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문관: 불락별처(不落別處)
신무문관: 불락별처(不落別處)
  • 박영재
  • 승인 2021.10.05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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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선도회 박영재 교수와 마음공부 48.

성찰배경: 바로 앞의 세 차례 기고글에서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의 뛰어난 세 출가(出家) 제자들, 즉 백장회해(百丈懷海, 720-814) 선사와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 선사에 및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 선사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한편 마조 선사와 천하를 양분했던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 선사의 뛰어난 제자들 가운데 천황도오(天皇道悟, 748-807) 선사는 앞의 기고글 ‘신무문관: 여당작불(余當作佛)’에서 이미 다루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승속을 초월해 동시대를 함께 호흡하며 교류했던, 약산유엄(藥山惟儼, 751-834) 선사와 마조 선사의 유발 제자인 방온(龐蘊, ?-808) 거사에 관한 일화가 담긴 <조당집祖堂集>과 <벽암록(碧巖錄)>을 통해 <무문관(無門關)>에 없는 부분들을 상보적(相補的)으로 채우고자 합니다. 

천 명의 성현도 알지 못한다[千聖不識]
먼저 석두 선사와 약산 선사의 범성(凡聖)에 관한 문답이 <조당집祖堂集>(952년)과 <선문염송禪門拈頌>(1226년)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약산 스님이 좌선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석두 선사께서 ‘그대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고 물었다. 
약산이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선사께서 ‘그렇다면 한가하게 앉아있는 것이로구나.’라고 응대하셨다. 그러자 약산이 ‘한가하게 앉아있다면 그 역시 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선사께서 ‘그대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인가?’하고 반문하셨다. 약산이 대답하기를, ‘그 무엇은 천 명의 성현(聖賢)도 역시 알지 못합니다.’ 이에 석두 선사께서 ‘오래 함께 지내고도 이름조차 몰랐는데/ 걸림 없이 서로 함께 어디로 가는가?/ 자고로 뭇 성현들도 오히려 알지 못했거늘/ 경솔한 범부들이 어찌 쉽게 밝힐 수 있겠는가?[從來共住不知名/ 任運相將作麽行./ 自古上賢猶不識/ 造次常流豈可明.]’라는 게송(偈頌)으로 약산의 경계를 찬탄했다.”

제창: 서산대사께서 지은 <선가귀감(禪家龜鑑)>에 보면 “수행의 요체(要諦)는 다만 범부(凡夫)의 번뇌 망상을 없애는 것일 뿐, 따로 성인(聖人)의 요해(了解)한, 즉 체득해 깨달은 경지란 없느니라.[修行之要 但盡凡情 別無聖解.]”란 대목이 있습니다. 이어 이에 대해 “병이 완전히 나아 약 쓸 일이 없게 되면, 다시 앓기 전의 본래 그 사람의 모습을 되찾게 되는 것이네.[病盡藥除 還是本人.]”란 주해가 달려있습니다.
따라서 이럴 경우 깨달았다는 성인이니 삼독(三毒), 즉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중독된 범부라느니 하는 분별이 철저히 떨어져 나간, ‘범성불이(凡聖不二)’의 멋진 삶을 누구나 저절로 살게 될 것입니다. 덧붙여 만일 우리가 ‘부처’라는 분별을 일으키는 순간, 이원적(二元的) 상대인 ‘중생’이란 분별도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이럴 경우 결코 삼독의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요. 

방거사호설편편[龐居士好雪片片]
<벽암록> 제42칙에 방온 거사(居士)와 절친이었던 약산 선사와의 교류가 담긴 멋진 일화가 있습니다. 먼저 본칙(本則)은 다음과 같습니다.

“방 거사가 약산 선사에게 작별 인사를 드리자 약산 선사께서 선객(禪客) 열 명에게 명하여 산문까지 방 거사를 전송하도록 했다. 때 마침 겨울날인지라 하늘에 눈이 펄펄 날리고 있었다. 이때 방 거사가 허공을 가리키며 ‘아! 탐스러운 눈송이! 송이 송이마다 딴 곳에는 떨어지지 않는구나![好雪片片不落別處]’라고 했다. 그러자 전(全) 선객이 ‘그러면 어디에 떨어집니까?(落在什麽處)’하고 물었다. 이에 방 거사가 즉시 전 선객의 빰을 한 대 후려갈겼다. 즉시 빰을 맞은 전 선객이 ‘거사님! 이건 너무 무례한 것 아닙니까?’하고 대들었다. 이 항의에 방 거사는 ‘그대는 저 눈송이가 떨어지는 곳도 모르고 건방지게 진짜 선객인 척하고 있으나 그대의 이름은 이미 염라대왕의 장부에 기입되어 있네!’라고 했다. 전 선객도 질세라 ‘거사님! 당신도 역시 눈송이의 낙처를 모르고 있을 테지요!’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방거사 또다시 한 대 후려갈기며 ‘눈은 뜨고 있으나 장님과 같고, 입은 열고 있으나 벙어리와 같구나!’라고 일갈했다.”

참고로 이 화두에 대해 설두(雪竇) 선사께서 방 거사를 거들며, ‘첫 번째 물었을 때 눈덩이를 크게 만들어 즉시 전 선객의 얼굴에 던져 오만한 콧대를 꺾어 버렸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착어(著語)하고 있습니다.

제창提唱: 사실 이미 오래전에 만법(萬法)과 벗이 된, 만년의 방 거사는 항상 언제 어디서나 우주와 하나가 된 묘경(妙境)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가 약산 선사께서 주석하던 약산원(藥山院)에 한동안 머물다, 말년에 고향인 양양(襄陽)으로 귀향하려고 산문을 나섰을 때, 마침 탐스럽게 내리고 있던 눈을 접하면서 ‘호설편편! 불락별처!’라며 당시의 묘경을 그저 무심(無心)히 토로했을 뿐 그 자신은 떨어지는 어떤 특정한 곳을 결코 분별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방 거사는 단지 평등에 즉(卽)한 대자연을 찬탄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수행이 미숙했던 전 선객이 방 거사의 말에 얽매여, 즉 차별관에 사로잡혀 눈송이의 낙처를 특정 지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만일 그 당시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방 거사의 ‘호설편편 불락별처!’라는 경계에 대해 무어라고 응대하셨겠습니까! 

군더더기: 참고로 선에 대해 조금 관심을 가진 분인 경우, 방 거사를 거명만 해도 일가가 어느 날 좌탈(坐脫), 입탈(立脫)하며 일시에 사라진 신비로운 일화를 떠올릴 것입니다. 특히 영특하다고 소문난 막내딸이 방거사가 좌탈하려고 했던 시기에 먼저 좌탈한 일화는 좀 더 깊이 성찰해야할 대목입니다. 사실 이 일화는 단지 통찰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나눔의 측면은 전무(全無)합니다. 만약 막내딸이 바른 통찰체험을 바탕으로 정말 지혜로웠다면, 아버지 방거사의 가풍을 널리 선양하는 동시에 파파 할머니가 될 때까지 나눔 실천적 삶을 치열하게 이어갔어야 마땅했던 일일 것입니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런 수행풍토를 일신하기 위해 훗날 <십우도(十牛圖)>가 출현하여, 화두 타파는 수행과정 중의 하나일 뿐 선수행자의 최종 지향점은 제10단계인 ‘입전수수(入鄽垂手)’, 즉 어려운 이웃과 함께 더불어 나눔 실천적 삶을 이어가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고 사료됩니다.

끝으로 만일 지금 떨어지는 눈이 없어 낙처를 당장 살펴보기 어려다고 하시는 분이 있다면, 요즈음 같은 가을철에 인성맞춤인 다음과 같은 응용공안을 함께 살펴도 좋을 것 같네요.
  
“아! 가을 바람에 날리며 떨어지는 나뭇잎들!/ 황금빛 잎사귀마다 다른 곳에는 떨어지지 않는구나!/ 자! 일러보시오. 어디 곳에 떨어지는지를!”

박영재 교수는 서강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3월부터 1989년 8월까지 강원대 물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1989년 9월부터 2021년 2월까지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서강대 물리학교 명예교수이다.
1975년 10월 선도회 종달 이희익 선사 문하로 입문한 박 교수는 1987년 9월 선사의 간화선 입실점검 과정을 모두 마쳤다. 1991년 8월과 1997년 1월 화계사에서 숭산 선사로부터 두 차례 점검을 받았다. 1990년 6월 종달 선사 입적 후 지금까지 선도회 지도법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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