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신문>은 6월 1일 북한은 지난 1월 당 대회에서, 남한을 ‘혁명 대상’으로 여기던 조선노동당 규약에서 ‘북 주도 혁명 통일론’을 지웠다고 보도했다.
<한겨레>는 이제껏 노동당 규약 머리에 있던 “조선노동당은 사회 민주화와 생존 권리를 위한 남조선 인민 투쟁을 적극 지지·성원”한다는 글월을 빼고, “민족 공동 번영을 이룩”이라는 글월을 넣었다면서, 노동당 규약 몸글에 나오는 ‘당원의 의무’(4조)에서 “조국 통일을 앞당기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여야 한다”란 글월은 아예 지웠다고도 했다. 또 ‘조선노동당 당면 목적’도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 과업 수행”에서 “전국적 범위에서 사회의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발전 실현”으로 바꿨다고도 했다.
북한에서 노동당 규약은 우리 헌법처럼 마땅히 따라야 할 흔들 수 없는 규범으로, 해방을 맞고 나서 이제껏 놓지 않던 ‘적화통일론’이 수그러들었다는 얘기일까.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이 2012년 집권하고 나서 꾸준히 다듬어온 “두 조선(Two Korea)”이란 틀을 한반도 앞날을 노동당 규약이라는 으뜸 규범에 드러냈다고도 했다. 1991년 남과 북이 유엔에 가입하고, 남북기본합의서를 내고 정상회담을 다섯 차례 거치면서 북한은 앞으로 ‘하나 됨’보다는 ‘어울려 살이’로 남북 무게중심을 옮아가고 있다고 보인다는 얘기다. 섣부른 바람으로 헛물켤 수도 있어 몇 번이고 다시 읽는다. 표현들이 한결 가라앉았다. 우리에게 하는 얘기라기보다는 북녘 사람들에게 하는 얘기일 테다. 바깥에다 대고 삿대질하기보다 안살림부터 옹글게 만들어 놓자는 말이다. 우리 안살림은 어떤가?
지난 6월 15일은 우리나라 김대중 대통령과 북조선 김정일 위원장이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공동 합의문을 내놓고 스물한 해를 맞은 날이다. 합의문 얼거리는 남과 북은 나라 통일을 우리끼리 풀기로 했다는 것과 힘을 모아 민족 경제를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하고 모든 분야에서 믿음을 다져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손을 잡은 데 이어 2018년 4월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손을 맞잡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한반도에 더는 전쟁은 없을 것이라면서 우리 겨레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주 원칙을 확인했다고 외쳤다.
모두 우리 겨레 살길은 우리 스스로 우리 힘으로 열어나가겠다는 얘기다. 그럴수록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한반도를 갈라놓은 것은 미국이지만, 남북전쟁을 일으킨 것은 김일성이라는 것을. 전쟁으로는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기에.
남로당원 박갑동, 전쟁이 안 일어났다면
이승만 정권은 절로 소멸되었을 것이다
저작권을 거저 나누겠다는 셀수스협동조합 사람들이 펴낸 책 <카피레프트, 톨스토이 어깨에 올라타다> ‘동경에서 만난 사람’이란 꼭지에서 주인공 남로당원 박갑동은 남로당 우두머리 박헌영이 김일성 무력 통일론을 막으려고 국회에 진보 인사와 중립 인사를 심고, 여론조사를 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힌다.
이 지시에 따라 박갑동을 비롯한 남한에 남은 남로당원들은 남로당을 좋게 보거나 중립에 선 이들을 국회의원에 당선시키려고 힘 쏟는다. 마침내 조소앙, 안재홍, 윤기섭, 박건웅과 같은 이들이 두루 국회의원이 된다. 박갑동은 말한다. 국회 210석에서 극우파인 독립촉성회 계열과 한민당 계열은 다 해도 50석이 넘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이승만 정권은 저절로 스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몰래 여론조사도 했다, 평화통일을 바란다는 여론이 압도했다. 박헌영은 분명, 총선 승리와 남한 민중 전쟁 반대 여론을 들어 김일성과 맞서려 했다. 그러나 박헌영과 우리 노력은 거품으로 돌아갔다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이 일제히 38선을 넘어 남침했다, 명분은 국군 공격에 반격이라고 했다, 해방되고 나서 남한 군대가 툭하면 38선을 넘어 북한을 공격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1949년 9월부터는 38선 일대에 교전이 거의 없었으니 말도 안 되는 핑계라고 박갑동은 밝힌다. 예나 이제나, 내가 아무리 남로당 지도부가 전쟁에 반대했다고 말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단다. 김일성은 죄가 없다며 오히려 박현영이 위기에 빠진 남로당원들을 구하려고 전쟁을 일으켰다고 멋대로 나서는 사람이 많은데 참으로 모르는 소리라며 가슴을 친다.
“전쟁이 터지던 일요일,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비밀 아지트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비록 임시지만 남로당 총책인 나를 비롯한 어느 누구도 북한 인민군이 전격 남침을 해오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지트 주인 할머니가 전쟁이 났다고 알려왔을 때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이처럼 전쟁은 힘을 쥐고 있는 사람이 뭇사람 바람을 짓밟으면서 저지른다. 이 그릇된 판단으로 수백만이 죽거나 다치고, 수천만이 넘는 사람이 보금자리를 잃고 오래도록 생고생을 했다.
그러면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되찾고 나서 국군과 연합군이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치고 올라간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털어놓자면 나는 일흔 해 가까이 살아오면서 이와 같은 물음을 던지지 못했다. 지난 11일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가 <프레시안>에 기고한 ‘38선에서 분단과 남침, 북진을 생각한다’란 글을 보고야 알았다. 부끄러웠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가슴을 쓸어내리며 글을 쓴다.
전쟁,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때에
잘못된 적과 싸운 잘못된 짓이다
북한이 힘을 써서라도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며 38선을 넘어 전쟁을 일으킨 것은 어떤 변명으로도 가릴 수 없는 엄청난 잘못이다. 국군과 연합군이 북진한 것도 그 못지않은 잘못이다.
나는 어째서 북진이 잘못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틀에 갇힌 탓이다.
나 같은 여느 사람들은 퍽 오래도록 미국은 더할 수 없이 좋고 북한과 중국, 소련은 몹시 나쁘다고 여겼다. 알게 모르게 머리에 심어진 미국은 어려움에 빠진 우리를 살려준 아름다운 나라였다. 제 잇속 차리기에 바쁜 미국 사람들이 만든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아무 생각 없이 얼굴이 하얀 미국 사람은 좋은 사람, 얼굴이 누런 인디언은 나쁘거나 모자라는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우리 또한 얼굴이 누렇고 눈이 작은 못난 사람이라 여기며 하얀 얼굴에 커다란 키, 쌍꺼풀이 깊은 눈을 가진 이들을 부러워했다. 영화뿐인가. 미국놈 건 똥도 좋다는 얘기가 나올 만큼, 미국을 떠받드는 미디어가 다 미국은 무슨 짓을 해도 좋은 뜻에서 그랬다고 얼버무렸다. 알고 보니 참으로 그러하더냐고 드잡이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빠르게 새는 정보’라는 뜻을 가진 ‘위키리크스’ 공동설립자 줄리언 어산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난 50년 동안 일어난 거의 모든 전쟁은 미디어가 퍼뜨린 거짓말이 빚은 열매다. 미디어가 정부 꼬드김을 따르지 않고 제대로 취재하여 사실을 바로 알렸다면, 전쟁을 멈출 수 있었다. 전쟁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쟁을 받아들이도록 하려니(거짓을) 지어내 꼬드겨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눈감고 전쟁터에 나가길 바라는 사람들은 없으니까. 우리에게 바람직한 미디어가 있다면, 평화를 누릴 수 있을 테다. 이를 막아서는 으뜸가는 적은 ‘어리석음’이다. 어리석으면 현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헤아리지 못한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대로 헤아릴 때만, 올바로 판단할 수 있다. 이 어리석음을 누가 부추길까? 바로 그 비밀을 지키려고 하는 조직들이다.”
손호철은 중국은 일찌감치 연합군이 삼팔선을 넘어 북진한다면 중국 침략으로 받아들여 25만 명을 파병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다고 했다. 인도 네루 총리는 연합군이 북진하지 말도록 영국에 얘기하고, 영국은 미국에 연합군이 북한군에게 항복하라고 하면서 적어도 한 주에서 두 주는 38선에서 멈춰야 한다고도 했단다. 그러나 미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10월 9일 대규모로 밀고 올라갔다.
이 생각을 하다가 어려서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제사를 앞두고 과일이나 한과를 사 온 어머니는 다락에 넣어두고 조상께 올려야 하는 제물이니 아무리 입이 궁금해도 먹어선 안 된다고 이르셨다. 어머니가 집에 안 계신 날 막내가 몰래 사과 한 알을 꺼낸다. 막내 바로 위 동생이 먹지 말라고 막아서지만 막내는 막무가내로 한입 베어 문다. 말리던 동생이 “어? 너 먹었지. 나도 먹는다.” 하고 저도 꺼내서 먹는다. 누가 더 잘못했을까?
북진하는 바람에 네다섯 달이면 끝낼 수 있던 전쟁이 국제전으로 치달으며 수많은 목숨을 스러지게 하며 세 해나 이어갔다. 손호철 교수는 삼팔선에서 멈췄더라면 적어도 다치거나 죽는 중국 젊은이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며, 남녘 젊은이와 북녘 젊은이, 미국을 비롯한 전쟁에 참전한 젊은이 대부분이 다치거나 죽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북진을 외친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승만과 더글러스 맥아더를 비롯한 전쟁광들이다. 이승만은 내가 이 나라 최고 통수권자이니, 내 명령에 따라 북진하라고 외치고, 맥아더는 내친김에 중국까지 쳐들어가야 한다고 나섰다.
오마 브래들리 미국 합참의장은 1951년 5월 15일, 미 의회에서 한국전쟁에 뛰어든 중국에 맞서 중국을 치자는 맥아더에게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때에 잘못된 적과 싸운 잘못된 전쟁”이라며 꾸짖는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라고 맥아더가 군복을 벗으며 던진 말은, 뭇사람을 지옥으로 몰아간 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뱉은 말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합법이란 탈을 썼든 불법이라고 하든 ‘모든 전쟁은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때에 잘못된 적과 싸운 잘못된 짓’이라고 받아들인다. 참모습을 바로 꿰뚫어 볼 줄 아는 것이 중립으로 가는 첫걸음이고, 중립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무기를 내려놓을 마련이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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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택주는
“배운 걸 세상에 돌리지 않으면 제구실하지 않는 것”이란 법정 스님 말씀에 따라 이 땅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면서 ‘으라차차영세중립코리아’에 몸담고 있다. 나라 곳곳에 책이 서른 권 남짓한 꼬마평화도서관을 열고 있다. 평화 그림책을 소리 내어 읽기 놀이하면서 쉬운 겨레말 쓰기 놀이도 한다. 법명은 지광(智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