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들의 공부법-공부하지마라
선사들의 공부법-공부하지마라
  • 불교닷컴
  • 승인 2009.11.10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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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엄아아, 법法 받아라아아아!

공부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공부인가?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하는가? 세상 사람들이 공부하는 목적은 대다수 자아의 확장이다. 수만 가지의 지식과 기술을 밑줄 긋고 별표를 수십개 표시하면서 머리 싸매고 하는 공부. 이를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고 비싼 연봉을 받기 위해 피땀을 흘리며 노력한다. 그들의 공부는 다른 사람들을 내 발밑에 두고 좀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발돋움하기 위한 발판이다. 그런데 여기에 별종이 있다.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이 천하를 호령하기 위한 공부를 하는 반면 천하를 손에 쥔 사람을 뛰어넘는 사람이 있다. 수천만 명을 발아래 두었던 황제를 무시하고 비웃었던 사람이 있다. 바로 보리달마(菩提達磨)다.

양(梁) 나라 무제(武帝)는 불교에 심취해 많은 불사(佛事)를 이룩했다. 무제는 이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드러내며 달마에게 자신의 공덕을 물었으나 달마는 황제에게 공덕이 없다고 하며 원하는 답을 해주지 않았다. 이에 무제는 대노해 달마를 쫓아버렸다.

무제는 불교를 전폭적으로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나름 자비를 이데올로기로 삼아 선정을 베푼 왕이다. 패륜과 학정을 본능처럼 일삼은 기존의 황제들과는 차별화된 캐릭터다. 하지만 달마는 그것을 별반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착하게 산다고 해서 깨달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미안하지만 진실을 속일 순 없었을 것이다. 결국 달마는 자부심을 가지고 지켜온 가치를 통렬하게 부정했다. 절대 권력의 면전에서 목숨을 걸고 ‘무성(無聖)’을 증명해보인 셈이다.

그렇다면 보리달마는 무엇을 공부한 것일까? 어떤 공부를 해야 황제를 조롱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한 답이 이 책에 담겨있다.《공부하지 마라》는 세간의 통념에 갇힌 ‘공부’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출발해 과연 진정한 공부가 무엇인지 성찰한다.
 
밥숟가락 드는 게 수행이고 남에게 욕먹는 게 수행이다

《공부하지 마라》는 조사선(祖師禪)에서 바라본 공부법에 관한 책으로 선사들의 활연대오(豁然大悟)하는 순간을 포착해 구수한 입담으로 풀어놓은 책이다. 여기서 조사선이란 글자의 뜻풀이에 매이지 아니하고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선법(禪法)을 이른다.

선사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진리를 소유해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진리를 알기 위해 읽거나 외우지 않았으며, 문자와 개념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오직 바로 볼 뿐이었다. 나병 걸린 병자를 병자로 보지 않았고, 병자 이전에 사람임을 잊지 않았다.
깨달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황량한 거리를 자유롭게 부유하는 비닐봉지에 있으며, 보살은 편의점에서 사먹는 라면에서도 만난다. 멀리 찾을 필요가 없다. 밥숟가락 드는 게 수행이고 남에게 욕먹는 게 수행이다. 인생이 곧 수행이다.

이 책에는 수많은 선사들이, 초조 보리달마부터 마조 도일 ․ 임제 의현 ․ 조주 종심 … 퇴옹 성철까지, 조사선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찰나의 일화와 어록을 담았다. 선사들이 깨친 그 순간의 생생함과 역동성에 절로 등줄기에 땀이 흐를 정도다. 이는 생생하게 풀어내는 저자의 구성진 입담이 한몫한다.

기존의 조사선에 관한 책들이 틀 안에 갖혀 있다면 《공부하지 마라》는 ‘틀’이라는 허상을 깨치고 나온 책이다.

저자 약력_장영섭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2002년 불교신문 기자로 입사해 현재 취재차장으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44인의 조계종 고승들과 대담한 내용을 엮은 《그냥, 살라》, 스님들의 교육기관인 강원(講院)의 어제와 오늘을 이야기한 《떠나면 그만인데》, 전국 42곳 사찰에 깃든 풍물과 역사에 관한 인문학 에세이 《길 위의 절》이 있다.

추천사

교계신문을 읽다 보면 유독 눈길을 오래 머물게 하는 꼭지가 더러 있다. 읽고 나서 ‘누구 글인가’하고 살피면 ‘장영섭’이란 세 글자가 자주 눈에 띄었다. 오래 생각하는 이의 묵힌 글은 아는 사람은 알아본다. 굳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을 빌리지 않아도 사실 모든 고전은 알고 보면 옛글이 아니라 현재글이다. 기록은 옛사람이 했지만 읽는 사람은 지금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소품이라도 온축(蘊蓄)이 필요하다. 모르는 이는 모르지만 아는 사람은 알아채기 마련이다. 그래서 눈 밝은 이를 만나면 언제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곤 한다.
- 원철 스님, 해인사 문수암

책을 읽으면서 손에 땀을 쥐었다. 혹시 선어록의 원문을 잘못 번역해놓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소감을 덧칠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오히려 이 책을 통해서, 역시 선어록은 ‘스스로가 직접 읽는’ 속에 맛과 멋이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이 책은 나에게 강력한 진동을 길게 주었다. 저자의 삶과 혼, 현장성과 역사성, 그리고 문장의 완결성과 성숙함 등이 골고루 갖추어졌다. 무엇보다 조사선의 핵심을 알기 쉽게 설명한 점이 돋보인다.
- 신규탁 교수, 연세대학교 철학과

본문 속으로

기왓장 깨지는 소리에 인생을 알아버렸네
‘돈(頓)’은 시간상의 재빠름을 나타내는 글자다. 조사선에서 깨달음은 순식간에 벌어지는 사건이다. 영운 지근선사와 같이 깨달은 경우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향엄 지한(香嚴智閑)은 어느 날 마당을 쓸다가 돌이 대나무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개오(開悟)했다. 동산 양개(洞山良价)는 강을 건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깨쳤고, 천녕 범기(天寧梵琦)는 성루의 북소리를 듣고 깨쳤다. 청허 휴정(淸虛休淨)은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깨쳤고, 고봉 원묘(高峰原妙)는 목침이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쳤다. 모두가 찰나에 견성을 완료했다. 순간적이고 우연적이다. 혹자들은 돈오를 불가사의한 사건, 더 나아가 얼토당토않은 사기라고 깔본다. 모름지기 깨달으려면 시간적이고 내용적인 공력을 들여야 한다는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들도 어지간히 흉을 볼 것이다. 하지만 돈오는 해석도 설명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냥 보라는 것이다. 생각을 쉬면 보인다.
- 82쪽

보살은 라면에서도 만난다
영혼을 정화하겠다며 인도를 찾는 게 유행이다. 갠지스 강변을 서성이는 수행자들의 눈에서 가난한 평화를 배운다고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빈곤과 권태의 그늘만 자꾸 눈에 밟힌다. 깨달음은 황량한 거리를 자유롭게 부유하는 비닐봉지에도 깃들어 있다. 보살은 전날 숙취를 풀기 위해 편의점에서 사먹는 라면에서도 만난다. 떠날 필요가 없다. 밥숟가락 드는 게 수행이고 남에게 욕먹는 게 수행이다. 인생이 곧 수행이다.
- 125쪽

나무는 노래하고 돌은 춤춘다
사물을 표현하려 애쓰지 말고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진실 이전의 진실과 해후할 수 있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행복’이라는 언어 때문이다. 행복이란 말에 속아 행복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흔 두 살 먹은 갓난아기’는 두고두고 그게 걱정이었다.
- 128~129쪽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것
선사들은 ‘진리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으며 그것을 느낄 줄 아는 당신이 바로 부처’라고 입이 닳도록 말했다. 인간의 구원 불가능성은 일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정작 신(神)이 찾아와도 신분증부터 내놓으라고 요구할 테니 말이다.
- 212쪽

‘아침형 인간’이란 폭력
게으를수록 적응에 능숙하다. 자유를 그리워하지 않으니까 자유롭다. 궁극적인 해방은 무관심 ․ 무개념 ․ 무계획 아닐까. 바람은 절대 몸을 다치지 않는다.
- 214쪽

그냥 살다, 간다
누구나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간다. 삶은 규정할 수 없고 평가할 수 없다. 지나가면 그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가 가여워 기록을 남기고 의미를 부여하려 애쓴다. 죽어서까지 남들의 말밥이 되고 싶어 한다. 허공에 솜털이라도 날린다면 허공은 이미 타락한 것이다.
- 216쪽
패배의 힘
학이 아무리 고고하다 한들 아무 데서나 밥 먹고 똥 누는 짐승일 따름이다. 봉황 역시 신화에서나 거들먹거릴 뿐 실체조차 없는 풍문이다. 선(禪)의 경지는 등산 따위로 이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 220쪽

늙는다는 건 살아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정력적으로 살수록 명을 재촉하는 격이다. 곧 소식하고 자족하면서 가늘게 살아야 길게 산다. 산소의 이중성은 죽기 위해 산다는 모순이 일상에서 통렬하게 적용된 사례다. 늙는다는 건 살아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물론 죽음을 늦출 순 있어도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죽어줘야 또 누가 산다. 천하의 왕후장상이라도 시간이 먹다가 잠깐 남겨둔 사과에 지나지 않는다.
- 222쪽

│장영섭 지음│224쪽│조계종출판사 펴냄│10,000원│(02)720-0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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