다. 불교계 큰 스님과 관련된 사업에서 구조적인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연구 발표를 하는 것은 학문하는 사람들의 자세와 관련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날 세미나에서는 김순석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이 ‘자유와 평화를 지향한 한용운의 독립운동’을, 김성연 동국대 불교학술원 일반연구원이 ‘한용운의 독립운동과 자유 평등사상의 역사적 맥랍’을 각각 발표했다. 최경순 박사(연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와 이경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가 각각 토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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