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그, "카터는 방북 전 이미 김정일과의 면담이 없음을 알았다"
그레그, "카터는 방북 전 이미 김정일과의 면담이 없음을 알았다"
  • 최재천 변호사
  • 승인 2010.09.05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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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시사큐비즘]
   

도널드 그레그 前 주한 미 대사가 뉴욕타임스 글로벌판(8월 31일 자, 미국 기준)에 “북한의 의중 떠 보기”란 제목으로 기고를 했습니다.(아래는 인터넷판 해당 기사 화면)

이 기고문에서 가장 뉴스가 될 만한 부분은 역시나 ‘러, MB 타격 우려 천안함 보고서 비공개’란 대목이었지요. 그래서 대부분의 한국 언론들은 이 부분을 주된 뉴스로 해서 보도한 바 있지요.(경향 최민영 기자, 한겨레 류재훈 기자 기사)

하지만 그레그 대사 기고의 본래 의도는 천안함에 대한 부분이 아니었더군요.
i) 천안함 이후 카터 전 대통령과 같은 의미 있고 비중 있는 중립적 인사의 방북이 갖는 의미,
ii) 한국과 미국의 북한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의 재검토, 그리고
iii) 이번 방북은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의미

등을 조명하는 글이었습니다.

한국 언론이 놓치고 있는 듯한 몇 가지 시사점에 대해 다시 한 번 검토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미국은 카터가 김정일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출발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카터가 사적 시민의 자격으로 이번 임무를 수행했으며 백악관의 메시지 같은 건 전한 바 없다고 주장하는 데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다. 북한인들 또한 카터 씨가 출발하기 전 그에게 북한 최고 지도자인 김정일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 이하 파란 색으로 표시될 당 기고문의 번역분은 의미만 왜곡 없이 전달하는 수준에서 최대한 빠르게 초역하다보니 대단히 거칠게 이뤄진 것이라는 점, 그래서 전문 번역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많다는 점을 양해 바랍니다. (원문 링크)

그레그 대사는 기고문에서 처음부터 카터와 김정일의 만남은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지금까지 국내 언론의 보도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셈이지요? 오늘(9.2.) 자 중앙일보 강찬호 칼럼(38면 '노트북을 열며') 제목은 “대동강 오리알 된 카터 방북”입니다. 이 글의 한 대목을 인용해볼까요?

강 차장은 “카터 주변 인사들에 따르면 카터는 분명히 김정일이 만나줄 것이란 북측의 확약(assurance)을 받고 방북했다.”라고 적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카터가) 귀국 후 예정된 기자회견을 취소함으로써 실패한 방북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냈다.”라고 했습니다. 다르지요?

둘째, 북한의 후계자로 예상되는 김정은에 대한 미국 초청 문제가 거론된 적이 있었다.

“취임 이후 대북 문제라는 난제를 물려 받은 오바마 대통령은 최고 지도자가 모호하고 호전적으로 보이는 북한을 다루는 문제에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작년에 제기된 ‘백악관이 김정일의 막내 아들이자 유력한 권력 계승 후보인 김정은을 미국으로 초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물론 미국 일각의 제안이었겠지요. 그럼에도 이런 제안이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 아니겠습니까? 관련해서 오늘(9.2.) 자 조선일보 국제면(A17면) 이태훈 기자의 탑 기사 제목은 “29년 집권 무바라크, 아들과 방미...‘대권 세습’ 박차”입니다. 이 기사가 인용하는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지는 “(이집트) 집권층 내에서도 국민들 사이에도 이미 무바라크의 아들인 가말의 권력 승계는 ‘다 정해진 일’”이라고 분석했습니다. 5선 대통령으로 29년째 독재체제를 구축해온 이집트 대통령의 후계자로 지목되는 아들과의 동반 방미를 허용한 미국. 그렇다면 일각에선 김정일과 김정은의 공동 방미가 제안된 적이 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다시 그레그의 기고문입니다.

“(천안함 이후 강화된) 미국의 압박은 또한 그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20대 중반인 김정은의 마음 속에 미국에 대한 불신과 적대를 키울 가능성이 크다.”

제3자적 입장이라 이런 염려가 가능한 걸까요?

셋째, 카터를 북한으로 보낸 것은 백악관의 북한에 대한 입장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기고문의 결론 부분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카터를 이 시점에 보내기로 선택한 백악관은 북한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바꾸려 하고 있다고 평가해도 무방할 듯하다.”

백악관의 입장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얼마 전 힐러리 미 국무장관이 기존 국무부의 관료들을 배제한 채 북한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에 대해 청취했다는 뉴욕타임스의 기사가 있었지요?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최근 국무부 고위급 인사와 외부 전문가들을 불러 대북정책 평가회의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중략)... 평가회의에서 클린턴 장관은 이제 앞으로 어떤 식으로 북한에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 달라고 외부 전문가들과 전직 당국자들에게 요청했다...(중략)... 클린턴 장관이 직접 국무부에서 북한 관련 정책회의를 주재한 일은 드문 일이었다. 그는...(중략)...기존 대북 라인 대신 앤메리 슬로터 국무부 정책실장에게 회의 준비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프레시안, “<뉴욕타임스>힐러리, 현재의 대북정책 못 견뎌해”, 8.29. 16:45:09 보도)

다시 그레그의 기고문입니다.

“우리는 아직 카터가 평양에 있는 동안 천안함 문제를 논의했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그 전직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첫 번째 지도자였던 김일성과 1994년에 우호적이고도 유용한 대화를 가졌던 탓에 북한으로부터 존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중략)

...나 자신이 북한 관리들과 수년 간 접촉한 바에 따르면, 나는 그들이 솔직하고 그들 정부의 입장을 명쾌하게 설명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중략)

...카터 씨가 곰즈 씨 외에 더 많은 것을 갖고 돌아왔을 거라고 믿는다. 김정일을 제외한 최고위급 지도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간파한 카터의 통찰은 현재의 제재와 적대 위주의 대북 태도가 긍정적인 효과가 거의 없고,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평양과의 대화로 복귀할 필요가 있다는 오바마 행정부 내의 최근 깨달음과 일치할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그레그 기고문의 핵심인 셈입니다. 카터는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북한 체제의 속성상 카터와 대단히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카터는 단지 곰즈 씨만을 데려 온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많은 이해와 통찰을 가져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카터의 통찰력은 최근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입장 변화와 일치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지난 달 31일 해리티지 재단에서 한반도 전문가들의 세미나가 있었더군요. 대단히 보수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브루스 클링너(B. Klingner) 연구원은 “한국은 천안함 폭침 문제 해결을 남북대화의 전제조건에서 내걸었다가 후퇴했다”며 앞으로 어떤 입장을 보이느냐에 따라 미국이 입장을 달리할 것으로 전망했지요.

그레그의 기고문에서 인용된 남한 고위 외교관 중 한 명의 말입니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과 통하는 모든 다리를 불태웠고, 출구 전략 없는 강경 정책을 수행중이다. 현재의 남북관계는 치킨 게임의 전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그레그 대사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은 “한미 동맹의 강력한 지지자로 보이는 남한의 이명박 대통령과의 관계를 강화헀고, 평양을 다루는 문제를 남한의 페이스에 맡긴 데 대해 만족해했다”고 했습니다. 미국이 변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가 '워싱턴 포토맥 강(江)의 오리알'이 될 수는 없겠지요?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로스쿨, 영남대 로스쿨, 전남대 로스쿨,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이번 학기는 이화여대 법대에서 2,3,4학년을 대상으로 '현대사회와 법'이라는 교양과목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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