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랏말싸미’ 논란의 중심에 선 까닭은
영화 ‘나랏말싸미’ 논란의 중심에 선 까닭은
  • 조현성 기자
  • 승인 2019.08.01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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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전부터 저작권 다툼, 개봉 후엔 역사 왜곡 논란
▲ 영화 나랏말싸미 가운데


한글 창제를 다룬 영화 ‘나랏말싸미’를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개봉 전에는 영화사 측과 저자 출판사가 저작권을 두고 다퉜다. 개봉 후에는 역사 왜곡이라고 비판을 받고 있다. 해외 보급을 막아야 한다는 청와대 청원까지 등장했다.


‘나랏말싸미’는 훈민정음 창제설 가운데 하나를 재구성한 영화이다. 영화는 신미 스님(1403~1480)이 한글 창제 과정의 주역이었다는 내용이다.

영화에 앞서 신미 스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이는 박해진 작가이다. 박 작가는 지난 2015년 <훈민정음의 길 혜각존자 신미 평전>을 펴냈다. 원고지 5400매 분량의 책을 펴내는데 박 작가는 12년을 쏟았다. 1374개 각주는 책에 담긴 내용이 허구가 아님을 반증한다.

박 작가는 ‘나랏말싸미’ 제작 과정에 수차례 자문했다. 저작권 다툼이 법정으로 번지면서 영화사 측은 박 작가의 제작 참여는 한차례 술자리가 전부였다고 반박했지만, 박 작가의 연구결과가 영화의 ‘원안’인 것에는 양측의 이견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영화를 비판하는 측은 ‘신미 창제설’을 학설로조차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훈민정음의 다양한 창제설 가운데 하나를 영화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나라말싸미’가 못마땅한 이들은 이 자막부터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신미 창제설을 낭설로 전제하면서 저 자막으로 인해 허구가 아닌 학설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주장이다

▲ 영화 나랏말싸미 가운데


신미의 한글 창제 참여는 낭설일까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의 세종 25년 계해(1443) 12월 30일(경술) 훈민정음을 창제하다를 보면,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ㆍ중성(中聲)ㆍ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고 했다.

이 가운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가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전부터 한글이 존재했다는 주장의 근거이다.

세종 26년(1444) 집현전 부제학인 최만리를 비롯해 김문 신석조 정창손 조근 하위지 등이 올린 상소문은 세종이 논의 없이 한글을 만들고 반포한 것에 대한 비난과 우려를 담고 있다. 세종의 한글 창제가 집현전의 실무담당자 부제학도 모를 정도로 은밀히 진행됐음을 짐작케 한다.

세종은 신미 스님에게 법호를 내렸다. ‘나라를 위하고 세상을 이롭게 한, 지혜를 깨우쳐 반열에 오른 분’이라는 뜻의 ‘우국이세(祐國利世) 혜각존자(慧覺尊者)’이다. 박 작가는 이 법호가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뜻과 다르지 않다면서 신미와 훈민정음의 연관성을 증명하는 근거라고 한다. 반면 반대 측은 이 법호가 훈민정음 창제의 공적을 치하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반박한다. 이들은 문종 대에 신미의 호가 삭제된 사실을 들어 신미가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 영화 나랏말싸미 가운데


세종과 가까웠던 신미

신미 스님은 불교경전의 한글 번역에 힘썼다. 이들 번역본이 세종의 한글 창제 5년 전, 반포 8년 전에 출간됐다는 점은 신미 스님이 한글 창제 과정에 참여했다는 가설에 힘을 싣는다. 스님이 펴낸 것 중 현존 기록물은 ‘상원사중창권선문’ 등 국보 1점과 보물 10여 점이 있다. <금강경삼가해> <선종영가집> <능엄경> <수심결> <몽산화상법어약록> 등이다.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를 위해 1443년까지 10여 년 연구를 할 때 수양대군, 안평대군이 함께 했다. 당시 신미는 궁중에 출입하고 있었고, 수양 안평과의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다만 신미가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했다는 정사의 기록은 없다.

세종은 훈민정음 자모음 28자를 만들고도 자신의 안질과 어린 대군들의 질병으로 즉시 반포하지 못했다. 신미는 세종을 위해 궁에서 법회를 열었다. 신미는 세종의 5남 광평대군이 졸했던 1444년, 세종의 7남 평원대군이 졸했던 1445년, 소헌왕후가 졸했던 1446년 그들을 위해 궁에서 법회를 열었다.

세종은 1446년 당시 집현전 교리였던 신미의 속가 동생 김수온에게 세종이 석가보 증수를 명했고, 신미가 이를 도왔다. 세종은 신미에게 총승의 관직을, 후에는 판교선종의 관직을 제수했다. 세종은 자신이 죽기 직전에도 신미를 자신의 침실로 불러 법회를 봉행했다.

영화 개봉 후 악평 속속 늘어나...왜?

‘나랏말싸미’는 지난 18일 시사회를 시작으로 24일 전국에서 개봉했다. 시사회 당시 “지루하다” “교육영화 같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았다”는 평이 있었다.

네티즌 A는 “내가 알고 있는 기본 지식과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한글이 만들어진 과정을 심도 있게 다뤘다. 지루할 수 있는 소재를 이해력과 몰입감 있게 끌고 가는 연출이 너무나 좋았다”고 했다. 이어서 “최근 우리나라 상황에 대입해 봤을 때 신하들의 모습이 딱 자한당 토착 왜구 모습 그대로라 부들부들하기도 했다”면서 5점 만점에 4.6을 줬다.

다른 네티즌도 비슷한 평을 했다. 이같이 우호적인 평은 ‘역사 왜곡’ 프레임이 영화에 씌워지면서 급격히 사라졌다.

네티즌 B는 ‘나랏말싸미’는 세종대왕과 한글을 능멸하는 망작이라고 혹평했다. 신미 스님이 세종에게 호통을 치는 장면 등은 ‘역사왜곡’ 프레임을 더 굳게 했다. “영화가 반드시 사실일 이유는 없지 않느냐”는 반론에는 “영화 홍보를 정사인 것처럼 했다”는 반박이 달렸다. “애들이 보기에 좋지 않은 영화이다. 수출도 막아야 한다”는 댓글이 있었고, 청와대에는 이 영화 수출을 막아달라는 청원이 올랐다.

봉준호 감독은 ‘나랏말싸미’를 보고 “이 영화에는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창조의 순간을 코앞에서 목격하는 짜릿함이 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극장을 나서며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기 위해 핸드폰의 한글 자판을 하나하나 두드릴 때, 세종이라는 고독한 천재를 향해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고 싶어진다”고 찬사를 보냈다.

▲ 영화 나랏말싸미 가운데


영화 혹평 돌자 불교계 어거지 부리고 떼쓴다?

‘나랏말싸미’에 쏟아지는 혹평을 불교계 일부에서 기독교 측의 반발로 보고 있다. 네티즌들은 조계종 총무원 홍보국과 기관지 <불교신문> 등 불교계 매체 기사도 조롱했다. 이런 반응은 불교계가 ‘나랏말싸미’를 선전 선동 수단으로 쓰고 있다는 주장으로 번지고 있다.

나무위키에 ‘나랏말싸미’ 논란을 정리한 글에는 “감독마저도 한발 물러선 태도를 보이는 와중에 불교계는 영화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영화가 망하자마자 온갖 불교계 인물들이 튀어나와 어거지를 부리고 떼를 쓰는 모습은 이 영화와 불교계의 연관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불교계 행보가 개봉 1주도 안 되어 예매율 10위로 고꾸라진 나랏말싸미에 대한 평을 나쁘게 하면 나쁘게 했지 좋게 하진 않았다. 영화에 기대어 자신들의 신앙을 비신자들에게 강요하는 불교계 행태는 개독교와 다를 바 없는 명백한 추태이다. 또한 자국의 역사를 위서와 신앙에 기반해 왜곡하는 것은 불교계가 그토록 선전하는 '호국불교'의 허무맹랑함만을 강조한다”고 했다.

언로 왜곡 시민으로서 일침 필요

김형남 변호사(법무법인 신아)는 <불교닷컴>에 기고한 글을 통해서 “지배계급인 성리학자들이 기록한 왕조실록을 언제부터 그렇게 신봉했다고, 역사 왜곡이라고 하나. 역사에 대한 앎을 위한 노력은 정형화된 결론으로 끝을 맺을 수 없다”고 했다.

김 변호사는 “불자라는 이유만으로 집단적으로 대응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지성의 발전과정에 대한 아픈 상채기를 나은 언로의 왜곡에 대해선 시민으로서 힘차게 일침을 놓아야 한다”고 했다.

조철현 감독 "세종대왕 폄훼하려던 것 아냐"

논란과 혹평이 계속되자 영화를 제작한 조철현 감독은 최근 공식입장을 발표했다.

조 감독은 “실존했지만 역사 속에 감춰져 있던 신미라는 인물을 발굴해 훈민정음 창제 주역으로 조명하려고 이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다. 세종대왕께서 혼자 한글을 만드셨다 하더라도 그 내면에서 벌어졌을 갈등과 고민을 드라마화하려면 이를 외면화하고 인격화한 영화적 인물이 필요한데, 마침 신미라는 실존 인물이 그런 조건을 상당히 가지고 있었기에 채택하였던 것”이라고 했다.

조 감독은 실존 인물 신미 관련 정사에 남겨진 근거들을 조목조목 나열하면서 “신미가 범어를 비롯한 외국어에 능통했고 대장경을 깊이 공부했다고 언급한 실록 기사들까지 감안하면 1443년 12월 이전의 역사 공백을 개연성 있는 영화적 서사로 드라마화할 만한 근거는 되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수십 년간 세종대왕과 한글을 마음에 품고 살아왔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 대해 반감을 표하는 분들의 마음을 안다. 그러나 제작진의 마음과 뜻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폄훼하고자 한 것이 결코 아니다. 관객 여러분의 마음을 존중한다. 많은 관심에 감사하다”고 했다.

신미 스님은?

신미 스님은 유학자 김훈의 맏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수성(守省). 성균관에서도 총망받던 인재였지만 아버지가 유배생활을 하자 법주사 복천암에서 출가했다. 출가 후 강화 정수사 등 여러 사찰에서 경전을 공부하면서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몽골 파스파 문자 등을 익혔다. 스님은 관직을 하던 동생 김수온을 통해서 자식과 왕비를 잃은 세종대왕과 인연을 맺어 궁궐 내 내원당(內願堂)에서 법회를 주관했다. 신미는 세종을 도와 산스크리트어를 기반으로 한글창제에 힘썼다. <석보상절>을 비롯해 <원각경> <선종영가집> <수심결> 등 다수를 한글로 펴는데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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