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불교와 민중불교이야기
왕실불교와 민중불교이야기
  • 소암 스님
  • 승인 2019.07.30 11: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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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보우대사와 문정왕후

한국불교역사를 살펴보면 가야 고구려 신라 백제와 고려시대의 1500년동안 불교국가로 위상을 떨쳤다.

역사에 엄연히 존재하지만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것은 조선조 5백년의 유교성리학 정권의 불교가 대부분이다 .그리하여 천오백년의 찬란한 불교문화는 박물관과 천년고찰에 있을뿐 국민들은 대개 조선시대의 유교문화와 윤리의 시각에 길들여져 있다.

수개월전 영화로 만들어진 '사명대사'는 감춰진 역사의 진실을 밝혀내는데 새로운 사실을 제공하였다 tv다큐멘타리로 제작되어 한,일 간 현지촬영을 한 이 작품은 불자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역사의 소중함을 새삼 일깨워주는 명품다큐였다고 생각한다.

나이든 세대들이 주로 듣고 배운 것은 사명대사가 일본에 특사로 건너가 일본의 최고지도자를 만난  자리에서 시험을 당하는데 일본관백이 한번은  불을 엄청 지펴  방을 화덕으로 만들었으나 아침에  고드름을 달고 나오는가 하면 또 한번은 방을 냉각시켜 얼음으로 도배했으나 이번에는 얼굴에 땀을 흘리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관백과 장수들이 사명대사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신통력을 가진 이야기로 일본을 미워한 나머지 사명당을 도사로 여기는 전설같은 이야기다.

사명대사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요즘 일부 반도체의 핵심부품이 일본정부의 규제때문에 전자제품의 생산에 차질이 생기고 외교마찰이 생기고 있다. 다각도로  정부와 기업이 나서고 있으나 묘수가 없어 정치 경제적으로 발등의 불이 되고 있다.

이럴때 사명대사같은 구세주가 나타나서 한방에 일본을 제압하고 규제를 풀수 있으면 좋으련만 한두사람의 힘만으로 해결이 쉽지않고 더구나 외교의 달인 사명대사같은 분도 없어서 더욱 난감하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옆에 붙은 일본과 사이가 좋지 않아 물과 기름처럼 대결로 치닫고 있다 그렇다고 서로 욕만 하고 비방만 해서는 감정적으로 시원할지 몰라도 문제해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않고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계절적으로 무더위와 태풍이 몰아치는 한여름이라 얽히고 설친 한일관계는 정부와 국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고 여름의 스트레스가 가중될지 몰라 걱정이다 
 
각설하고 사명대사는 임진전쟁의 영웅이나 어려서 서당에서 글을 익히고 입산출가해서는 더욱 정진해서 학문은 물론이고 시서화에 통달했으며 전쟁에 나가 적을 물리칠 정도로 무예도 출중했다.

국가존망의 위기에 처해 사명대사는 스승인 서산대사의 부름을 받고 7년 전쟁에 전국의 승병들을 단련시키고 전쟁터에 배치하며 서산대사에 이어 국가로부터 '팔도승병대장군'이라는 직함을 받게 된다 .

당시 팔도의 승병들이 대략 5천명인데 나이많은 노승들과 병든 승려를 제외하고 총출동한 숫자로 '관군 일당백'의 역할을 했고 주로 산악지대와 읍성 ,해안가전투에 투입됐다 이순신장군의 휘하 수군에도 절반이 승병들로 그동안 우리역사에서 잊혀진 것이나 영화 '명량'으로 사실이 밝혀졌다

농민들과 천민들 ,일부 양반들로 이뤄진 의병을 지휘한 것도 승병들이었으며 수많은 의병들이 산화하고 죽었지만 이름이 알려진 것은 소수에 불과했다.그도 그럴것이 양반은 이름이 있지만 승려와 천민은  온전한 이름이 없어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다.

승병장들의 활약이 대단하고 일본과 명나라장수마저 감복할 지경에 겨우 승병장의 공로와 몇명의 이름만 전해진 것이다

서산 ,사명대사의 고향은 묘향산과 표충사 이지만 인재를  배출한 곳은 봉은사로 때는 중종시대 고승인 '보우대사'와 '문정왕후'가 나락으로 떨어진 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해 '봉은사중창'과 '승과급제'를 부활시켜 서산 사명대사를 탄생시킨 것이다.

불심왕후로 소문난 문정왕후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걸로 유교학습은 물론 보우대사등 고승들을 통해 불심을 키우고 왕실과 불교를 위해 헌신한 분이다.

막상 문정왕후가 돌아 가시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교성리학자들과 신하들, 관료들은 죄없는 보우대사를 제주도에 귀양보냈다 제주목사는 죄를 문초하고 매질과 고문으로 죽였다 .그리고 역사는 문정왕후를 못되먹은 왕후로, 보우대사는 요승으로 기록했다

왜곡된 역사때문인가 그후 150년뒤 조계종의 법맥을 계승한 '환성지안'선사 역시 죄없이 제주도에 귀양가서 매질로 죽었다.

불교국가 고려를 쿠테타로 엎어면서 최영장군 정몽주등 수많은 충신학자들을 죽이고 조선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와 아들 태종 이방원과 정도전은 나라를 세우면서 반대하는 왕실가족 충신들을 숙청했고 조선왕조의 설계자라는 칭송을 받는 정도전 역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당했다.

조선왕조는 흔히 피로 얼룩진 왕조와 당쟁의 역사라고 말한다 동서고금의 왕조사에 피를 안흘린 역사가 없겠으나 조선왕조는 더욱 심했고 엄연히 유교도학을 정치이념으로 삼았지만 권력투쟁과 양반기득권, 남녀와 적서, 반상의 신분차별이 극심했다.

그러니까 조선왕조의 초대임금인 태조의 불심과 무학대사가 있었고 세종 문종 세조때의 스승인 대학자 신미대사가 있어 모든 신하가 반대하고 강대국 명나라에 극비로 진행된 한글창제는 그 주역인 신미대사를 역사에서 지웠다는 것이 오늘의 역사적 진실이다 .장기간 한글창제의 주역이 세종대왕이 아니라 신미대사임을 자료를 확보하고 고민한 영화 '나라말씨미'는 이번 여름 휴가철, 영화가를 달굴 소재로 기대된다. 
 
민중불교는 살아있다 
  
작년 우리사회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평생 몸바친 백기완 통일문제 연구소장은 설조스님의 단식장을 여러번 방문하고 한국불교가 왕실에 의지해 명맥을 유지했다고 말했다. 이에 설조스님은 왕실만이 아닌 민중불교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화답했다.

대표적 우리사회의 원로인 백기완선생으로부터 한국불교가 어용종교일뿐이라는 평가절하를 말을 듣고 나는 매우 얼굴에 찬물을 끼얹듯 부끄러웠다 .

어쩌다가 사회원로에게 마치 승려가 권력에 기생한 식충이처럼 비쳤졌을까 그것은 아마도 해방후 조계종이 대처승들을 이승만정권의 지원으로 몰아내고 전통사찰을 모두 접수하고 운영하면서 역대정권과 유착한 결과 사회민주화와 각종 사회참여에는 눈을 감은 인과업보가 아닐까 한다.

그렇지만 설조스님이 지적한대로 해방전까지 한국불교는 권력보다는 사회속으로 들어가서 희생과 헌신을 한 민중불교의 역사가 면면이 이어졌다 .앞서말한 것 처럼 조선시대를 관통한 의승병은 물론이요 고려의 국가위기인 거란 금 몽골의 백년전쟁때에도 귀족신분인 승려들이 몸소 전쟁을 방어하는 국방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 '호국안민의 민중불교 전통'이며 일부 고승들과 왕실불교만이 아닌 나라를 풍전등화에서 구하고 밑바닥 민중들의 벗이 된 민중불교역사로 인해 한국불교가 5백년 가혹한 핍박과 백년 외세종교를 이겨내고 살아난 이유다 

일부 잘못된 시각을 갖고 있는 불자들과 지식인들 ,많은 시민들도 이 기회에 제대로 된 역사를 알았으면 좋겠다 .왕실과 권력층을 위한 호국불교가 아닌 ,중생구제를 위한 민화안국의 민중불교가 한국불교의 역사적진실이고 전통이라는 것을 깨닫기를 바란다.

권력에 기대면 우파, 민중에 기대면 좌파불교로 낙인찍는 것은 왜곡된 고정관념이다
보수우파불교와 진보좌파불교는 다 필요하다.  다만 부패하고 권력과 유착하며  개인의 탐욕을 일삼는 파계승과 정치권승들은 호국안민의 민중불교도 ,나라와 불교를 지키는 건강한 보수불교가 아닌 타락한 불교일 뿐이다 .불교인과 국민모두가 잘 구별하고 경계해야 할 일이다

멀리는 민중불교사의 역사는 삼국시대에 얼마던지 볼수 있지만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와 파계한 이후 왕실,귀족불교를 버리고 걸립패들과 바가지를 두드리면서 '무애춤'을 추는 설화에서 찾을 수 있고 신라의 정토사상은 누구나' 아미타불'염송만 하면 극락세계에 갈수 있다고 가르쳤다 왕실과 호국의 화엄불교가 아닌 민중불교였다 .미륵신앙은 한국불교가 서민들과 천민들이 믿던 신앙이었다.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미래의 희망을 꿈꾸는 미륵신앙은 혁신사상으로 천년을 이어온 민중불교였다 농민 천민 승려들이 합세한 '동학민중혁명'도 미륵신앙을 모태로 삼은 것이다

오직 마음과 깨달음뿐이라는 선불교만 고집할게 아니라 시대에 맞는 한국불교사를 재정립하고 왜곡되거나 은폐된 역사를 복원해야 한다. 전국적으로 불교역사연구소의 설립이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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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19-07-30 22:38:38
세계사로 볼때,한나라때 동아시아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은 이미 세계종교 유교가 자리잡았음. 위만조선.한사군때 유교가 한국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고려.조선시대는 기자조선도 인정했었음. 한자, 한문성씨사용,고인돌, 고대 부여 영고,고구려동맹, 예의 무천,삼한의 상달제등 제천의식이나 전통 유교풍속은 황하문명에서 피어난 상고시대 유교의 영향을 나타냄. 이후 삼국시대는 부여 및 삼한의 유교를 승계하여 난생신화같은 하늘의 아들 의식, 하늘숭배.조상숭배가 있는 설날.추석.단오.한식같은 유교 명절, 유교 교육,한자의 사용,한문성씨의 사용등이 있었고,불교는 반발때문에,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가 있고나서야 후발 외래 종교로 불교를 받아들임. 고려는 치국의 도 유교,수신의 도 불교.교육은 유교 국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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