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11. 1998년 윤이상을 모시다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11. 1998년 윤이상을 모시다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장
  • 승인 2021.09.23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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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광법사에 천도재 열다”

우리나라의 근세 역사에 비운의 인물이 많다. 그중에서도 현대음악의 세계 5대 거장으로 선정된 작곡가 윤이상(尹伊桑)이 있다.

1967년 7월 8일 남측의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일명 ‘동백림사건’(東伯林事件, East Berlin 사건)에 연루된 윤이상은 이응로 화백, 천상병 시인 등 194명이 관련된 역대 최대 규모의 간첩단 사건으로 말미암아 50년 넘게 한국의 공안과 보수 세력들이 끈질기게도 그에게 ‘간첩’ 딱지를 계속 끌어다 붙이고 있다. DJ, 노무현 정부에서도 보수 언론과 단체들에 의해 왜곡과 비판이 가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는 윤이상은 여전히 금기시됐을 만큼 이차적 가해가 이뤄졌다.

2010년 3월 개관한 경남 통영 도천테마기념관은 원래 윤이상기념관이었는데, 이념의 색깔 논쟁이 싫다는 이유로 지역 동네 지명으로 사용하다가 2017년 9월 15일 윤이상기념관 이름으로 다시 바꿔 재개관했다. 유네스코 산하 국제음악콩쿠르 세계연맹에 2006년 한국 최초로 가입한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는 박근혜 정부 때, 이를 공동 주최하는 윤이상평화재단이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오르면서 정부 보조금이 끊기는 수모를 당했다.

남측에서 지금까지도 잘못된 왜곡과 모질게 비판하는 사이, 북측에서는 작곡가 윤이상을 세계적인 인물로 드러내고 추앙하고 있다. 1984년 12월 평양에 ‘윤이상음악연구소’가 처음 설립됐다. 1991년 2월 최고 지도자의 특별교시로 평양시 중구역 영광거리에 대지 5,500평의 15층 건물을 1992년 3월에 준공하고, 그해 10월 평양 ‘윤이상음악당’이란 이름으로 개관했다. 이곳에는 동 연구소가 입주하여 그의 음악 연구와 작업을 계승하고 있다. 또 1985년부터 매년 모란봉극장 등과 윤이상음악당에서 ‘윤이상통일음악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북측 정권이 수립된 이래, 특정 장소에서 개인 ‘초상’(얼굴)을 단독으로 걸고 종교의식을 가진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1995년 11월 3일 타계한 작곡가 윤이상을 추모하기 위한 특별한 행사가 1998년 11월 4일 평양 광법사에서 열렸다. 이보다 앞서 1998년 6월 서울에서 그에 대한 추모, 명예회복 운동이 처음 추진되면서 남북불교 교류에 있어 작곡가 윤이상이 자리하게 됐다. 이 시기에 남북한의 불교계가 윤이상을 모시게 된 까닭과 그 과정을 살펴본다.

작곡가 윤이상 장례식(1995.11.6. 독일 베를린 슈판다우 가토우 공원묘지). 사진=윤이상평화재단 홈페이지 사진자료.



상처 입은 용의 귀환

1967년 7월 동백림사건으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윤이상은 그해 12월 서울 형사지법 대법정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무기징역(간첩죄·잠입죄)이 선고되고, 2심과 3심을 거치며 10년형으로 감형된 뒤, 1969년 2월 서독으로 추방됐다.

간첩죄를 입증할 증거자료 한 장 없이 자행된 판결의 ‘북괴대남적화공작단’ 사건이 외신으로 알려지면서 헤르베르트 카라얀, 빌헬름 말러, 리게티 죄르지, 베르너 헨쩨, 칼하인츠 슈톡하우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오토 클렘퍼러, 하랄트 쿤츠 등 161명이 넘는 세계적인 음악예술가와 동료들의 이름으로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보냈다. 이 서한에는 윤이상을 “한국문화와 예술을 한국 바깥으로 알리는 음악계의 귀중한 존재”라 칭했다. 또한 서독 정부 등 적극적인 국제외교로 석방되어 2월 말에 서베를린으로 갔다. 이 사건으로 윤이상은 1995년 11월 타계할 때까지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없게 됐으며, 남측에서 그의 음악 연주가 일절 금지됐다.

이러한 윤이상의 고난의 여정에 대해, 2002년 3월 타계한 독일의 작가 루이제 린저는 윤이상과의 대담록을 1977년 독일 피셔 출판사에서 출간할 때, 그를 지칭하는 《상처받은 용(Der verwundete Drache)》이란 제목을 처음 붙였다, 몸을 다친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는 슬픈 태몽을 가지고 태어난 거장의 음악 세계를 제대로 볼 수 있는 한 권의 책이다.

비록 몸은 영어(囹圄)에서 벗어났으나, 윤이상의 예술혼은 씻을 수 없는 심연의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1971년 킬 문화상을 수상하며, ‘20세기의 중요 작곡가 56인’으로 1972년에 선정됐다. 1988년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 1992년 함부르크 아카데미 플라케테상 등을 수상하며 1995년 5월에 독일 자아브뤼겐 방송이 선정한 ‘20세기 100년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의 한 사람으로, 그때 유럽 평론가들에 의해 ‘유럽에 현존하는 5대 작곡가’로 선정됐다. 사후에는 1999년 2월 미국 뉴욕 브루클린 음악대학원에서 ‘현대음악의 작곡가 5인’으로, 그해 6월에는 브루클린 음악원에서 윤이상 작곡가를 바흐・헨델・모차르트・베토벤・스트라빈스키 등과 같이 역사상 최고의 음악가 44명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현대음악을 움직인 다섯 명의 작곡가로 꼽혔던 그는 “이제, 내 고향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독일이다.”라는 한스러운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을 만큼, 그에게 붙여진 네이밍은 불멸의 영예와도 같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에서 윤이상이란 이름은 이데올로기의 금칙어로 자리 잡고 말았다. 고향인 경남 통영의 앞바다를 늘 그리워한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은 동백림사건으로 간첩 누명에 떠돌다가 귀천(歸天) 후에도 23년이 지나버린 2018년 3월 20일 독일 베를린의 슈판다우 가토우 묘역에 있던 그의 묘를 통영 바다가 훤히 보이는 미륵도 서쪽 언덕에 옮기면서 고향 땅을 밟게 됐다. “더러운 곳에 있어도 항상 맑다.”라는 뜻글자를 새긴 너럭바위 묘비석을 지붕 삼아 영면해 있다. ‘처염상정(處染常淨)’ 네 글자는 전설정 조계종 총무원장의 글씨로 새겼으며, 그 옆에 한 그루씩 심은 해송과 향나무는 호위무사처럼 서 있다.

루이제 린저에 의해 불리운 ‘상처 입은 용’의 귀환은 작곡가 윤이상 사후의 일이다. 1995년 11월 3일 독일 베를린 발트병원에서 타계했다는 소식을 현지에서 접한 전설정, 석법보 등 조계종 종회의원들이 슈판다우 발트크랑켄하우스 자택을 찾아 조문하고, 평소 고인의 ‘불교식 가족장’ 유언에 따라 불교식으로 가족과 함께 치렀다. 그때 국내에서는 인천 용화사에 분향소가 차려지고, 여동생 윤동화 씨와 재일동포 신창식 등 10여 명이 빈소를 지켰다. 같은 해 12월 21일 오후 3시 서울 봉은사 대웅전에서 ‘청공 윤이상 49재’가 봉행됨으로써 육신이 아닌 영혼이 귀환했다. 3년 후, 남과 북에서는 각기 다른 형태의 귀환, 추모 사업이 전개됐다.



고 윤이상선생 3돌 합동추모법회(1998.11.4. 평양 광법사, 안숙선 국악인의 청혼창 장면). 사진=《평불협 15돌 백서》(2007년).



평양 광법사로 간 윤이상

현대음악의 세계 5대 작곡가로 꼽히는 윤이상을 위한 특별한 재의식이 1998년 11월 4일 오전 11시 평양 대성산 광법사 대웅전에서 처음 열렸다. 그날 행사는 ‘고 윤이상 선생 3돌 합동추모법회’로 조불련 중앙위원회가 주최하고,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와 미국 LA의 평불협 미주본부, 남측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 옵서버(observer)로 참가했다.

평양 광법사 추모법회는 당시 평양에 거주하던 이수자 윤이상음악연구소 고문을 비롯한 동 연구소 최창일 소장 등과 조불련 황병대 부위원장, 류인수 책임부원, 리영호 책임부원 등 조불련 임원과 안순찬 광법사 주지, 불자 10여 명이 참여했다. 평불협 미주본부에서는 고문 이정산, 부회장 장지현 2명이 참석했다. 남측에서는 한겨레통일문화재단 방북단 13명 중에서 작곡가 이건용, 지휘자 박범훈, 국악인 안숙선, 김덕수 사물놀이패, 바이올리니스트 김현미, 소프라노 윤인숙,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안동혁 등 7명이 참여했다.

이날 광법사의 천도 법회는 1995년 11월 3일 타계한 윤이상 작곡가의 기일에 맞추어 열렸다. 대웅전 서쪽 신중단에 제단을 놓아 떡과 과일 등 제물을 쌓고, 위패 대신에 윤이상 작곡가의 사진 초상을 걸었다. 이 초상은 해방 이후, 북녘사찰에 처음 걸린 반신 사진으로 서울 평불협에서 미리 제작하여 방북단에 보낸 펼침막이었다.

그날 오전 11시부터 1시간 동안 열린 추모법회는 평양식 제사 방식으로 조불련에서 진행했다. 류인수 조불련 책임부원의 사회로, 먼저 황병대 부위원장은 개식 선언에서 윤이상 선생에 관한 추모의 뜻을 전달하고, 오늘 추모 행사를 열게 된 배경과 사정을 설명했다. 이어 고복(皐復)의식을 빌어 고혼청으로 남측 안숙선 국악인이 《보렴》을 목탁 장단에 맞춰 부른 다음, 조불련을 대표하여 황병대 부위원장이 초헌(初獻)의 술잔을 영전에 올렸다. 이어 조불련 혜안 리영호 책임부원과 평불협 장지현 부회장이 발원문을 낭독하고, 평불협 미주본부 이정산 고문이 요령을 잡고 축원 염불을 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제례 한복을 입고 참석한 이수자 연구소 고문이 마지막으로 영전에 술잔을 올린 다음, 참석 대중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 후, 추모 행사는 윤이상 작곡가의 기일에 맞춰서 조불련 주관으로 매년 평양 광법사에서 열리고 있다.



故 윤이상선생가족귀국추진위원회 결성 기자회견(1998.6.8.) 사진=《한겨레신문》(1998.6.9)



불교계, 윤이상을 품다

국내에서는 어떤 기관과 단체들보다 먼저 불교계가 움직였다. “윤이상 선생의 음악을 아직도 분단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라는 황병기 교수의 수락 발언과 같이 1998년 6월 8일 조계종 총무원 청사 불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빌어 ‘고(故) 윤이상선생가족귀국추진위원회’가 결성됐다. 고향을 등지고 타국에 머무는 가족이 귀국할 수 있도록 돕자는 취지에서 전설정 조계종 종회의장, 신법타 평불협 회장, 황병기 이화여대 교수가 공동추진위원장으로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실장이 사무를 맡고, 불교인권위원회 등 19개 불교단체가 연대했다. 그 후 ‘고 윤이상선생명예회복추진위원회’로 조직을 확대하고, 그해 10월 15일 서울 송현클럽에서 부인 이수자의 회고록 《내 남편 윤이상》 출판기념회를 창작과비평사와 공동 주최했다.

또 윤이상 작곡가에 관한 국민 평가를 묻는 설문조사와 더불어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작곡가 윤이상의 명예 회복을 위한 국민 청원을 국제 공조를 통해 추진했다. 1999년 5월 22일 <한겨레신문>의 광고에서와같이 “김대중 대통령 각하께 호소합니다.”라는 제하의 탄원서를 1996년 설립한 독일의 (사)국제윤이상협회와 주한독일문화원 공동으로 한국 정부에 제출, 촉구했다.

국가적 문화자산으로 만들고, 그의 음악을 계승하는 북측과 달리 남측에서 모질게 다룬 윤이상 작곡가의 사후에라도 불교계가 품은 것은 그 명예와 통일의 역사에 진일보한 일이었다. 1999년 5월 방한했던 국제윤이상협회 월터-볼프강 슈파러 회장과 독일의 대본작가 하랄트 쿤츠는 한결같이 “윤이상은 휴머니스트였고, 음악을 통해 조국의 통일에 이바지하려던 애국자였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 다음 편은 ‘1998년 북녘길이 열리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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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윤이상 장례식(1995.11.6. 독일 베를린 슈판다우 가토우 공원묘지). 사진=윤이상평화재단 홈페이지 사진자료.

상처 입은 용의 귀환

1967년 7월 동백림사건으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윤이상은 그해 12월 서울 형사지법 대법정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무기징역(간첩죄·잠입죄)이 선고되고, 2심과 3심을 거치며 10년형으로 감형된 뒤, 1969년 2월 서독으로 추방됐다.

간첩죄를 입증할 증거자료 한 장 없이 자행된 판결의 ‘북괴대남적화공작단’ 사건이 외신으로 알려지면서 헤르베르트 카라얀, 빌헬름 말러, 리게티 죄르지, 베르너 헨쩨, 칼하인츠 슈톡하우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오토 클렘퍼러, 하랄트 쿤츠 등 161명이 넘는 세계적인 음악예술가와 동료들의 이름으로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보냈다. 이 서한에는 윤이상을 “한국문화와 예술을 한국 바깥으로 알리는 음악계의 귀중한 존재”라 칭했다. 또한 서독 정부 등 적극적인 국제외교로 석방되어 2월 말에 서베를린으로 갔다. 이 사건으로 윤이상은 1995년 11월 타계할 때까지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없게 됐으며, 남측에서 그의 음악 연주가 일절 금지됐다.

이러한 윤이상의 고난의 여정에 대해, 2002년 3월 타계한 독일의 작가 루이제 린저는 윤이상과의 대담록을 1977년 독일 피셔 출판사에서 출간할 때, 그를 지칭하는 《상처받은 용(Der verwundete Drache)》이란 제목을 처음 붙였다, 몸을 다친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는 슬픈 태몽을 가지고 태어난 거장의 음악 세계를 제대로 볼 수 있는 한 권의 책이다.

비록 몸은 영어(囹圄)에서 벗어났으나, 윤이상의 예술혼은 씻을 수 없는 심연의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1971년 킬 문화상을 수상하며, ‘20세기의 중요 작곡가 56인’으로 1972년에 선정됐다. 1988년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 1992년 함부르크 아카데미 플라케테상 등을 수상하며 1995년 5월에 독일 자아브뤼겐 방송이 선정한 ‘20세기 100년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의 한 사람으로, 그때 유럽 평론가들에 의해 ‘유럽에 현존하는 5대 작곡가’로 선정됐다. 사후에는 1999년 2월 미국 뉴욕 브루클린 음악대학원에서 ‘현대음악의 작곡가 5인’으로, 그해 6월에는 브루클린 음악원에서 윤이상 작곡가를 바흐・헨델・모차르트・베토벤・스트라빈스키 등과 같이 역사상 최고의 음악가 44명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현대음악을 움직인 다섯 명의 작곡가로 꼽혔던 그는 “이제, 내 고향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독일이다.”라는 한스러운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을 만큼, 그에게 붙여진 네이밍은 불멸의 영예와도 같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에서 윤이상이란 이름은 이데올로기의 금칙어로 자리 잡고 말았다. 고향인 경남 통영의 앞바다를 늘 그리워한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은 동백림사건으로 간첩 누명에 떠돌다가 귀천(歸天) 후에도 23년이 지나버린 2018년 3월 20일 독일 베를린의 슈판다우 가토우 묘역에 있던 그의 묘를 통영 바다가 훤히 보이는 미륵도 서쪽 언덕에 옮기면서 고향 땅을 밟게 됐다. “더러운 곳에 있어도 항상 맑다.”라는 뜻글자를 새긴 너럭바위 묘비석을 지붕 삼아 영면해 있다. ‘처염상정(處染常淨)’ 네 글자는 전설정 조계종 총무원장의 글씨로 새겼으며, 그 옆에 한 그루씩 심은 해송과 향나무는 호위무사처럼 서 있다.

루이제 린저에 의해 불리운 ‘상처 입은 용’의 귀환은 작곡가 윤이상 사후의 일이다. 1995년 11월 3일 독일 베를린 발트병원에서 타계했다는 소식을 현지에서 접한 전설정, 석법보 등 조계종 종회의원들이 슈판다우 발트크랑켄하우스 자택을 찾아 조문하고, 평소 고인의 ‘불교식 가족장’ 유언에 따라 불교식으로 가족과 함께 치렀다. 그때 국내에서는 인천 용화사에 분향소가 차려지고, 여동생 윤동화 씨와 재일동포 신창식 등 10여 명이 빈소를 지켰다. 같은 해 12월 21일 오후 3시 서울 봉은사 대웅전에서 ‘청공 윤이상 49재’가 봉행됨으로써 육신이 아닌 영혼이 귀환했다. 3년 후, 남과 북에서는 각기 다른 형태의 귀환, 추모 사업이 전개됐다.

고 윤이상선생 3돌 합동추모법회(1998.11.4. 평양 광법사, 안숙선 국악인의 청혼창 장면). 사진=《평불협 15돌 백서》(2007년).
고 윤이상선생 3돌 합동추모법회(1998.11.4. 평양 광법사, 안숙선 국악인의 청혼창 장면). 사진=《평불협 15돌 백서》(2007년).

평양 광법사로 간 윤이상

현대음악의 세계 5대 작곡가로 꼽히는 윤이상을 위한 특별한 재의식이 1998년 11월 4일 오전 11시 평양 대성산 광법사 대웅전에서 처음 열렸다. 그날 행사는 ‘고 윤이상 선생 3돌 합동추모법회’로 조불련 중앙위원회가 주최하고,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와 미국 LA의 평불협 미주본부, 남측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 옵서버(observer)로 참가했다.

평양 광법사 추모법회는 당시 평양에 거주하던 이수자 윤이상음악연구소 고문을 비롯한 동 연구소 최창일 소장 등과 조불련 황병대 부위원장, 류인수 책임부원, 리영호 책임부원 등 조불련 임원과 안순찬 광법사 주지, 불자 10여 명이 참여했다. 평불협 미주본부에서는 고문 이정산, 부회장 장지현 2명이 참석했다. 남측에서는 한겨레통일문화재단 방북단 13명 중에서 작곡가 이건용, 지휘자 박범훈, 국악인 안숙선, 김덕수 사물놀이패, 바이올리니스트 김현미, 소프라노 윤인숙,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안동혁 등 7명이 참여했다.

이날 광법사의 천도 법회는 1995년 11월 3일 타계한 윤이상 작곡가의 기일에 맞추어 열렸다. 대웅전 서쪽 신중단에 제단을 놓아 떡과 과일 등 제물을 쌓고, 위패 대신에 윤이상 작곡가의 사진 초상을 걸었다. 이 초상은 해방 이후, 북녘사찰에 처음 걸린 반신 사진으로 서울 평불협에서 미리 제작하여 방북단에 보낸 펼침막이었다.

그날 오전 11시부터 1시간 동안 열린 추모법회는 평양식 제사 방식으로 조불련에서 진행했다. 류인수 조불련 책임부원의 사회로, 먼저 황병대 부위원장은 개식 선언에서 윤이상 선생에 관한 추모의 뜻을 전달하고, 오늘 추모 행사를 열게 된 배경과 사정을 설명했다. 이어 고복(皐復)의식을 빌어 고혼청으로 남측 안숙선 국악인이 《보렴》을 목탁 장단에 맞춰 부른 다음, 조불련을 대표하여 황병대 부위원장이 초헌(初獻)의 술잔을 영전에 올렸다. 이어 조불련 혜안 리영호 책임부원과 평불협 장지현 부회장이 발원문을 낭독하고, 평불협 미주본부 이정산 고문이 요령을 잡고 축원 염불을 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제례 한복을 입고 참석한 이수자 연구소 고문이 마지막으로 영전에 술잔을 올린 다음, 참석 대중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 후, 추모 행사는 윤이상 작곡가의 기일에 맞춰서 조불련 주관으로 매년 평양 광법사에서 열리고 있다.

故 윤이상선생가족귀국추진위원회 결성 기자회견(1998.6.8.) 사진=《한겨레신문》(1998.6.9)
故 윤이상선생가족귀국추진위원회 결성 기자회견(1998.6.8.) 사진=《한겨레신문》(1998.6.9)

불교계, 윤이상을 품다

국내에서는 어떤 기관과 단체들보다 먼저 불교계가 움직였다. “윤이상 선생의 음악을 아직도 분단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라는 황병기 교수의 수락 발언과 같이 1998년 6월 8일 조계종 총무원 청사 불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빌어 ‘고(故) 윤이상선생가족귀국추진위원회’가 결성됐다. 고향을 등지고 타국에 머무는 가족이 귀국할 수 있도록 돕자는 취지에서 전설정 조계종 종회의장, 신법타 평불협 회장, 황병기 이화여대 교수가 공동추진위원장으로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실장이 사무를 맡고, 불교인권위원회 등 19개 불교단체가 연대했다. 그 후 ‘고 윤이상선생명예회복추진위원회’로 조직을 확대하고, 그해 10월 15일 서울 송현클럽에서 부인 이수자의 회고록 《내 남편 윤이상》 출판기념회를 창작과비평사와 공동 주최했다.

또 윤이상 작곡가에 관한 국민 평가를 묻는 설문조사와 더불어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작곡가 윤이상의 명예 회복을 위한 국민 청원을 국제 공조를 통해 추진했다. 1999년 5월 22일 <한겨레신문>의 광고에서와같이 “김대중 대통령 각하께 호소합니다.”라는 제하의 탄원서를 1996년 설립한 독일의 (사)국제윤이상협회와 주한독일문화원 공동으로 한국 정부에 제출, 촉구했다.

국가적 문화자산으로 만들고, 그의 음악을 계승하는 북측과 달리 남측에서 모질게 다룬 윤이상 작곡가의 사후에라도 불교계가 품은 것은 그 명예와 통일의 역사에 진일보한 일이었다. 1999년 5월 방한했던 국제윤이상협회 월터-볼프강 슈파러 회장과 독일의 대본작가 하랄트 쿤츠는 한결같이 “윤이상은 휴머니스트였고, 음악을 통해 조국의 통일에 이바지하려던 애국자였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 다음 편은 ‘1998년 북녘길이 열리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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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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