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세상에 맞춰야 쓸모있다
나를 세상에 맞춰야 쓸모있다
  • 이기표 원장
  • 승인 2010.02.04 1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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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표의 세상이야기]

옛날, 도가 높은 고승이 있었다. 글씨를 쓰면 글씨 속에서 천둥소리가 들리고, 그림을 그리면 그림 속에서 향기가 풍겨날 만큼 서화(書畵)에 달통하여 세간의 우러름이 높았다. 그러나 세수가 다하여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제자들이 몰려와 임종을 지키던 중, 한 제자가 스승에게 청했다.

“스승님, 도가 높은 선사님들께서는 후세가 기릴만한 임종게(臨終揭)를 남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도 한 말씀 남겨주시지요.”

“바람처럼 왔다가 구름처럼 갈 뿐인데 무엇을 남기고 가겠느냐? 나는 할 말이 아무것도 없느니라.”

그러자 모여 있던 제자들이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떻게 하면 멋진 유언을 받아낼 수 있을까 궁리하다 이렇게 물었다.

“스님, 돌아가시고 싶습니까?”

그렇게 물으면 적어도 ‘이제 내 갈 곳으로 돌아가고 싶구나.’ 라는 정도의 대답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스님이 남긴 말은 반대였다.

“죽고 싶지 않다!”

기막힌 화두를 기대했지만 영 아니었다. 그보다 세간의 우러름을 받는 스님이 죽음을 앞두고서도 생에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고 소문나면 스승의 덕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물론 제자 된 자신들의 명예도 손상을 입는다. 그렇게 될 것을 염려한 제자들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도 스님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죽고 싶지 않다!”

그 말만 되풀이한 채 스님은 눈을 감고 말았다. 끝까지 멋진 게를 받아내지 못한 제자들은 당황했다. 남들이 스님의 마지막 남긴 말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가 스승님께 질문을 잘 못했네. ‘돌아가고 싶으냐?’고 묻지 말고 ‘살고 싶으시냐?’고 물었어야 했어. 그랬다면 스승님께서는 분명히 ‘살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셨을 거야.”

삶이나 죽음은 인간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불가피한 것이다. 스승이 ‘죽고 싶지 않다’고 한 것도 불가피한 것이니 받아들일 뿐 어찌할 도리가 있겠느냐는 뜻이었다. 생에 집착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은 집착을 잘라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禪)의 경지다. 그러나 제자라는 사람들은 스승의 유언까지 미리 규격을 정해놓고 거기에 꿰맞추려하다 보니 이런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무엇이든 규격에 꿰맞추기를 좋아한다. 집을 새로 옮기면 방이나 부엌의 규격에 맞는 살림으로 바꿔야 직성이 풀린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까지도 나의 규격에 맞춰주길 원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나와는 맞지 않는다고 투덜대며 멀리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나(自我)를 깨달으라.’고 하는 까닭은 자아라고 하는 것이 이처럼 이기적이고 폐쇄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아야 세상을 나의 규격에 맞추려 하지 않고, 내가 세상의 규격에 맞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나를 세상에 맞춰야 쓸모 있는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1956년 남해에서 태어난 그는 불교방송 부산사업소장, 진여원불교대학 학장을 거쳐 부산보현의집 원장을 맡고 있다. 부산노숙자쉼터 협의회 회장을 비롯해 독거노인을 위한 무료급식 등 봉사활동을 펴고 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Fact 포럼 대표, 한국전력공사 이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제로에서 시작하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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