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참사와 불교의 역할
아이티참사와 불교의 역할
  • 이기표 원장
  • 승인 2010.02.01 1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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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표의 세상이야기]

며칠 전, 내가 살고 있는 부근 사찰 마당에 모금함 하나가 새로 등장했다. 한 쪽에는 ‘아이티 지진피해 돕기 함께해요’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어느 늙수그레한 보살님이 그 앞을 지나다 걸음을 멈추더니 꼬깃한 1,000원 짜리 몇 장을 집어넣고는 함 앞에 꿇어앉아 삼배를 올리는 것이었다. 부처님 전에 예를 올리듯 지극한 모습이었다.

그 보살님은 참혹한 재앙에 희생당한 불쌍한 영혼들의 극락왕생을 빌었을 것이다. 부상으로 신음하는 이들이 빨리 치유되기를 빌었을 것이다. 살아있는 자들의 아픔도 위로했을 것이다.

그런데 입례(立禮)까지 마치고 돌아서던 보살님이 장탄식을 한다.

“사람들은 다 죽어 가더만 이제사 돈을 모아 무슨 도움이 되겠노?”

불교는 느림의 종교다. 무슨 일이든 서두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아이티 지진이 발생한지 1주일이 다 되어서야 사찰마당에 모금함이 세워진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러나 재난지역의 구호활동은 규모보다 시기가 중요하다. 1분 1초라도 서둘러야 한다. 재난현장에는 언제나 죽어가는 생명이 있고, 그 죽어가는 생명부터 구해내는 것보다 급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 불교계도 그런 상황에 대비하여 스리랑카 쓰나미 참사 이후 응급구호봉사단 성격의 재난구조대가 조직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아수라의 현장에 불교의 자비로운 손길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새의 즐거움은 깊은 숲속에 있고, 물고기의 즐거움은 깊은 물속에 있다고 하지 않던가. 자비의 손길도 중생의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 때 존재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유학자 이광사(李匡師)가 동해의 외딴섬 신지도라는 곳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의 일이다. 그는 해마다 봄이 되면 박을 심었다. 그리고 박이 익는 대로 따서 구멍을 내고 속을 파낸 다음 “같은 글을 쓰는 땅에서 이 박을 얻는 자가 있어 바다 동쪽에 이광사가 있음을 알면 족하다”라는 글을 적은 쪽지를 넣고 밀랍으로 봉한 뒤 그 박을 파도에 띄워 보내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존재가치를 잃으면 발전할 수 없다. 불교가 자비를 실천하는 종교라는 것을 세계에 알리지 않고서는 불교의 세계화를 도모할 수도 없다

아이티의 재앙을 포교에 이용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지구촌 어느 곳이 되었든 보다 적극적인 재난구조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자비를 실천하겠다고 하는 불교의 도리라는 말이다.

* 이 원고는 지난 1월 26일 송고됐으나 편집이 늦어져 2월 1일 웹에서 출판된 점 양해 바랍니다.

   

1956년 남해에서 태어난 그는 불교방송 부산사업소장, 진여원불교대학 학장을 거쳐 부산보현의집 원장을 맡고 있다. 부산노숙자쉼터 협의회 회장을 비롯해 독거노인을 위한 무료급식 등 봉사활동을 펴고 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Fact 포럼 대표, 한국전력공사 이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제로에서 시작하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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