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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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암
  • 승인 2019.10.18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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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의 세종과 신미

지난 초여름에 영화로 제작된 극영화 '나랏말싸미'는 개봉 한 달도 안 돼 전국영화관에서 내려야 했다.
'훈민정음' 하면 오로지 세종대왕의 독창적인 문자 창제로 역사에 길이 빛날 일인데 느닷없이 일개 무명 승려가 창제의 주역이라 하니 관객들이 발끈한 것이다.
그리고 극중 천민 신분인 승려가 대왕을 가르치고 훈계한 것이 몹시 거슬리고 신성모독이라는 듯 화가 난 대중들이 모두 들고일어난 탓이라고 언론매체가 보도했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사건에서 여러 가지 오류와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영화와 드라마는 사실을 그대로 찍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며 많은 부분 픽션을 가미해서 흥미와 사실을 혼동케 할 수 있는 제작 기법을 쓴다.
처음부터 스토리와 내용이 기정사실로 정해진다면 흥미도 사라지고 뻔히 아는 작품을 누가 보겠는가? 이 영화는 상영이 되기 전 인터넷에서 줄거리가 소개됐고 새로운 호기심을 유발하기보다 자칫 조선조 오백 년에 빛나는 세종의 위업을 깎아내리고 신성을 모독한 작품이라고 격하되고 정치적으로 해석될 운명을 안고 있었다.

둘째, 6백 년 동안 세종 혼자만의 창제라고 알려지고 역사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이제 와서 웬 거지 같은 사람을 등장시켜 대왕을 욕보이고 역사를 왜곡시켜서 국민을 현혹시키냐 하는 분노의 감정이었다.

셋째, 역사 속의 절대 권력인 왕실과 당시의 양반, 기득권의 기록이 먼저인 왕조실록 외에는 인정할 수 없다는 고집이랄까? 오만이 다양한 의견과 자료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보통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라고 한다. 사실과 픽션을 가미해서 만드는 사극에서는 더욱 그러함에도 한국인은 기나긴 세월, 영웅에 목말랐고 조선의 대표적인 역사 인물, 세종과 이순신을 숭배하는 나머지 어떤 다른 의론을 제기하면 안 된다는 대중들의 함의가 있음에도 십여 년의 오랜 기간 조감독 시절부터 '세종과 신미'에 대해 숨은 자료를 찾고 고민한 감독은 조선 오백 년 제1의 대사건인 훈민 창제의 비밀을 영화화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고, 그리하여 상영 후 야기될 여러 부작용과 거부감을 예상 못 했으며 차단도 못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명제는 틀렸다. 민감한 주제와 소재는 피해야 하며 적당히 오락성을 섞어 관객을 울리고 웃기면 흥행이 보장된다는 것을 감독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작품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만든 것이 화근이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일반적인 흥행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만들어 재미는 없으나 유명 감독이나 평론가도 잘 만든 영화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십여 년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 영국 작가의 '다빈치 코드'는 소설의 유명세에 힘입어 영화로 만들었고 영화 역시 대성공이었으나 유독 한국에서는 영화개봉을 막는 기독교단의 반발에 부딪혀 상영 금지가 될 뻔했다. 한국 역시 그 소설이 수백만 부 팔려 베스트셀러로 일반 시민 사이에 화제가 됐다. 정작 영화로 들어오니 파급효과가 더 크다고 생각한 탓인지 아니면 기독교의 잘못된 역사를 알게 되면 교인 숫자가 줄어들 것이라는 현실적인 계산을 한 것인지 교인들을 동원해 맹렬하게 반대했지만, 법원은 가처분을 각하하고 상영 허가를 내줬다. 세상이 과거 기독교와 서양문명이 저지른 죄악을 알고 있으며 크게 충격을 받지 않는데 비해 한국기독교 100년사에 아직 교인들이 순진무구(?)해서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인다는 이유였다. 
 
인류사는 매우 복잡하게 내려왔다. 신·구석기시대의 원시인에서 부족 씨족사회를 거쳐 국가 민족이 형성되고 외부 전쟁과 내부 전쟁, 갈등과 분열로 역사에 남거나 사라지거나 잊혀진 민족역사도 숱하게 존재했으니 말이다.
거기에는 수많은 역사적 배경이 있고 혹은 숨겨져 있으며 아직 밝혀지지 못한 역사 진실이 땅에 묻히거나 사라진 고고학적 유물보다 많다.
그러나 불과 수백 년 사이에 인류사는 다시 써야 할 정도로 많은 분야는 기록 역사뿐 아니고 인류사를 통째로 바꾸고 있다. 수백 년 수천 년 아니 수백만 년의 인류사와 생물학이 바뀌고 있는 첨단 시대를 살고 있는 현인류다.

수백만 년 전 유인원인 침팬지와 인간이 공동 조상이라고 밝혀졌을 때 그때의 충격은 어떠했는가 어떤 저명한 동물학자는 인간을 털 없는 원숭이라 했는데 맞는 말이다. 야생에서 수십만 년을 산 호모사피엔스는 원숭이와 같이 온몸이 털로 뒤덮여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동양인보다? 털이 많은 유럽인이 6개월 정도만 얼굴과 몸의 털을 깎지 않으면 털이 무성해서 인간인지 분간할 수 있을까?

'유일신 창조'를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 생각한 기독교인은 까무러칠 일이었다. 이른바 진화론은 창조론과 반대의 개념으로 생각한 성직자와 교인들은 진화론자 다윈과 동조자를 사탄 악마로 규정하고 역사적으로 단죄했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하면서 단순한 인간의 머리를 복합적인 '뇌과학'으로 명명시키면서 인간의 뇌에는 수백만 년의 기록이 저장돼 있다는 디엔에이의 생명과학 앞에서 더 이상 종교적 미신이나 맹종을 강요할 수 없다.

우주와 지구도 성경 말씀대로 조물주가 며칠 만에 떡 주무르듯 인간과 자연생물을 만들었다는 교리는 물론 유아기에는 먹혀들 동화지만 '하나님 말씀' 외에는 관심이 없는 교인들에게는 금과옥조의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종교의 맹신과 광신은 매우 위험하다고 한다. 번번이 발생하는 종교의 광기는 각종 테러와 사회 범죄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세종과 신미, 한글 창제의 역사적 배경
 
수많은 한글학자와 국어국문학 학자들은 올해도 다름없이 훈민정음 창제는 오직 세종 혼자만의 작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왕조 실록에 의거해서다. 그렇다고 왕실과 기득권의 기록인 요샛말로 하면 대통령 기록물인데 왕실과 정부의 기록만으로 나라와 사회를 전부 담을 수 있을까? 한마디로 불가능하다. 세상에는 기록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는 사실이 얼마든지 있다. 불과 몇 년, 몇십 년 전의 대통령과 정부 기밀이 공개되지 않는 기록물이 수두룩하다. 백 년여 전 마지막 왕실인 고종과 명성황후에 관한 사건도, 그 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도 아직도 규명 연구 중에 있는 현실이다.

하물며 6백 년 전 경천동지할 대사건인 문자 창제의 비밀이 단 한 줄 '세종의 창제'다. 이것으로 훈민정음의 창제 역사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유치찬란한 발상이고 학자와 후손들의 직무 태만이다.
더욱이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세종의 ‘유일창제론'외에 이론을 제기하는 것은 불충이고 역사 왜곡이며 신성모독이라고 폄하해서 입을 막아버린다는 사실이다.
오래전부터 한글을 연구해온 저명한 언어학자 정광 교수는 여러 권의 저서와 논문에서 우리의 한글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문자가 아니며 여러 나라의 문자와 음성학을 연구하고 참고해서 우리의 문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즉 당시에도 사용했던 몽골 여진 산스크리트 티베트어로 한자와 달리 표음문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그런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형님인 효령대군의 추천으로 신미대사를 만나보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세종이 신미를 만나고 뭘 깨달았을까? 한글 창제를 극력 반대한 집현전 학자와 관료들, 또 당시 명나라의 속국인 조선이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속국이 아닌 완전 독립국가를 의미하는 바 국가기밀에 속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니까 세종은 이미 병이 들어 만성 당뇨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국내외로 새문자 창제 포기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던 차에 천재 어학자이며 유교와 불교인 문학의 통달한 신미를 만났으니 구세주를 만난 것과 진배없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일설에는 우리 학자들이 주장하는 근거로 내세우는 왕조 실록에 세종이 한글 창제 후 왕비 심 씨가 돌아가시고 49재를 지내면서 비로소 신미를 처음 만났으니 훈민정음과 신미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는 기록만으로 성립될 수 없고 당시의 역사 배경과 전후좌우 사정의 기록되지 못한 진실을 찾아야 제대로 된 역사가 될 수 있다. 정광 교수와 한글을 연구한 전문학자들은 신미를 왕조 실록에 넣지 못한 당시의 유교 지배 정권의 거부감과 혹시도 생길지 모르는 중국과의 마찰 때문에 신미를 넣지 않았다고 한다. 신미가 없었으면 한글 창제도 한글 보급과 계승이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신라 때부터 기호와 문자해석, 목판인쇄와 고려의 금속활자 대장경목판 등에 승려들이 주도했고 언어 문자학자들이 많았다.
앞으로 더 많은 한글 국어 역사 국문학 언어학자들이 다양하게 배출돼 한글의 창제와 구성 배경 등을 규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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