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9. 1997년 평양에 들어가다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9. 1997년 평양에 들어가다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장
  • 승인 2021.08.24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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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에 국수공장 세우다”

1997년도 남북불교 교류는 인도적 식량지원을 기반으로 광폭으로 진행됐다. 중국 베이징과 심양, 도문 등에서 식량 지원에 관한 실무회의 등 접촉을 가졌다. 특히 분단 52년 만에 처음으로 부처님오신날 봉축 남북 동시법회에서 남북불교도 공동발원문을 낭독하는 등 불교적 교류가 이루어졌다. 또한 북녘동포 돕기를 위한 단체 결성과 더불어 조계종단에서 ‘자비의 탁발’ 시행과 전국적인 모금 운동이 전개됐다.

1997년 5월 6일 서울 봉은사 선불당에서 ‘북녘동포돕기 불교추진위원회’(약칭 불추위)가 발족하고, 그해 5월 31일 한국불교종단협의회가 불추위에 동참을 결의함으로써 범종단적인 활동이 이루어졌다. 6월 26일에는 “북녘 어린이에게 생명을”이란 슬로건으로 북한 어린이에게 의약품 보내기 운동을 전개했다. 6월 30일 오전 10시, 서울 흥사단 강당에서 전국 민간단체들이 한자리에 모여 ‘북한동포돕기 민간단체 전국회의’라는 협의체를 결성했다.

불추위는 1997년 7월 19일 서울 조계사에서 ‘북녘 어린이돕기 대법회’를 남북어린이어깨동무 등 어린이 단체들과 개최했다. 같은 해 8월 12일~15일까지는 조계종, 대불련, 대불청, 전국불교운동연합, 선우도량 등을 중심으로 ‘민족화합 통일정토를 위한 전국순례단’을 조직하고, 민족화합 보살단(부산-진주-대구-청주-원주-춘천-수원-서울 구간)과 통일정토 보살단(부산-광주-전주-대전-천안-수원-서울 구간)이 모금 운동을 펼쳤다.

국내 활동과 함께 북측 조불련과의 실무회의는 1997년 6월 14일~16일까지 중국 베이징 해당화식당 등에서 개최했다. 조계종 총무원 사회부를 지원창구로 하여 그해 9월 15일 중국 도문에서 북측 남양을 경유하는 육로 화물트럭을 통해 옥수수 300톤과 단둥에서 신의주 경유의 화물기차 편으로 1,700톤을 조불련에 지정 기탁했다. 또한 미국 LA에서 활동하는 평불협 미주본부는 김도안 회장과 신동수 사무국장이 같은 해 5월 23일~30일까지 평양 등 황해도 수해 지역을 방문하고, 지원품(1만233불 상당)을 전달했다.

특히, 1997년 5월 26일 평불협 미주본부는 조불련과 평불협이 황해도 지역에 국수공장을 공동 설립한다는 사항과 조불련과 교류에 있어 단일 창구화를 위한 6개 항목의 ‘남북불교 교류 합의서’를 평양 조불련 청사에서 체결하고, 같은 해 7월 8일 서울 평불협 사무실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그 사실을 공개했다.

이 시기 평양과 베이징, 서울, 미국 LA를 오가면서 추진된 남북불교간 협력 사업에 관한 교류의 내용과 그 배경을 살펴본다.

황북 사리원시 금강국수공장 정문 현판과 남녀공원들(1998년 11월) 사진=《평불협 15년사》(2007).



황북 사리원에 국수공장 세우다

분단 52년 만에 남북한 불교가 국수공장을 건립하기로 처음 합의했다. 북녘동포 돕기의 일환으로 설립한 ‘금강국수공장’은 1997년 5월 26일 평양 조불련 청사에서 평불협 미주본부 김도안 회장과 조불련 중앙위원회 박태호 위원장의 합의로 이루어졌다. 이 같은 협력사업 합의는 그해 4월 13일~14일까지 중국 베이징 해당화식당에서 열린 남북불교 실무회의에서 논의한 대로 남측 불교계가 인도적 차원에서 식량을 지원한다는 합의 이행에 따른 것이다.

이때 평양에서의 합의사항은 1997년 7월 8일 김도안 회장의 서울 기자회견에서 처음 공개됐다. 그 후속으로 신법타 평불협 회장과 심상련 조불련 서기장 등은 그해 7월 15일 중국 베이징 해당화식당에서 남북불교회의를 개최하고 세부사항을 결정했다. 이 회의에서는 국수공장 설립에 관한 제반 사항과 공장의 위치와 명칭, 공장 설비 등을 실무사항이 추가 합의됐다. 또 평불협 미주본부 신동수 사무국장은 같은 해 8월 11일~20일까지 평양을 단독 방문하고 국수공장의 설립 장소와 명칭, 공장 대지, 건립 시기 등에 대한 모니터링을 가졌다.

그 다음, 평불협 미주본부에서는 서울 평불협을 대신하여 1997년 12월 26일~30일까지 평양에 지현 장용철 상임부회장을 단독 파견하여, 그해 12월 29일 평양 조불련 청사에서 조불련과 ‘금강국수공장 설립 합의서’를 체결했다. 총 9개 항목의 합의서는 조불련 중앙위원회 박태호 위원장과 평불협 미주본부 김도안 회장을 대리하여 장지현이 각기 서명했다. 이러한 교류 경로는 현행 법령의 준수와 직접 교류할 수 없는 서울 평불협을 대리하여 평불협 미주본부가 그 업무를 대행하는 방식으로 추진됐다.

국수공장 설립 합의서에는 명칭은 금강(金剛)국수공장으로 한다. 설립지역은 황해북도 사리원시 지역으로 한다. 공장 준공은 1998년 3월 말로 한다. 공장 운영은 조불련 측이 하며, 해당지역 행정위원회에 위탁 경영할 수 있다. 원료 공급은 매월 20톤 규모를 평불협 미주본부가 중국업체를 통해 조불련에 지급한다. 국수 공급은 재해 지역의 탁아소, 어린이학교 등을 우선하며, 조불련 성원들에게도 공급되도록 한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그 당시 국수공장 건립은 1997년 7월 말부터 공장 규모와 건립 지역, 장소 선정을 거쳐 사업 승인을 절차가 진행됐다. 그해 5월 말부터 평불협과 협의한 사항과 더불어 12월 초, 북한 정부의 승인에 따라 12월 29일 평양 조불련 청사에서 ‘금강국수공장 설립에 대한 합의서’가 최종 체결됐다. 그로부터 황해북도 사리원시 인민위원회가 조불련 중앙위원회와 같이 국수공장의 대지 정리와 시공, 공장 기계와 장비 등을 구입하여 1998년 3월 말에 국수공장을 완공했다. 같은 해 4월 6일부터 평불협에서 지원한 밀가루와 옥수수를 혼합하여 하루 2톤의 양으로 7,700그릇 분량의 금강국수를 생산했다. 생산된 국수는 황해도 지역의 탁아소, 소학교 그리고 정방산 성불사, 연탄 심원사 등 조불련 사찰에도 2012년도까지 무상 공급했다.

황북 사리원시 만금동에 건립한 금강국수공장의 ‘금강(金剛)’이란 이름은 가장 유명한 이름이고, 또한 사찰과 불교와 연관된 금강산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특히 국수공장은 공장 가동방식에 있어 반자동식으로 설비를 갖추었다. 전력 사정을 고려하여 가동 중에 전력 단전이 있을 때 인력으로 작업 국수를 배출할 수 있는 공정으로 설비했다. 또한 공장 기계와 장비는 일본 및 중국산 제품으로 설비하지 않고, 순수 국내산으로 완비했다. 그것은 공장 기기 부품의 고장과 단순 소모품이 발생할 때, 국수공장 가동이 장기간 또는 완전히 멈추는 것을 최소화하는 방안이 고려된 사안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향후, 남북 협력사업의 주요한 사업추진에도 참고할 수 있는 선행 사례로서 효율적 방안으로 평가됐다.

남북불교 최초의 협력사업으로 건립된 금강국수공장은 1998년 4월부터 본격 가동되었으며, 전기를 이용하는 자동기계 2대와 운반용 레커 등을 사용했다. 3층 양옥식 건물로 된 국수공장은 1층 밀가루와 옥수수 창고, 2층은 국수 제조공장, 3층에는 국수공장과 사무실을 두었다. 공원 50명이 1일 3교대 근무하던 국수공장의 총지배인(사장)은 리지봉, 공장장 겸 기사장은 김유검이 맡았다.

국수공장이 설립된 후, 가동되는 상황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평불협 민주본부 김도안 회장은 1998년 7월 21일에, 신동수 사무국장은 그해 8월 10일에 직접 방문했다. 신법타 평불협 회장 등 방북단 4명은 1999년 12월 10일에 직접 방문하여 국수 생산과정과 배급 체계를 확인하기도 했다. 그리고 평불협의 국수공장 지원사업은 1998년 4월 17일 ‘금강국수공장후원회’가 결성되어 3천여 명의 후원회원이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등 2000년대에 통일부가 선정하는 모범 교류사업으로 평가된 바 있다.

또한 남북 공조에 의한 국수공장 건립은 분단 52년 만에 처음으로 추진된 협력사업이다. 1998년 3월 준공된 황북 사리원시 만금동의 금강국수공장은 1988년 평양 봉수교회와 평양 장충성당, 1989년 평양 칠골교회 건립 이외의 비종교 분야에서 처음으로 추진된 사례로, 또한 평양 밖의 지역에서 추진한 첫 사례로 남게 됐다.



황북 사리원시 금강국수공장 제조공정(1998년 11월), 좌로부터 신법타 평불협 회장, 여공원, 정인악 평불협 이사장. 사진=《평불협 15년사》(2007).





개성 오관산 영통사 터와 염소(1998년 봄) 사진=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영통사유적발굴보고서》(2002년 9월).



개성 영통사지 발굴조사

1997년 하반기에는 북측 역사유적에 관한 첫 협력 사업이 성사됐다. 분단 이후, 일본 불교계와 학술조사팀의 평양방문을 비롯한 유적 현장조사가 처음으로 추진된 개성 영통사지 유적 발굴조사는 조불련의 국제교류 사업에 있어 최대 공적으로 기록되었다.

2005년 10월에 복원된 개성 영통사는 1997년 9월 중순, 평양 사회과학원에서 북측 사회과학원과 일본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약칭 朝鮮總聯・朝総聯)가 ‘개성 영통사지 발굴조사 협력사업에 관한 각서(MOU)’를 체결하면서 처음 시작됐다.

개성 영통사지 발굴조사는 북측과 일본불교 단체 간의 첫 협력 사업으로, 일본 다이쇼(大正)대학 등의 학술·문화재 전문가들이 직접 참가한 첫 사례이다. 일본 측과의 민간 교류 차원에서는 1994년 6월과 1995년 7월 일본 도쿄(東京)와 교토(京都)에서 조불련과 조선총련이 가진 두 차례의 교류회의 성과로 평가받는다.

오관산 영통사지에 대한 현지 조사는 조・일 공동조사팀으로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조선총련 고고학협회, 일본 다이쇼대학 불교연구소가 답사를 진행했다. 이어서 1998년 4월 중순부터 1999년 10월 중순까지 4차에 걸쳐 영통사지 발굴조사를 가졌다. 그 당시 일본 학술조사팀은 1998년 두 차례에 걸쳐 현장 조사를 하고, 1999년 하반기에는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평양건설건재대학 건축사연구실이 공동으로 유적조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2000년 봄과 가을에 두 차례의 보충 발굴이 있은 다음, 2003년 상반기부터 2005년 10월 30일까지 남북공동 복원사업으로 영통사를 준공했다.

그간의 남북불교 교류가 만남과 평양방문 등 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면, 1997년부터 협력 사업으로 처음 도약했다. 국수공장을 세우고, 폐사지에 대한 국제연대를 통한 교류협력의 시대가 평양으로부터 열렸다.

# 다음 편은 ‘1998년 중국 베이징 아젠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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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북 사리원시 금강국수공장 정문 현판과 남녀공원들(1998년 11월) 사진=《평불협 15년사》(2007).

황북 사리원에 국수공장 세우다

분단 52년 만에 남북한 불교가 국수공장을 건립하기로 처음 합의했다. 북녘동포 돕기의 일환으로 설립한 ‘금강국수공장’은 1997년 5월 26일 평양 조불련 청사에서 평불협 미주본부 김도안 회장과 조불련 중앙위원회 박태호 위원장의 합의로 이루어졌다. 이 같은 협력사업 합의는 그해 4월 13일~14일까지 중국 베이징 해당화식당에서 열린 남북불교 실무회의에서 논의한 대로 남측 불교계가 인도적 차원에서 식량을 지원한다는 합의 이행에 따른 것이다.

이때 평양에서의 합의사항은 1997년 7월 8일 김도안 회장의 서울 기자회견에서 처음 공개됐다. 그 후속으로 신법타 평불협 회장과 심상련 조불련 서기장 등은 그해 7월 15일 중국 베이징 해당화식당에서 남북불교회의를 개최하고 세부사항을 결정했다. 이 회의에서는 국수공장 설립에 관한 제반 사항과 공장의 위치와 명칭, 공장 설비 등을 실무사항이 추가 합의됐다. 또 평불협 미주본부 신동수 사무국장은 같은 해 8월 11일~20일까지 평양을 단독 방문하고 국수공장의 설립 장소와 명칭, 공장 대지, 건립 시기 등에 대한 모니터링을 가졌다.

그 다음, 평불협 미주본부에서는 서울 평불협을 대신하여 1997년 12월 26일~30일까지 평양에 지현 장용철 상임부회장을 단독 파견하여, 그해 12월 29일 평양 조불련 청사에서 조불련과 ‘금강국수공장 설립 합의서’를 체결했다. 총 9개 항목의 합의서는 조불련 중앙위원회 박태호 위원장과 평불협 미주본부 김도안 회장을 대리하여 장지현이 각기 서명했다. 이러한 교류 경로는 현행 법령의 준수와 직접 교류할 수 없는 서울 평불협을 대리하여 평불협 미주본부가 그 업무를 대행하는 방식으로 추진됐다.

국수공장 설립 합의서에는 명칭은 금강(金剛)국수공장으로 한다. 설립지역은 황해북도 사리원시 지역으로 한다. 공장 준공은 1998년 3월 말로 한다. 공장 운영은 조불련 측이 하며, 해당지역 행정위원회에 위탁 경영할 수 있다. 원료 공급은 매월 20톤 규모를 평불협 미주본부가 중국업체를 통해 조불련에 지급한다. 국수 공급은 재해 지역의 탁아소, 어린이학교 등을 우선하며, 조불련 성원들에게도 공급되도록 한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그 당시 국수공장 건립은 1997년 7월 말부터 공장 규모와 건립 지역, 장소 선정을 거쳐 사업 승인을 절차가 진행됐다. 그해 5월 말부터 평불협과 협의한 사항과 더불어 12월 초, 북한 정부의 승인에 따라 12월 29일 평양 조불련 청사에서 ‘금강국수공장 설립에 대한 합의서’가 최종 체결됐다. 그로부터 황해북도 사리원시 인민위원회가 조불련 중앙위원회와 같이 국수공장의 대지 정리와 시공, 공장 기계와 장비 등을 구입하여 1998년 3월 말에 국수공장을 완공했다. 같은 해 4월 6일부터 평불협에서 지원한 밀가루와 옥수수를 혼합하여 하루 2톤의 양으로 7,700그릇 분량의 금강국수를 생산했다. 생산된 국수는 황해도 지역의 탁아소, 소학교 그리고 정방산 성불사, 연탄 심원사 등 조불련 사찰에도 2012년도까지 무상 공급했다.

황북 사리원시 만금동에 건립한 금강국수공장의 ‘금강(金剛)’이란 이름은 가장 유명한 이름이고, 또한 사찰과 불교와 연관된 금강산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특히 국수공장은 공장 가동방식에 있어 반자동식으로 설비를 갖추었다. 전력 사정을 고려하여 가동 중에 전력 단전이 있을 때 인력으로 작업 국수를 배출할 수 있는 공정으로 설비했다. 또한 공장 기계와 장비는 일본 및 중국산 제품으로 설비하지 않고, 순수 국내산으로 완비했다. 그것은 공장 기기 부품의 고장과 단순 소모품이 발생할 때, 국수공장 가동이 장기간 또는 완전히 멈추는 것을 최소화하는 방안이 고려된 사안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향후, 남북 협력사업의 주요한 사업추진에도 참고할 수 있는 선행 사례로서 효율적 방안으로 평가됐다.

남북불교 최초의 협력사업으로 건립된 금강국수공장은 1998년 4월부터 본격 가동되었으며, 전기를 이용하는 자동기계 2대와 운반용 레커 등을 사용했다. 3층 양옥식 건물로 된 국수공장은 1층 밀가루와 옥수수 창고, 2층은 국수 제조공장, 3층에는 국수공장과 사무실을 두었다. 공원 50명이 1일 3교대 근무하던 국수공장의 총지배인(사장)은 리지봉, 공장장 겸 기사장은 김유검이 맡았다.

국수공장이 설립된 후, 가동되는 상황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평불협 민주본부 김도안 회장은 1998년 7월 21일에, 신동수 사무국장은 그해 8월 10일에 직접 방문했다. 신법타 평불협 회장 등 방북단 4명은 1999년 12월 10일에 직접 방문하여 국수 생산과정과 배급 체계를 확인하기도 했다. 그리고 평불협의 국수공장 지원사업은 1998년 4월 17일 ‘금강국수공장후원회’가 결성되어 3천여 명의 후원회원이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등 2000년대에 통일부가 선정하는 모범 교류사업으로 평가된 바 있다.

또한 남북 공조에 의한 국수공장 건립은 분단 52년 만에 처음으로 추진된 협력사업이다. 1998년 3월 준공된 황북 사리원시 만금동의 금강국수공장은 1988년 평양 봉수교회와 평양 장충성당, 1989년 평양 칠골교회 건립 이외의 비종교 분야에서 처음으로 추진된 사례로, 또한 평양 밖의 지역에서 추진한 첫 사례로 남게 됐다.

황북 사리원시 금강국수공장 제조공정(1998년 11월), 좌로부터 신법타 평불협 회장, 여공원, 정인악 평불협 이사장. 사진=《평불협 15년사》(2007).
황북 사리원시 금강국수공장 제조공정(1998년 11월), 좌로부터 신법타 평불협 회장, 여공원, 정인악 평불협 이사장. 사진=《평불협 15년사》(2007).
개성 오관산 영통사 터와 염소(1998년 봄) 사진=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영통사유적발굴보고서》(2002년 9월).
개성 오관산 영통사 터와 염소(1998년 봄) 사진=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영통사유적발굴보고서》(2002년 9월).

개성 영통사지 발굴조사

1997년 하반기에는 북측 역사유적에 관한 첫 협력 사업이 성사됐다. 분단 이후, 일본 불교계와 학술조사팀의 평양방문을 비롯한 유적 현장조사가 처음으로 추진된 개성 영통사지 유적 발굴조사는 조불련의 국제교류 사업에 있어 최대 공적으로 기록되었다.

2005년 10월에 복원된 개성 영통사는 1997년 9월 중순, 평양 사회과학원에서 북측 사회과학원과 일본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약칭 朝鮮總聯・朝総聯)가 ‘개성 영통사지 발굴조사 협력사업에 관한 각서(MOU)’를 체결하면서 처음 시작됐다.

개성 영통사지 발굴조사는 북측과 일본불교 단체 간의 첫 협력 사업으로, 일본 다이쇼(大正)대학 등의 학술·문화재 전문가들이 직접 참가한 첫 사례이다. 일본 측과의 민간 교류 차원에서는 1994년 6월과 1995년 7월 일본 도쿄(東京)와 교토(京都)에서 조불련과 조선총련이 가진 두 차례의 교류회의 성과로 평가받는다.

오관산 영통사지에 대한 현지 조사는 조・일 공동조사팀으로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조선총련 고고학협회, 일본 다이쇼대학 불교연구소가 답사를 진행했다. 이어서 1998년 4월 중순부터 1999년 10월 중순까지 4차에 걸쳐 영통사지 발굴조사를 가졌다. 그 당시 일본 학술조사팀은 1998년 두 차례에 걸쳐 현장 조사를 하고, 1999년 하반기에는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평양건설건재대학 건축사연구실이 공동으로 유적조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2000년 봄과 가을에 두 차례의 보충 발굴이 있은 다음, 2003년 상반기부터 2005년 10월 30일까지 남북공동 복원사업으로 영통사를 준공했다.

그간의 남북불교 교류가 만남과 평양방문 등 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면, 1997년부터 협력 사업으로 처음 도약했다. 국수공장을 세우고, 폐사지에 대한 국제연대를 통한 교류협력의 시대가 평양으로부터 열렸다.

# 다음 편은 ‘1998년 중국 베이징 아젠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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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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