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4. 1995년 중국 베이징회의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4. 1995년 중국 베이징회의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 승인 2021.06.07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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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공동 발원문, 의제로 다루다”

1994년 7월 9일 ‘전체 당원들과 인민들에게 고함’이란 제하의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의 정오 특별방송을 통해서 김일성 주석이 그해 7월 8일 새벽 2시에 사망했다고 알려졌다. 《조선중앙통신》의 보도 전문에 따른 북측의 중대발표는 해방과 분단 이후, 세계 10대 뉴스로 등장할 만큼 ‘역사적 사변’으로까지 회자됐다.

이로부터 북측 조불련 중앙위원회 박태호 위원장이 1994년 6월 1일에 지선 전국불교운동연합 상임의장에게 제안한 ‘94 조국통일을 위한 남북해외불교도대회’가 8월 15일 남북 공동행사로 열리지 못했다. 그러나 전불련은 같은 해 8월 13일 서울 조계사에서 2천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조국통일과 불교중흥을 위한 남북해외불자기원법회 및 통일음악제’를 열었고, ‘90년대 통일실현을 위한 불교도선언’을 처음 채택하여 발표했다. 또 이 법회에서는 남북해외불교도대회 추진을 위한 남측준비위원회 구성을 제안, 결성했다. 대한불교청년회에서도 그해 8월 15일 파주 임진각에서 ‘평화통일기원대법회’를 개최하고 통일운동 대열에 참여했다.

이 시기의 국내 통일운동은 김영삼 정권에 의한 공안정국과 대대적인 공안 탄압으로 말미암아 잠행하게 됐다. 또한 중단되었던 남북불교 교류는 국가보안법에 따른 처벌 조항에 따라 직접교류보다 간접교류 형식을 빌렸다. 미국 LA 평불협 미주본부와 하와이 대원사 등을 통한 교류 채널이 가동됐다. 남북불교 교류와 대화에 필요한 제안과 회신 내용은 미국의 불교단체를 경유하여 국내로 재반입되는 경로가 유지됐다. 미국 시민권자 또는 영주권자의 신분으로 참여한 개인과 국외 불교단체가 남북불교 교류의 실무 창구를 맡은 것이다.

간접교류 방식으로 추진된 이때의 남북불교 교류는 1995년 중국 베이징 회의를 통해 직간접교류의 물꼬가 처음 열리게 됐다. 교류 채널은 국외를 통한 간접방식이었지만, 교류 당사자가 바로 연결되어 만날 수 있는 직접 교류의 테이블이 마련되기까지 그 과정과 주요한 내용을 다시 살펴본다.

중국 베이징 남북불교회의(1995.5.22. 랜드마크호텔) 왼쪽부터 이설송 조계종 사업부장, 신법타 평불협 상임부회장, 김시현 조계종 문사부장, 조불련 유성철 상무위원, 박태호 위원장, 심상련 서기장.



달라진 파트너와 교류 테이블

1995년에는 남북불교 교류의 새바람이 불었다. 북측의 변화보다 남측 불교계가 달라진 것이다. 남측의 불교 대표가 서의현에서 송월주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으로 바뀐 것이다. 1994년 4월 조계종단 개혁불사 이후, 그해 11월 21일 조계종 제28대 총무원장에 송월주 금산사 회주가 선출됐다. 11월 25일을 기해 취임한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은 ‘환경과 통일, NGO 등 시민운동에도 종단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라는 의지를 표명했다.

특히, 남북불교 교류에는 이듬해 6월, 평불협 상임부회장인 신법타 자재암 주지가 조계종 총무부장에 임명됨으로써 교류 의지가 드러났다.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과 신법타 총무부장은 1991년 10월 미국 LA 남북불교도 합동법회 때로부터 일명 ‘LA사단’으로 불릴 만큼 손발을 맞춰온 인사들로, 1992년 2월 12일 창립한 조국평화통일추진불교인협의회(약칭 평불협)에서 회장과 상임부회장으로 활동했었다.

그러나 첫 출발은 순탄치 못했다. 1995년 3월 14일 미국 LA로 출국하려던 신법타 평불협 상임부회장이 정보당국의 출국금지 조치에 따라 그해 4월 미국 LA에서 열기로 예정됐던 ‘제2차 남북해외불교지도자간담회’가 무산되고, 후속 조치에 따라 그해 4월 12일 오후 7시 미국 LA 한국회관에서 ‘통일보살 법타 스님 방미 환영회’가 열렸다. 이때 ‘통일보살’이란 닉네임도 함께 붙여졌다. 그리고 평불협 미주본부 총회에서는 임원진 개편과 함께 평양에 특사파견을 추진했다.

그 첫 주자로 미국 LA의 원효종 수도사 이정산 주지와 진각종 LA포교원 불광심인당의 지현 장용철 주교가 나섰다. 이들은 평불협 미주본부의 고문과 언론위원장 자격으로 1995년 4월 21일부터 5월 1일까지 평양을 방문했다. 5월 2일 서울에 들어온 평불협 미주본부의 장용철 방북 특사는 5월 3일 기자회견에서 조불련과의 협의 내용을 공개했다. 첫째, 8월 15일 판문점에서 조국통일기원 합동법회를 개최한다. 이에 관한 실무접촉은 5월 말 중국 북경에서 갖기로 했다. 둘째, ‘제2차 남북해외불교지도자 조국통일기원법회’는 평불협 미주본부 주관으로 8.15 판문점 법회 사항과 같이 5월 실무접촉 때 함께 논의 후, 금년 내 미국 LA에 개최한다. 그리고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의 친서를 조불련에 전달하고, 박태호 조불련 위원장으로부터 받은 친서 공개와 박 위원장이 송월주 총무원장의 방북을 구두로 초청했다.”라고 밝혔다.

그날 기자회견에서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은 “북한 측의 판문점 합동법회 제의를 수락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그해 5월 23일 중국주재 북한대사관에서 제2차 예비 실무접촉을 갖자고 제의했다. 남측 접촉대표로 신법타 평불협 상임부회장과 김시현 조계종 문화사회부장으로 한다. 또 박태호 조불련 위원장의 구두 초청에 대해 방북하겠다고 수락한 다음, 정부의 승인을 통해 ① 순수 종교 목적으로 평양을 방문하며, ② 순수 종교행사와 통일기여 행사 외에는 일체 않겠으며, ③ 금강산과 보현사 등 불교유적지 참배 및 실상을 파악하고 북한 불교계와의 협력에 노력하겠다는 기본입장을 직접 밝혔다. 한편, 송월주 총무원장은 그때 평양 방문과 귀국 시에 육환장을 짚고, 판문점을 직접 통과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한 바 있다.

이처럼 양측의 기 싸움이 팽팽한 가운데, 1994년 6월 일본에서의 만남으로부터 평불협 특사가 이듬해 평양에 들어가고,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의 평양 초청장을 비롯한 북측 조불련 대표단의 남한 초청 등 주요 현안들이 언론에 공개되던 1995년 4월과 5월의 시간은 평양과 미국 LA 그리고 서울에서 교류 원탁회의에 올릴 각기 다른 메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평불협미주본부 방북단, 조불련 청사 방문기념(1995.4.29.) 왼쪽로부터 조불련 차금철 책임지도원, 류인수 책임지도원, 이정산 LA수도사 주지, 박태호 위원장, 황병대 부위원장, 장용철 LA불광심인당 주교, 심상련 서기장, 정서정 책임지도원.



남북공동 발원문, 의제화되다

지금으로부터 26년 전, 1995년 5월 22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남북불교 교류 테이블에 ‘남북공동 발원문’의 채택과 동시발표 하자는 회의안건이 처음으로 올랐다. 이 안건은 ① 제2차 남북해외불교지도자 간담회 개최, ② 북측 조불련 대표단 남한 초청 ③ 기타,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의 방북과는 별개 사안으로 즉석 제안한 사항이다.

공동발원문은 1991년 10월 미국 LA 연석회의에서도 거론한 바 있으며, 평불협 미주본부 대표단의 방북을 통해 구두 논의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남북불교 교류의 공식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미리 준비한 안건이라기보다 중국 베이징 남북불교 회의에서 (1995년) 금년을 ‘조국평화통일 성취 원년’으로 선포하자라는 북측의 모두 발언에 이은 신법타 평불협 상임부회장의 즉석 제안이다. ‘평화통일 원년’의 성취를 위해서 먼저, 남북불교가 동질성을 이루는 차원에서 ‘공동발원문’을 작성, 이를 문서로 교환하든 만나 채택하고, 내년부터 부처님오신날에 서울 조계사와 평양 광법사에서 동시 낭독하는 형식으로 발표하자는 제안 사항이 그 계기가 됐다.

그 후, 남측에서 1996년도 공동발원문에 대한 초안을 작성하여 평불협 미주본부를 경유하여 조불련에 보내졌으나, 양측 이견과 소통의 부재로 봉축 행사에서 결행되지 못했다. ‘불교적 가치의 꽃’이라는 상징적 의미와 함께 같은 날, 같은 시에 남과 북이 하나의 발원문을 낭독할 수 있도록 한 첫 단추가 1995년 5월, 중국 베이징 회의에서 채워졌다는 사실을 다시 기록해 놓는다.

북측의 조불련 박태호 위원장을 단장으로 심상련 서기장과 유성철 상무위원 그리고 남측의 신법타 평불협 상임부회장을 단장으로 김시현 조계종 문화사회부장, 이설송 사업부장이 참석한 베이징 남북불교회의는 1995년 5월 22일부터 23일까지 랜드마크호텔(亮马饭店) 서라벌 한식당에서 열렸다. 다시 열린 베이징 남북불교회의는 미국 LA에서 나온 계획과 서울의 안건은 비슷했지만, 평양에서 나온 교류 안건은 전혀 뜻밖의 사안이었다. 연이은 북측의 가뭄과 큰물(홍수) 피해에 대한 걱정이 토로 됐다.

조불련에서 우회적으로 남측 협조를 시사 한 큰물 피해 사안은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의 방북 때 구체적인 논의하기로 하고, 제2차 조국통일기원법회 등에 관한 사항은 그대로 추진키로 했다. 또한 그해 7월, 일본 도쿄 조죠지(增上寺)에서 열리는 ‘8.15광복 50년 조국통일기원 희생동포위령제’에 조불련의 참가를 공식 요청했다.

그러나 조불련 박태호 위원장과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과의 재회는 아주 짧았다. 그때 베이징에서 열린 ‘제1차 중・한・일 불교우호교류회’ 일정이 마무리된 5월 24일 낮 12시 랜드마크호텔 한식당에서 잠시 만나 악수하는 회동 단계에 머물고 말았다.

# 다음 편은 ‘1995년 베이징회의 뒷담화’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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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 남북불교회의(1995.5.22. 랜드마크호텔) 왼쪽부터 이설송 조계종 사업부장, 신법타 평불협 상임부회장, 김시현 조계종 문사부장, 조불련 유성철 상무위원, 박태호 위원장, 심상련 서기장.

달라진 파트너와 교류 테이블

1995년에는 남북불교 교류의 새바람이 불었다. 북측의 변화보다 남측 불교계가 달라진 것이다. 남측의 불교 대표가 서의현에서 송월주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으로 바뀐 것이다. 1994년 4월 조계종단 개혁불사 이후, 그해 11월 21일 조계종 제28대 총무원장에 송월주 금산사 회주가 선출됐다. 11월 25일을 기해 취임한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은 ‘환경과 통일, NGO 등 시민운동에도 종단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라는 의지를 표명했다.

특히, 남북불교 교류에는 이듬해 6월, 평불협 상임부회장인 신법타 자재암 주지가 조계종 총무부장에 임명됨으로써 교류 의지가 드러났다.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과 신법타 총무부장은 1991년 10월 미국 LA 남북불교도 합동법회 때로부터 일명 ‘LA사단’으로 불릴 만큼 손발을 맞춰온 인사들로, 1992년 2월 12일 창립한 조국평화통일추진불교인협의회(약칭 평불협)에서 회장과 상임부회장으로 활동했었다.

그러나 첫 출발은 순탄치 못했다. 1995년 3월 14일 미국 LA로 출국하려던 신법타 평불협 상임부회장이 정보당국의 출국금지 조치에 따라 그해 4월 미국 LA에서 열기로 예정됐던 ‘제2차 남북해외불교지도자간담회’가 무산되고, 후속 조치에 따라 그해 4월 12일 오후 7시 미국 LA 한국회관에서 ‘통일보살 법타 스님 방미 환영회’가 열렸다. 이때 ‘통일보살’이란 닉네임도 함께 붙여졌다. 그리고 평불협 미주본부 총회에서는 임원진 개편과 함께 평양에 특사파견을 추진했다.

그 첫 주자로 미국 LA의 원효종 수도사 이정산 주지와 진각종 LA포교원 불광심인당의 지현 장용철 주교가 나섰다. 이들은 평불협 미주본부의 고문과 언론위원장 자격으로 1995년 4월 21일부터 5월 1일까지 평양을 방문했다. 5월 2일 서울에 들어온 평불협 미주본부의 장용철 방북 특사는 5월 3일 기자회견에서 조불련과의 협의 내용을 공개했다. 첫째, 8월 15일 판문점에서 조국통일기원 합동법회를 개최한다. 이에 관한 실무접촉은 5월 말 중국 북경에서 갖기로 했다. 둘째, ‘제2차 남북해외불교지도자 조국통일기원법회’는 평불협 미주본부 주관으로 8.15 판문점 법회 사항과 같이 5월 실무접촉 때 함께 논의 후, 금년 내 미국 LA에 개최한다. 그리고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의 친서를 조불련에 전달하고, 박태호 조불련 위원장으로부터 받은 친서 공개와 박 위원장이 송월주 총무원장의 방북을 구두로 초청했다.”라고 밝혔다.

그날 기자회견에서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은 “북한 측의 판문점 합동법회 제의를 수락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그해 5월 23일 중국주재 북한대사관에서 제2차 예비 실무접촉을 갖자고 제의했다. 남측 접촉대표로 신법타 평불협 상임부회장과 김시현 조계종 문화사회부장으로 한다. 또 박태호 조불련 위원장의 구두 초청에 대해 방북하겠다고 수락한 다음, 정부의 승인을 통해 ① 순수 종교 목적으로 평양을 방문하며, ② 순수 종교행사와 통일기여 행사 외에는 일체 않겠으며, ③ 금강산과 보현사 등 불교유적지 참배 및 실상을 파악하고 북한 불교계와의 협력에 노력하겠다는 기본입장을 직접 밝혔다. 한편, 송월주 총무원장은 그때 평양 방문과 귀국 시에 육환장을 짚고, 판문점을 직접 통과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한 바 있다.

이처럼 양측의 기 싸움이 팽팽한 가운데, 1994년 6월 일본에서의 만남으로부터 평불협 특사가 이듬해 평양에 들어가고,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의 평양 초청장을 비롯한 북측 조불련 대표단의 남한 초청 등 주요 현안들이 언론에 공개되던 1995년 4월과 5월의 시간은 평양과 미국 LA 그리고 서울에서 교류 원탁회의에 올릴 각기 다른 메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평불협미주본부 방북단, 조불련 청사 방문기념(1995.4.29.) 왼쪽로부터 조불련 차금철 책임지도원, 류인수 책임지도원, 이정산 LA수도사 주지, 박태호 위원장, 황병대 부위원장, 장용철 LA불광심인당 주교, 심상련 서기장, 정서정 책임지도원.
평불협미주본부 방북단, 조불련 청사 방문기념(1995.4.29.) 왼쪽로부터 조불련 차금철 책임지도원, 류인수 책임지도원, 이정산 LA수도사 주지, 박태호 위원장, 황병대 부위원장, 장용철 LA불광심인당 주교, 심상련 서기장, 정서정 책임지도원.

남북공동 발원문, 의제화되다

지금으로부터 26년 전, 1995년 5월 22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남북불교 교류 테이블에 ‘남북공동 발원문’의 채택과 동시발표 하자는 회의안건이 처음으로 올랐다. 이 안건은 ① 제2차 남북해외불교지도자 간담회 개최, ② 북측 조불련 대표단 남한 초청 ③ 기타,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의 방북과는 별개 사안으로 즉석 제안한 사항이다.

공동발원문은 1991년 10월 미국 LA 연석회의에서도 거론한 바 있으며, 평불협 미주본부 대표단의 방북을 통해 구두 논의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남북불교 교류의 공식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미리 준비한 안건이라기보다 중국 베이징 남북불교 회의에서 (1995년) 금년을 ‘조국평화통일 성취 원년’으로 선포하자라는 북측의 모두 발언에 이은 신법타 평불협 상임부회장의 즉석 제안이다. ‘평화통일 원년’의 성취를 위해서 먼저, 남북불교가 동질성을 이루는 차원에서 ‘공동발원문’을 작성, 이를 문서로 교환하든 만나 채택하고, 내년부터 부처님오신날에 서울 조계사와 평양 광법사에서 동시 낭독하는 형식으로 발표하자는 제안 사항이 그 계기가 됐다.

그 후, 남측에서 1996년도 공동발원문에 대한 초안을 작성하여 평불협 미주본부를 경유하여 조불련에 보내졌으나, 양측 이견과 소통의 부재로 봉축 행사에서 결행되지 못했다. ‘불교적 가치의 꽃’이라는 상징적 의미와 함께 같은 날, 같은 시에 남과 북이 하나의 발원문을 낭독할 수 있도록 한 첫 단추가 1995년 5월, 중국 베이징 회의에서 채워졌다는 사실을 다시 기록해 놓는다.

북측의 조불련 박태호 위원장을 단장으로 심상련 서기장과 유성철 상무위원 그리고 남측의 신법타 평불협 상임부회장을 단장으로 김시현 조계종 문화사회부장, 이설송 사업부장이 참석한 베이징 남북불교회의는 1995년 5월 22일부터 23일까지 랜드마크호텔(亮马饭店) 서라벌 한식당에서 열렸다. 다시 열린 베이징 남북불교회의는 미국 LA에서 나온 계획과 서울의 안건은 비슷했지만, 평양에서 나온 교류 안건은 전혀 뜻밖의 사안이었다. 연이은 북측의 가뭄과 큰물(홍수) 피해에 대한 걱정이 토로 됐다.

조불련에서 우회적으로 남측 협조를 시사 한 큰물 피해 사안은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의 방북 때 구체적인 논의하기로 하고, 제2차 조국통일기원법회 등에 관한 사항은 그대로 추진키로 했다. 또한 그해 7월, 일본 도쿄 조죠지(增上寺)에서 열리는 ‘8.15광복 50년 조국통일기원 희생동포위령제’에 조불련의 참가를 공식 요청했다.

그러나 조불련 박태호 위원장과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과의 재회는 아주 짧았다. 그때 베이징에서 열린 ‘제1차 중・한・일 불교우호교류회’ 일정이 마무리된 5월 24일 낮 12시 랜드마크호텔 한식당에서 잠시 만나 악수하는 회동 단계에 머물고 말았다.

# 다음 편은 ‘1995년 베이징회의 뒷담화’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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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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