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9. 어머니 별곡,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9. 어머니 별곡, 엄마 없는 하늘 아래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1.05.10 1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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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별곡

엄마는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하면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엄마는 긴 이랑 이에 쪼그리고 앉아
그저 수건으로 머리 햇볕에 가리고

이미 젊은 시절부터 치아가 상해 다 빼버려
밥에 김칫국물을 말아 먹어야만 했던
젊은 나이에도 얼굴엔 깊게 패인 볼엔 주름이 지고
한여름 땡볕에 숯 검둥이처럼 그을리고
엄마는 늘 그런 줄 알았습니다.

모내기할 때 새참에 점심에 또 새참에
저녁까지 밥을 해서 그 먼 논두렁길을 이고 들고
모내기 끝나 밭 갈아 주고 씨 뿌리고 나면
술로 살던 아버지 때문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밭이랑을
쪼그려 앉은 다리로 끌고 밀고

밭 가장자리에 오이도 심고 호박도 심고
남의 집일 품도 팔아 육성회비도 보태고
어느 날 내가 남의 집 오이 밭에 일하고 오이 받아온 날
엄마는 얼마나 화를 냈는지 모릅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아들을 보며
마음 쓰렸을 엄마는 늘 그런 줄 알았습니다.

배추 다듬어 손수레에 싣고
십 리도 넘는 길을 아들과 팔러 가는 길에
엄마는 속으로 우셨을지도 모릅니다.
아들 어릴 적엔 강원도 태백에 김치 팔러 가서 며칠을
집을 비운 날에도 시커먼 탄광촌에 헤매었을 어머니.

아들이 손수레에 모래 실어 다 새로 파서 만든 펌프 우물
콘크리트 틀을 만들어 드리기 전엔
물동이를 이고
똬리를 늘 머리에 얹은 모습은 더 어릴 적부터 봐 온 모습
아들이 변소에서 미끄러져 바지가 온통 똥내 풍겨도
그냥 눈물만 흘리던 엄마는 늘 그런 줄 알았습니다.

겨울이 되기 전 늦가을부터
엄마는 산에 나무해 놓고 가져오질 못해 아들에게 부탁하고
어린 아들은 늘 툴툴 거렸지요.
맨날 나만 시키냐고.
그런 어느 겨울 산에 같이 나무하러 가서 저쪽에 너의 첫째 형.
저쪽에 너의 둘째 형 무덤... 그렇게 일곱을 가슴에 묻은.

내가 알까봐 비밀로 한 이야기
나 낳기도 전에
십일 년이나 연상인 누나도 낳기 전에 사흘 갈이 밭이며 논을
다 남겨두고 새끼 가진 암소까지 남겨두고
타관 땅에 와서 남의 집 종살이까지 했다는 걸.

그래서 숙이 할아버지가 날 그렇게 혼낸건가
살기가 힘들어서 암소라도 가지고 온다고 찾아간 시댁에서
구정물 세례를 받고 논도 밭도 작은아버지가 다 가졌지만
아버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수십번도 더 얘기하던
엄마는 늘 그렇게 옆에 있을 줄 알았습니다.

제사 때마다 제삿날 저녁에 와서
엄마가 부침개를 부치면 형님 맛있네유만 하던 숙모
부모 제사에 오면서 과자부스러기만 가져온다며
늘 동생에게 술 사주는 아버지를 지독히도 미워하던 엄마.

그런 엄마는
내가 서울서 직장생활 할 때 중풍으로 쓰러지셨지요.
내가 서울서 내려가 병원에 갈 때까지
동네 친구 아버지가 놓은 사관이 응급처치 전부였던.

치매가 와서 늘 산으로 들로 찾으러 다녀야 했던 말년의 아버지
그런 아버지 옆에서 외국에 아들이 그리웠을 어머니
그 어머니 상을 당하고도 고국에 가지 못했던 쓰라림이 이 밤 밀려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얗게 지새고 있다.
엄마는 늘 그렇게 옆에 있을 줄 알았습니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엄마 이거 가르쳐줘 말하면
엄마는 말없이 자릴 떠나 뒤뜰 처마 끝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다른 애들은 엄마가 한글도 가르쳐주고
숫자도 가르쳐 학교에 입학했지만
난 콧수건만 가슴에 덜렁 달고
논처럼 질척대는 운동장 엄마 등에 엎여 들어 가
옥상에서 초등학교 입학식을 했다.

콧수건 핀이 빠지도록 엄마 등에 꼭 매달렸던 그날 저녁
엄마는 조용히 말했다
정규학교는 아예 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지만
동네야학에서 한글을 배우던 삼 일째
외할머니가 책 보퉁이째 우물에 던져버렸고 말려서 보려하니
또다시 아궁이에 넣어 불태워버렸다며 눈물 떨꿨다.

사탕에 눈이 멀어 외할머니 최고 외치던 난
다시는 엄마에게 가르쳐 달라지 못했다
전과 수련장이 필요하다면 열무 팔아 늙은 오이 노각 팔아
꼬깃꼬깃 접은 종이돈을 내밀 던 엄만
얼마나 가슴이 아렸으려나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어
가르치고 싶어도 가르칠 수 없던 엄마.

하늘나라에선 하루 종일 밭 매는 일도
이가 없어 찬물에 말아 먹는 일도
이역만리 떠난 아들 가슴에 품고 하루하루 보내는 일도
사랑하는 자식 일곱이나 잃고 애가 닿아 없어지는 일도
없이 꽃밭에서 거니 시길.
 

#작가의 변
어버이날을 맞아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간절합니다. 
살아생전 카네이션조차 몇 번 가슴에 달아 드리지 못했던 부모님, 이제 내가 그 처지가 되고 보니 조그만 것에도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을까하는 마음이 듭니다. 명품 한 번 입어 보거나 들어 보거나 발라 본 적 없는 어머니, 머나먼 그곳에선 더운 땡볕에 밭이랑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지 않으시고 항상 예쁜 꽃과 예쁜 향을 맡으면서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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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별곡

엄마는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하면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엄마는 긴 이랑 이에 쪼그리고 앉아
그저 수건으로 머리 햇볕에 가리고

이미 젊은 시절부터 치아가 상해 다 빼버려
밥에 김칫국물을 말아 먹어야만 했던
젊은 나이에도 얼굴엔 깊게 패인 볼엔 주름이 지고
한여름 땡볕에 숯 검둥이처럼 그을리고
엄마는 늘 그런 줄 알았습니다.

모내기할 때 새참에 점심에 또 새참에
저녁까지 밥을 해서 그 먼 논두렁길을 이고 들고
모내기 끝나 밭 갈아 주고 씨 뿌리고 나면
술로 살던 아버지 때문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밭이랑을
쪼그려 앉은 다리로 끌고 밀고

밭 가장자리에 오이도 심고 호박도 심고
남의 집일 품도 팔아 육성회비도 보태고
어느 날 내가 남의 집 오이 밭에 일하고 오이 받아온 날
엄마는 얼마나 화를 냈는지 모릅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아들을 보며
마음 쓰렸을 엄마는 늘 그런 줄 알았습니다.

배추 다듬어 손수레에 싣고
십 리도 넘는 길을 아들과 팔러 가는 길에
엄마는 속으로 우셨을지도 모릅니다.
아들 어릴 적엔 강원도 태백에 김치 팔러 가서 며칠을
집을 비운 날에도 시커먼 탄광촌에 헤매었을 어머니.

아들이 손수레에 모래 실어 다 새로 파서 만든 펌프 우물
콘크리트 틀을 만들어 드리기 전엔
물동이를 이고
똬리를 늘 머리에 얹은 모습은 더 어릴 적부터 봐 온 모습
아들이 변소에서 미끄러져 바지가 온통 똥내 풍겨도
그냥 눈물만 흘리던 엄마는 늘 그런 줄 알았습니다.

겨울이 되기 전 늦가을부터
엄마는 산에 나무해 놓고 가져오질 못해 아들에게 부탁하고
어린 아들은 늘 툴툴 거렸지요.
맨날 나만 시키냐고.
그런 어느 겨울 산에 같이 나무하러 가서 저쪽에 너의 첫째 형.
저쪽에 너의 둘째 형 무덤... 그렇게 일곱을 가슴에 묻은.

내가 알까봐 비밀로 한 이야기
나 낳기도 전에
십일 년이나 연상인 누나도 낳기 전에 사흘 갈이 밭이며 논을
다 남겨두고 새끼 가진 암소까지 남겨두고
타관 땅에 와서 남의 집 종살이까지 했다는 걸.

그래서 숙이 할아버지가 날 그렇게 혼낸건가
살기가 힘들어서 암소라도 가지고 온다고 찾아간 시댁에서
구정물 세례를 받고 논도 밭도 작은아버지가 다 가졌지만
아버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수십번도 더 얘기하던
엄마는 늘 그렇게 옆에 있을 줄 알았습니다.

제사 때마다 제삿날 저녁에 와서
엄마가 부침개를 부치면 형님 맛있네유만 하던 숙모
부모 제사에 오면서 과자부스러기만 가져온다며
늘 동생에게 술 사주는 아버지를 지독히도 미워하던 엄마.

그런 엄마는
내가 서울서 직장생활 할 때 중풍으로 쓰러지셨지요.
내가 서울서 내려가 병원에 갈 때까지
동네 친구 아버지가 놓은 사관이 응급처치 전부였던.

치매가 와서 늘 산으로 들로 찾으러 다녀야 했던 말년의 아버지
그런 아버지 옆에서 외국에 아들이 그리웠을 어머니
그 어머니 상을 당하고도 고국에 가지 못했던 쓰라림이 이 밤 밀려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얗게 지새고 있다.
엄마는 늘 그렇게 옆에 있을 줄 알았습니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엄마 이거 가르쳐줘 말하면
엄마는 말없이 자릴 떠나 뒤뜰 처마 끝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다른 애들은 엄마가 한글도 가르쳐주고
숫자도 가르쳐 학교에 입학했지만
난 콧수건만 가슴에 덜렁 달고
논처럼 질척대는 운동장 엄마 등에 엎여 들어 가
옥상에서 초등학교 입학식을 했다.

콧수건 핀이 빠지도록 엄마 등에 꼭 매달렸던 그날 저녁
엄마는 조용히 말했다
정규학교는 아예 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지만
동네야학에서 한글을 배우던 삼 일째
외할머니가 책 보퉁이째 우물에 던져버렸고 말려서 보려하니
또다시 아궁이에 넣어 불태워버렸다며 눈물 떨꿨다.

사탕에 눈이 멀어 외할머니 최고 외치던 난
다시는 엄마에게 가르쳐 달라지 못했다
전과 수련장이 필요하다면 열무 팔아 늙은 오이 노각 팔아
꼬깃꼬깃 접은 종이돈을 내밀 던 엄만
얼마나 가슴이 아렸으려나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어
가르치고 싶어도 가르칠 수 없던 엄마.

하늘나라에선 하루 종일 밭 매는 일도
이가 없어 찬물에 말아 먹는 일도
이역만리 떠난 아들 가슴에 품고 하루하루 보내는 일도
사랑하는 자식 일곱이나 잃고 애가 닿아 없어지는 일도
없이 꽃밭에서 거니 시길.
 

#작가의 변
어버이날을 맞아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간절합니다. 
살아생전 카네이션조차 몇 번 가슴에 달아 드리지 못했던 부모님, 이제 내가 그 처지가 되고 보니 조그만 것에도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을까하는 마음이 듭니다. 명품 한 번 입어 보거나 들어 보거나 발라 본 적 없는 어머니, 머나먼 그곳에선 더운 땡볕에 밭이랑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지 않으시고 항상 예쁜 꽃과 예쁜 향을 맡으면서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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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별곡

엄마는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하면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엄마는 긴 이랑 이에 쪼그리고 앉아
그저 수건으로 머리 햇볕에 가리고

이미 젊은 시절부터 치아가 상해 다 빼버려
밥에 김칫국물을 말아 먹어야만 했던
젊은 나이에도 얼굴엔 깊게 패인 볼엔 주름이 지고
한여름 땡볕에 숯 검둥이처럼 그을리고
엄마는 늘 그런 줄 알았습니다.

모내기할 때 새참에 점심에 또 새참에
저녁까지 밥을 해서 그 먼 논두렁길을 이고 들고
모내기 끝나 밭 갈아 주고 씨 뿌리고 나면
술로 살던 아버지 때문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밭이랑을
쪼그려 앉은 다리로 끌고 밀고

밭 가장자리에 오이도 심고 호박도 심고
남의 집일 품도 팔아 육성회비도 보태고
어느 날 내가 남의 집 오이 밭에 일하고 오이 받아온 날
엄마는 얼마나 화를 냈는지 모릅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아들을 보며
마음 쓰렸을 엄마는 늘 그런 줄 알았습니다.

배추 다듬어 손수레에 싣고
십 리도 넘는 길을 아들과 팔러 가는 길에
엄마는 속으로 우셨을지도 모릅니다.
아들 어릴 적엔 강원도 태백에 김치 팔러 가서 며칠을
집을 비운 날에도 시커먼 탄광촌에 헤매었을 어머니.

아들이 손수레에 모래 실어 다 새로 파서 만든 펌프 우물
콘크리트 틀을 만들어 드리기 전엔
물동이를 이고
똬리를 늘 머리에 얹은 모습은 더 어릴 적부터 봐 온 모습
아들이 변소에서 미끄러져 바지가 온통 똥내 풍겨도
그냥 눈물만 흘리던 엄마는 늘 그런 줄 알았습니다.

겨울이 되기 전 늦가을부터
엄마는 산에 나무해 놓고 가져오질 못해 아들에게 부탁하고
어린 아들은 늘 툴툴 거렸지요.
맨날 나만 시키냐고.
그런 어느 겨울 산에 같이 나무하러 가서 저쪽에 너의 첫째 형.
저쪽에 너의 둘째 형 무덤... 그렇게 일곱을 가슴에 묻은.

내가 알까봐 비밀로 한 이야기
나 낳기도 전에
십일 년이나 연상인 누나도 낳기 전에 사흘 갈이 밭이며 논을
다 남겨두고 새끼 가진 암소까지 남겨두고
타관 땅에 와서 남의 집 종살이까지 했다는 걸.

그래서 숙이 할아버지가 날 그렇게 혼낸건가
살기가 힘들어서 암소라도 가지고 온다고 찾아간 시댁에서
구정물 세례를 받고 논도 밭도 작은아버지가 다 가졌지만
아버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수십번도 더 얘기하던
엄마는 늘 그렇게 옆에 있을 줄 알았습니다.

제사 때마다 제삿날 저녁에 와서
엄마가 부침개를 부치면 형님 맛있네유만 하던 숙모
부모 제사에 오면서 과자부스러기만 가져온다며
늘 동생에게 술 사주는 아버지를 지독히도 미워하던 엄마.

그런 엄마는
내가 서울서 직장생활 할 때 중풍으로 쓰러지셨지요.
내가 서울서 내려가 병원에 갈 때까지
동네 친구 아버지가 놓은 사관이 응급처치 전부였던.

치매가 와서 늘 산으로 들로 찾으러 다녀야 했던 말년의 아버지
그런 아버지 옆에서 외국에 아들이 그리웠을 어머니
그 어머니 상을 당하고도 고국에 가지 못했던 쓰라림이 이 밤 밀려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얗게 지새고 있다.
엄마는 늘 그렇게 옆에 있을 줄 알았습니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엄마 이거 가르쳐줘 말하면
엄마는 말없이 자릴 떠나 뒤뜰 처마 끝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다른 애들은 엄마가 한글도 가르쳐주고
숫자도 가르쳐 학교에 입학했지만
난 콧수건만 가슴에 덜렁 달고
논처럼 질척대는 운동장 엄마 등에 엎여 들어 가
옥상에서 초등학교 입학식을 했다.

콧수건 핀이 빠지도록 엄마 등에 꼭 매달렸던 그날 저녁
엄마는 조용히 말했다
정규학교는 아예 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지만
동네야학에서 한글을 배우던 삼 일째
외할머니가 책 보퉁이째 우물에 던져버렸고 말려서 보려하니
또다시 아궁이에 넣어 불태워버렸다며 눈물 떨꿨다.

사탕에 눈이 멀어 외할머니 최고 외치던 난
다시는 엄마에게 가르쳐 달라지 못했다
전과 수련장이 필요하다면 열무 팔아 늙은 오이 노각 팔아
꼬깃꼬깃 접은 종이돈을 내밀 던 엄만
얼마나 가슴이 아렸으려나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어
가르치고 싶어도 가르칠 수 없던 엄마.

하늘나라에선 하루 종일 밭 매는 일도
이가 없어 찬물에 말아 먹는 일도
이역만리 떠난 아들 가슴에 품고 하루하루 보내는 일도
사랑하는 자식 일곱이나 잃고 애가 닿아 없어지는 일도
없이 꽃밭에서 거니 시길.
 

#작가의 변
어버이날을 맞아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간절합니다. 
살아생전 카네이션조차 몇 번 가슴에 달아 드리지 못했던 부모님, 이제 내가 그 처지가 되고 보니 조그만 것에도 서운해 하지는 않으셨을까하는 마음이 듭니다. 명품 한 번 입어 보거나 들어 보거나 발라 본 적 없는 어머니, 머나먼 그곳에선 더운 땡볕에 밭이랑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지 않으시고 항상 예쁜 꽃과 예쁜 향을 맡으면서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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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살고 있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학원을 다니면서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 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 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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