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5. 1995년 베이징회의 뒷담화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5. 1995년 베이징회의 뒷담화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 승인 2021.06.28 20: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 선생, 반갑습니다”

1995년 5월 말, 중국 베이징 하늘은 흐렸다. 분단 46년 만에 처음 만났던 남북한의 불교는 4년 만에 이루어진 만남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민족으로서 함께 고민하고 쌓아온 불심의 폭과 깊이는 같았다.

그해 5월 22일 오후 베이징시 동쪽의 랜드마크 호텔 서라벌 한식당에서 만나 서로 합장하고 인사하며 악수를 가졌다. “위원장님, 먼 길 오신다고 고생하셨습니다.”라는 인사말의 화답으로 “법타 선생, 이제 통일 일꾼이 다 되었습니다.” 또 “(심상련 조불련 서기장 등과 신법타 평불협 상임부회장은) 우린 구면입니다만, 다른 중 선생은 누구신지….”라는 등 만남에서 대화가 오갔다.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이하 조불련) 박태호 위원장은 1994년 7월, 신법타 평불협 상임부회장의 국가보안법 구속에 대해 ‘통일 일꾼’으로 해석했다. 또 심상련 서기장은 조계종단 집행부의 일원으로 회의에 참가한 김시현 문화사회부장과 이설송 사업부장에 대한 존칭의 표현으로 ‘중(衆) 선생’이라 불렀다. 하지만 중 선생이라 부른 심상련 조불련 서기장의 함경도 억양에 량강도식 말투는 순간 회의장을 얼어붙게 만들었고, 첫 만남의 어색함까지도 더해졌다.

북측에서 무슨 낱말 뒤에 붙이는 선생이란 용어는 존칭의 예우로 부르는 말이다. 남측 불교계에서는 1947년 ‘부처님 뜻대로 살자.’라는 경북 문경 봉암사 결사 이후로부터 불명 뒤에 ‘스님’이란 단어를 덧붙여 쓰는데, 1세기 중국 동한 때부터 쓰이기 시작한 ‘중 승(僧)’자에 경칭 접미사인 ‘님’을 붙인 존칭어가 변한 말이다. 가장 앞선 한글 기록은 1911년 이해조가 지은 신소설 《쌍옥적》에 처음 나온다. 오늘날 북측에는 스님이란 용어가 없기 때문에, 중 ○○ 또는 ○○○ 대사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호칭이다. 지금도 북측 인사들과 만날 때, 각기 이름이나 불명(佛名) 뒤에 선생을 붙여 불리게 되는 것은 실질적인 예우를 받는 것과도 같다.

그간 금강산과 개성관광, 신계사 합동법회에서는 호칭 문제가 적잖게 논란되기도 했다. 2000년 이후 7~8년 동안 자유 왕래가 빈번할 때, 남측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나 불편하게 듣는 승려에 따라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남북불교 교류 테이블에서 “중 선생, 만나서 반갑습니다.”라는 인사말은 교류 파트너가 사용한 용어의 차이일 뿐만 아니라, 20세기 중엽까지도 사용하던 우리식 전통 용어이다.

이처럼 남북한 불교의 달라진 모습과 용어, 그리고 다시 재회한 불교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를 보여 준 중국 베이징 남북불교회의에 관한 몇 가지 뒷이야기를 싣는다.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과 조불련 박태호 위원장의 만남(1995.5.24. 중국 베이징 랜드마크호텔) 사진=평불협 《하나로》(1995년 7・8월 합본호)



북한불교를 말하다

분단 이후, 북측 불교에 관해 처음 소개한 인물은 제3대 조불련 위원장인 학림(鶴林) 박태호 대선사이다. 박 위원장은 일본 조총련의 홍보지로 발행한 《조선화보》(1988년 11월호)에 북측 종교인으로 단독 인터뷰한 내용과 사진이 처음 게재되었다.

박태호 위원장은 《조선화보》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60여 개 사찰이 남아 있으며, 3백 명의 승려와 1만 명의 신도가 있는 불교는 국가 문화유산으로 잘 보호하고 있다고 했다. 이 같은 불교 현황은 1991년 10월, 미국 LA 남북불교도 합동법회에서 박 위원장이 국내 언론과 가진 인터뷰 내용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1995년 5월 중국 베이징 남북불교회의에서는 이런 내용에서 더 나아가서 남북한 불교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공통점을 이야기했다. 박태호 위원장은 남측 불교에 관한 대화에서 맞장구를 치며, ① “우리도 남측과 같은 조계종이라 할 수 있다.” 조불련 중앙위원회가 곧 종단이라고 답을 한 것이다. ② “우리도 소의경전을 꼽으면, 《금강경》이고 선사들의 어록이다.”라고 그 실례를 들었다. 박 위원장은 “묘향산 보현사에 가면 팔만대장경이 다 있다. 그것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고, 잘 가꾸고 있다.”라고 했다. ③ “우리도 불탄절과 성도절 등 명절을 지낸다.”라며, 1988년 5월부터 묘향산 보현사와 금강산 표훈사 등에서 열리고 있는 불교 행사에 관해 소개했다. ④ 이어 “우리도 불교 명절에는 노래를 부르고 경축하고 있다.”라면서 찬불가를 비롯한 염불 등 불교 의식에도 정통한 승려들이 있고, 참가자들이 같이 부른다고 한 것이다. ⑤ “우리도 불교 법식(法式)에 맞게 복장을 하고, 예의범절을 갖추고 있다. 불학원과 법계자격고시위원회에서 다 주관한다.”라면서 승려 복식과 법계 등에 관한 내용 등을 처음으로 알려 주었다. 특히 그간 베일에 싸였던 승려 교육기관인 불학원(佛學院)에 관해 조불련 위원장이 직접 소개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불학원은 1965년 량강도 삼수갑산 중흥사에 설치했다가 1992년에 평양 광법사로 옮겼다면서 북측 승려들의 교육체계와 역사를 처음 거론하여 알려진 내용이다.

위와 같은 내용은 평화통일불교협회(이하 평불협) 소식지인 《하나로》(1995년 5・6합본호) 등에 실렸다. 그리고 《하나로》에 소개한 내용을 보면, “법타 선생 같은 사람이 통일에 큰일을 해달라.”라는 박태호 위원장의 뼈있는 주문에 대해 신법타 평불협 상임부회장이 “앞으로는 판문점을 통해 평양에서 만나자. 남이나 북이나 자주 만나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야 대화가 되고 통일도 되는 것”이라고 응수하면서 침울했던 회의 테이블에 다시 웃음꽃을 피워냈다고 한다.

또 1995년 5월, 베이징회의는 북측이 50년 동안 적대시해온 미국 땅에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교류해온 중국 땅에서 남북의 불교가 다시 재회한 첫 자리였다. 불교에 관한 이야기꽃과 함께 1994년 7월 폭우로 피해를 본 북측의 상황도 소개됐다. 그 당시 언론에 보도된 북측의 큰물 피해는 549명 사망자와 295명 행방불명자, 3천 43명의 부상자, 1만6천667동에 2만8천747가구의 주택 파손 등을 보았다고 할 만큼 1994년 가뭄에 연이어 자연재해를 입었다고 했다.

이러한 북측 소식과 같이 조불련 유성철 상무위원은 1984년 9월 남측의 홍수 피해 때 북측의 수재 물자지원 사실을 언급하고, 직접 참가했다는 경험담을 전하면서 조불련에 대한 남측의 지원을 우회적으로 시사했다.

분단과 6.25 전쟁 이후, 남북 간 최초의 물자교류였던 1984년도 수재 물자지원은 그해 9월 8일 북측의 조선적십자회가 남측 이재민에게 구호 물품을 지원하겠다는 제안으로,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동포애와 인도주의 입장에서 쌀 5만 석, 옷감 50만 미터, 시멘트 10만 톤, 기타 의약품을 지원하겠다.”라며 품목과 수량까지 알려졌다.

그리고 9월 14일부터 19일까지 판문점 중립국 감시・감독위원회 사무실에서 수재물자 인도・인수 업무를 위한 남북적십자 실무회담이 열려 양측 적십자 대표의 협의로 9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시멘트는 강원도 북평항과 서해안의 인천항으로, 쌀과 옷과 의약품은 판문점을 통해 전달됐다.

그해 9월 29일 아침에는 826명의 북측 인원이 수재물자 인도를 위해 휴전선을 넘어 남측으로 왔다. 같은 날 강원도 북평항과 이튿날 인천항 제4 부두에 수재물자의 일부인 시멘트가 도착했을 때, 유성철 상무위원이 지원 감독관으로 참여했다. 또 그는 1985년 초, 판문점에서 열린 제3차 남북경제회담의 북측대표단으로 참석하는 등 남북교류 분야의 핵심 인물로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그 후 2016년에는 제4대 조불련 위원장에 선출돼 활동한 성보 유영선 위원장이다.

1991년 10월, 미국 LA 남북불교도 합동법회에는 법등 홍화두 고문을 필두로 문화재 전문가인 심상련 서기장 등 불교문화에 익숙한 인사들이 참여한 반면에, 1995년 5월 중국 베이징회의에는 북측의 경제・교류전문가인 유성철 상무위원이 새로 가세하면서 남북불교의 교류 패턴이 처음 형성되었다.



제1차 중한일불교우호교류회 기념촬영. 좌로부터 송월주 한국대표, 자오푸추(赵朴初) 중국대표, 나카무라 고류(中村康隆) 일본대표. 사진=중국불교협회 홈페이지 자료



3+1 방식의 교류

다시 이어진 남북불교 교류는 1995년 5월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중국・일본 그리고 북측 대표까지 자리하는 무대를 이뤘다. 동아시아 삼국의 불교 교류에 있어 조불련에 대한 문호는 열리지 않았지만, 그 당시 조불련 대표단의 중국 방문은 동아시아 불교 교류에 있어 ‘3+1 방식’ 교류를 만드는 첫 계기가 이뤄졌다. 1993년 9월 26일에 중국불교협회 자오푸추(赵朴初) 회장이 한・중・일 삼국의 황금유대를 기치로 제안하여 1995년 5월 22일~23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1차 중・한・일 불교우호교류회가 ‘우호와 합작(合作), 평화’이란 주제에 부합하도록 조불련의 참여가 연계하지 못한 점도 한계로 드러났다.

이 같은 상황처럼 1995년 베이징회의에서 서로 합의한 내용은 모두 실행하지 못했지만, 한 걸음 더 다가서는 남북한 불교가 또 다른 내일의 신새벽을 기약했다.

# 다음 편은 ‘1995년 일본 도쿄 위령재’가 이어집니다.

_________________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과 조불련 박태호 위원장의 만남(1995.5.24. 중국 베이징 랜드마크호텔) 사진=평불협 《하나로》(1995년 7・8월 합본호)

북한불교를 말하다

분단 이후, 북측 불교에 관해 처음 소개한 인물은 제3대 조불련 위원장인 학림(鶴林) 박태호 대선사이다. 박 위원장은 일본 조총련의 홍보지로 발행한 《조선화보》(1988년 11월호)에 북측 종교인으로 단독 인터뷰한 내용과 사진이 처음 게재되었다.

박태호 위원장은 《조선화보》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60여 개 사찰이 남아 있으며, 3백 명의 승려와 1만 명의 신도가 있는 불교는 국가 문화유산으로 잘 보호하고 있다고 했다. 이 같은 불교 현황은 1991년 10월, 미국 LA 남북불교도 합동법회에서 박 위원장이 국내 언론과 가진 인터뷰 내용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1995년 5월 중국 베이징 남북불교회의에서는 이런 내용에서 더 나아가서 남북한 불교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공통점을 이야기했다. 박태호 위원장은 남측 불교에 관한 대화에서 맞장구를 치며, ① “우리도 남측과 같은 조계종이라 할 수 있다.” 조불련 중앙위원회가 곧 종단이라고 답을 한 것이다. ② “우리도 소의경전을 꼽으면, 《금강경》이고 선사들의 어록이다.”라고 그 실례를 들었다. 박 위원장은 “묘향산 보현사에 가면 팔만대장경이 다 있다. 그것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고, 잘 가꾸고 있다.”라고 했다. ③ “우리도 불탄절과 성도절 등 명절을 지낸다.”라며, 1988년 5월부터 묘향산 보현사와 금강산 표훈사 등에서 열리고 있는 불교 행사에 관해 소개했다. ④ 이어 “우리도 불교 명절에는 노래를 부르고 경축하고 있다.”라면서 찬불가를 비롯한 염불 등 불교 의식에도 정통한 승려들이 있고, 참가자들이 같이 부른다고 한 것이다. ⑤ “우리도 불교 법식(法式)에 맞게 복장을 하고, 예의범절을 갖추고 있다. 불학원과 법계자격고시위원회에서 다 주관한다.”라면서 승려 복식과 법계 등에 관한 내용 등을 처음으로 알려 주었다. 특히 그간 베일에 싸였던 승려 교육기관인 불학원(佛學院)에 관해 조불련 위원장이 직접 소개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불학원은 1965년 량강도 삼수갑산 중흥사에 설치했다가 1992년에 평양 광법사로 옮겼다면서 북측 승려들의 교육체계와 역사를 처음 거론하여 알려진 내용이다.

위와 같은 내용은 평화통일불교협회(이하 평불협) 소식지인 《하나로》(1995년 5・6합본호) 등에 실렸다. 그리고 《하나로》에 소개한 내용을 보면, “법타 선생 같은 사람이 통일에 큰일을 해달라.”라는 박태호 위원장의 뼈있는 주문에 대해 신법타 평불협 상임부회장이 “앞으로는 판문점을 통해 평양에서 만나자. 남이나 북이나 자주 만나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야 대화가 되고 통일도 되는 것”이라고 응수하면서 침울했던 회의 테이블에 다시 웃음꽃을 피워냈다고 한다.

또 1995년 5월, 베이징회의는 북측이 50년 동안 적대시해온 미국 땅에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교류해온 중국 땅에서 남북의 불교가 다시 재회한 첫 자리였다. 불교에 관한 이야기꽃과 함께 1994년 7월 폭우로 피해를 본 북측의 상황도 소개됐다. 그 당시 언론에 보도된 북측의 큰물 피해는 549명 사망자와 295명 행방불명자, 3천 43명의 부상자, 1만6천667동에 2만8천747가구의 주택 파손 등을 보았다고 할 만큼 1994년 가뭄에 연이어 자연재해를 입었다고 했다.

이러한 북측 소식과 같이 조불련 유성철 상무위원은 1984년 9월 남측의 홍수 피해 때 북측의 수재 물자지원 사실을 언급하고, 직접 참가했다는 경험담을 전하면서 조불련에 대한 남측의 지원을 우회적으로 시사했다.

분단과 6.25 전쟁 이후, 남북 간 최초의 물자교류였던 1984년도 수재 물자지원은 그해 9월 8일 북측의 조선적십자회가 남측 이재민에게 구호 물품을 지원하겠다는 제안으로,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동포애와 인도주의 입장에서 쌀 5만 석, 옷감 50만 미터, 시멘트 10만 톤, 기타 의약품을 지원하겠다.”라며 품목과 수량까지 알려졌다.

그리고 9월 14일부터 19일까지 판문점 중립국 감시・감독위원회 사무실에서 수재물자 인도・인수 업무를 위한 남북적십자 실무회담이 열려 양측 적십자 대표의 협의로 9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시멘트는 강원도 북평항과 서해안의 인천항으로, 쌀과 옷과 의약품은 판문점을 통해 전달됐다.

그해 9월 29일 아침에는 826명의 북측 인원이 수재물자 인도를 위해 휴전선을 넘어 남측으로 왔다. 같은 날 강원도 북평항과 이튿날 인천항 제4 부두에 수재물자의 일부인 시멘트가 도착했을 때, 유성철 상무위원이 지원 감독관으로 참여했다. 또 그는 1985년 초, 판문점에서 열린 제3차 남북경제회담의 북측대표단으로 참석하는 등 남북교류 분야의 핵심 인물로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그 후 2016년에는 제4대 조불련 위원장에 선출돼 활동한 성보 유영선 위원장이다.

1991년 10월, 미국 LA 남북불교도 합동법회에는 법등 홍화두 고문을 필두로 문화재 전문가인 심상련 서기장 등 불교문화에 익숙한 인사들이 참여한 반면에, 1995년 5월 중국 베이징회의에는 북측의 경제・교류전문가인 유성철 상무위원이 새로 가세하면서 남북불교의 교류 패턴이 처음 형성되었다.

제1차 중한일불교우호교류회 기념촬영. 좌로부터 송월주 한국대표, 자오푸추(赵朴初) 중국대표, 나카무라 고류(中村康隆) 일본대표. 사진=중국불교협회 홈페이지 자료
제1차 중한일불교우호교류회 기념촬영. 좌로부터 송월주 한국대표, 자오푸추(赵朴初) 중국대표, 나카무라 고류(中村康隆) 일본대표. 사진=중국불교협회 홈페이지 자료

3+1 방식의 교류

다시 이어진 남북불교 교류는 1995년 5월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중국・일본 그리고 북측 대표까지 자리하는 무대를 이뤘다. 동아시아 삼국의 불교 교류에 있어 조불련에 대한 문호는 열리지 않았지만, 그 당시 조불련 대표단의 중국 방문은 동아시아 불교 교류에 있어 ‘3+1 방식’ 교류를 만드는 첫 계기가 이뤄졌다. 1993년 9월 26일에 중국불교협회 자오푸추(赵朴初) 회장이 한・중・일 삼국의 황금유대를 기치로 제안하여 1995년 5월 22일~23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1차 중・한・일 불교우호교류회가 ‘우호와 합작(合作), 평화’이란 주제에 부합하도록 조불련의 참여가 연계하지 못한 점도 한계로 드러났다.

이 같은 상황처럼 1995년 베이징회의에서 서로 합의한 내용은 모두 실행하지 못했지만, 한 걸음 더 다가서는 남북한 불교가 또 다른 내일의 신새벽을 기약했다.

# 다음 편은 ‘1995년 일본 도쿄 위령재’가 이어집니다.

_________________

#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02호
  • 대표전화 : 02-734-7336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법인명 : 뉴스렙
  • 제호 : 뉴스렙
  • 등록번호 : 서울 아 0043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7-09-17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뉴스렙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렙. All rights reserved. mail to cetana@gmail.com
  • 뉴스렙「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조현성 02-734-7336 cetana@gmail.com
인터넷신문위원회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