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다. 정치권승들의 도박과 은처, 폭력과 부패로 불교가 망해가도 철따라 방함록에 이름 올리는 2천5백여 스님들이 계시기에 여전히 한국불교에는 한가닥 활로가 있다고 굳게 믿었다. 눈푸른 납자들이 조사의 관문을 뚫고 한소식 깨달으면 불교를 어지럽혀온 한줌도 안되는 사이비들은 저절로 소탕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전직 총무원장인 자승스님이 중심이 되어 벌이는 위례신도시 종교부지의 이른바 ‘안거놀이’ ‘결사놀이’를 들으면서 이제는 불교의 마지막 보루인 수행조차도 오염된 듯하여 슬프다.
왜 ‘천막법당’일까? 예전 한나라당의 천막당사가 생각나는 것은 지나친 일일까? 박근혜는 대선과정에서 차떼기 정치자금을 받은 것이 드러나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자 기존 당사엔 단 한 발짝도 들여놓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당이 부패 정당, 기득권 정당이란 오명에서 완전히 새롭게 출발한다”며 여의도에 천막을 쳤다. 천막당사로 한나라당은 위기에서 탈출했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위기를 ‘천막법당’으로 돌파해야 할까? 백번 양보해 지금 천막에 들어가 안거를 해야 할 만큼 선수행처가 잘못된 점이 있는가? 9명 승려가 수행할 처소가 없을 만큼 선방이 부족한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천막법당에서 안거를 하겠다는 9명이 가장 잘 알 것이다.
오히려 한국불교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는 것은, 도박, 폭행, 돈봉투선거도 모자라 생수비리와 국고보조금 횡령 의혹을 받고 있는 등 온갖 불의의 몸통이며 종단을 사유화한 ‘강남원장’이 여전한 실세로 군림하고 있는, 자정이 불가능한 종단의 현실이 진정한 위기의 근원이다.
“11월11일 동안거 결제일을 하루 앞둔 11월10일 서울 봉은사 보우당에서 위례 상월선원 정진대중과 외호대중 60여 명이 모여 천막결사의 원만 회향을 발원했다.”며 종단 기관지를 통해 요란하게 선전해야 할 일인가? 게다가 안거를 하겠다는 천막법당을 놔두고 봉은사에서 행사라니. 두고두고 이해 안 되는 일들만 벌이고 있다. ‘남대문시장’ ‘들썩이는’ ‘음성공양’ 등등 전통 수행처에서는 절대로 금기시하는 말들을 예사로 하고 있다. 저들은 과연 수행을 무엇으로 보는 것일까? 공연이고 이벤트일까?
이들의 안거놀이가 만들어진 기사로 주목을 받는 동안, 진정으로 수행하려는 스님들은 전국의 선원에 조용히 방부 들이고 동안거를 날 채비를 마쳤을 것이다. 과연 어디에 한국불교의 희망이 있는지는 자명하다.
또한 ‘천막결사’를 보면서 요세(了世)스님에 의한 천태종의 백련결사(白蓮結社)와 보조국사 지눌(知訥)스님의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생각한다. 지눌스님의 정혜결사는 수행하는 스님들만의 결사였기에 우리나라에서는 ‘결사’라고 하면 스님들의 모임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성철스님의 봉암사 결사가 바로 그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른바 ‘천막법당’의 ‘결사’는 한국불교 전통에서는 없던 일이다. 중국의 찬영스님은 승사략(僧史略)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1. 대중을 교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사(結社)이다.
2. 이 결사로써 많은 복리를 구할 수 있다
3. 선(善)을 행하는 사람은 그만큼 보답을 받는다. 그 보답 중 가장 큰 것이 결사이다.
즉 결사란 본래 사원을 수호하는 모임이며, 동시에 수행을 함께 하고 공덕을 짓는 모임이다. 부처님 앞에서 서원을 세운다는 점에서 계약에 기초한 일반 사회의 모임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보조스님은 <정혜결사문>을 통해 세속화된 불교, 미신불교를 비판하고 타락한 형식불교를 벗어나 성불도생의 수행불교, 정법불교를 주창하였다.
지금 우리 시대가 비판해야 할 세속화된 불교를 자승을 비롯한 권승들이 권력을 과시하는 결사로 더욱 천박하게 만들고 있다. 돈의 노예가 되어버린 불교현실이다. 은처와 폭력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타락한 형식불교다. 하루 한끼, 씻지 않는 고행을 자랑으로 삼는 타락한 과시불교다. 어디에 진정한 수행불교, 정법불교가 있는 것인지 눈 밝은 이들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