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목수의 삶이 밴 ‘5층 목탑’
늙은 목수의 삶이 밴 ‘5층 목탑’
  • 서현욱 기자
  • 승인 2021.11.22 16: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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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무형문화재 제29호 소목장 단원 정진호 고희전 출품작 화제
단원 정진호(경남무형문화재 제29호 소목장)의 '사방불5층목탑'. 높이 285㎝, 가로와 세로 모두 190㎝. 홍송, 은행나무, 유칠.



공자는 “나이 일흔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를 넘어서거나 어긋나지 않았다.”(<논어> 위정편)고 했다. 반세기 동안 나무를 깎아 짜 맞추던 소목장 정진호는 고희의 나이에 ‘5층 목탑’을 만들었다. 뜻대로 행해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나이가 코 앞 인 3, 4년 전 불현 듯 ‘목탑’ 하나를 짓고 싶었다. 내 작품 하나 만들고 싶단 오랜 염원이 ‘5층 목탑’을 탄생시켰다.

불심 깊은 불자가 아니라지만, 정진호는 불가와 인연이 오래다. 일타 스님 등 많은 스님들과 인연을 맺었고, 부처님이 앉는 자리와 고승이 앉아 법문하는 자리, 법상 등을 만들었다. 해인사의 정대불사에 사용되는 연(輦, 가마)도 그의 작품이다. ‘부처님을 등에 지고 일하면 밥은 안 굶는다’는 한 스님의 말에 법당을 조성했다. 진주 연화사 연좌대를 만들고 진주불교청년회의 ‘조직원’이 되었다고 회고하는 정진호에게 불가와의 인연은 일타 스님과의 만남으로 깊어졌다. 법상(法床)을 만들기 위해 그 유래를 물으러 간 곳이 해인사 지족암이었고, 그곳에서 일타 스님을 만났다. 법상의 유래를 연비 한 손으로 직접 써서 주신 일타 스님을 진주에서 해인사까지 먼 길을 달려 때마다 찾아뵈었다. 그때 시절을 정진호는 “갈 때는 설렜고 올 때는 벅찼다.”고 말한다. 어느 날 어떤 분이 일타 스님에게 글 한편을 부탁하는 자리에서, “니도 하나 써줄까”라는 스님의 말에 “기왕이면 큰 거로 하나 써 주이소”라고 답해 ‘’법성게‘ 10편을 받았다. 술 마시다 후배 집에 두고 온 일타 스님의 글씨를 술 깬 뒤 찾은 정진호는 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10폭의 나무병풍을 만들었다. 글씨를 복사해 병풍을 만들어야 했는데, 원본 그대로 나무에 대고 서각해 일타 스님의 원본 글씨는 사라지고 말았지만, 하나 뿐인 일타 스님의 글씨가 10폭 병풍으로 남았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목수질하는 터전이 ’단원공방(檀苑工房)‘이다. 단원은 친분 있는 의석사 스님이 지어줬다. 박달나무처럼 단단히 한 길로 가라 지워 준 ’박달나무 동산‘에서 법상을 꾸미고 법당을 만들었다. 몇 해 전 보물 옥천사 지장보살도 보관함과 시왕도 보관함을 만들었다. 시왕도는 2점이 도난당해 8점뿐이었지만 두 점이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열점을 부탁받아 만들었고, 그 사이 프랑스에 간 시왕도 1점이 환수됐다. 정진호는 “불가의 인연법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연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훨씬 많은 요인들이 얽히고설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그때를 말한다.

단원 정진호는 1952년 경북 영일군 대송면 빈농의 5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또래들이 교복입고 학교 갈 때 지게를 지고 나무하러 산에 가던 그는 열여섯 살에 가출해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눈 감아도 코 베어간다는 서울에서 중화요리 집에서 ‘철가방’을 들고 일하다가, 기술이라도 배우면 배달보다 낫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목공사에 취직했다. 목공사 취직 후 한 달 만에 더 큰 ‘공예사’로 옮겼고, 조각도를 쥐고 점차 자신이 붙자 불단 등을 제작하는 더 큰 회사로 옮겨 일했다. 본격적인 조각 일에 대한 권유가 인연 따라 일어나자 경남 진주로 가 진주시불교신도회 회장을 지낸 김동진(이조공예사) 선생을 첫 스승으로 모시고 일했다. 갑작스런 생사의 이별로 김동진 선생과의 짧았던 인연을 뒤로하고,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인 정돈산 선생 밑에서 17년 동안 일했다. 정돈산 선생은 김동진 선생의 이조공예사를 이어 운영하다 자신의 ‘의천공방’으로 바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운영했다. 정진호에게 김동진은 첫 스승이고 정돈산은 마지막 스승이다. 정진호는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이수자가 됐고, 2004년 10월 경남무형문화재 제29호 소목장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법성게 10폭 병풍(일타 스님 글씨)



단원은 자신의 미래를 ‘단원소목연구회 회원’과 둘째 아들 정연오를 ‘희망’이자 ‘미래’라고 말한다. 벌써 10년 넘게 꾸준히 소목을 해 온 이들이 적지 않고, 단원소목연구회에서 세 명의 전통 목가구 이수가가 나왔다. 단원은 “무형문화재, 소목장이라는 이름의 무게감에 후세대에 전통 목가구 제작기법과 정신까지 물려줘야 한다는 책무가 생겼다.”며 “10여 년 전 소목에 관심이 있다는 한 두 명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10여 명이 공방에 드나들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이 배움이 짧고 대단한 명성도 없는 나를 꼬박꼬박 ‘선생님’이라 부르며 누추한 공방을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다.”고 말한다. 나무 구하는 일로 단원이 크게 다친 일을 계기로 대학 때부터 단원의 일을 도운 둘째 아들 연오는 “재주가 둔하고 손끝이 맵진 않지만, 그래도 지금은 전수조교”가 되었다. 단원은 “이제 일흔 고개를 넘긴 나이, 내 길을 잇는 아들과 10여 명의 단원소목연구회 회원들, 이들이 나의 희망이자 미래”라고 말한다.

단원 정진호는 끼니를 해결하려 목수가 됐지만, 내공이 탄탄하게 쌓였다. 1995년부터 단원공방을 운영하며, 작품활동을 해왔다. 1987년 제12회 불교미술전람회 동상 수상부터 거의 매년 전승공예대전, 불교미술전람회, 진주시 공예품 경진대회, 경상남도 공예품 경진대회에 꾸준히 작품을 출품해 수상했다. 전통공예명품 회원전, 진주공예인 협회전, 한국공예문화진흥원 개관기념전 등에 참가했고, 2013년 개인전에 이어 고희전이 두 번째 개인전이다. 경남도 기능경기대회 목공예 부문 심사위원, 대한민국 전승공예전 심사위원 등 다양한 공예전의 심사위원을 지냈다. 진주공예협회 회장이며, (사)한국전통공예산업진흥회 감사, (사)한국중요무형문화재보존협회 이사 등도 지냈다. 2008년 국립수목원이 진행한 전통 목가구 기록화 사업에 참여해 전통 목가구 재현과 재현 방법을 모두 기록화하는 데 참여했다. 당시 만든 삼층장 가께수리, 경상도반닫이, 황해도 반닫이가 지금도 국립수목원에 전시돼 있다.

그런 그가 고희에 작품전을 가진 것은 지난 9월 23일부터 28일까지다. 코로나19 여파에도 묵묵히 작품을 준비해 경남문화예술회관 제2전시실을 빌려 칠보공예가 지안재 전종실과 ‘소목의 멋과 은칠보공예의 공감’을 주제로 공동 전시회를 열었다.



사방불오층목탑 부재에 새겨진 조각들.



“나무냄새가 너무 좋고 나이테가 만들어 낸 세월의 문양이 좋아 한평생 전통 목가구에 매료돼 살았지만, 여전히 미완의 길을 걷고 있다”는 단원 정진호는 세상모르던 10대 때부터 나무 깎는 일을 시작해 일흔 고개 정점에 수천수만 번의 톱질과 대패질로 살려낸 ‘소목의 멋’을 대중에게 선보였다. 전시회에는 사방불오층목탑 외에 법성게 10폭 병풍(일타 스님 글씨)삼층장, 삼층찬장, 약장, 통영옻칠상감이층장, 책장, 백동숭숭이반닫이, 경상도반닫이, 진주반닫이, 먹감이층애기장, 소나무이층버선농, 상감문갑사방탁자, 먹갑문갑사방탁자, 평상, 태극머릿장, 좌등 등 20여점을 내놓았다.

단원의 ‘소목의 멋’이 투영된 최고의 작품이 ‘오층 목탑’이다. 단원은 이 목탑에 우선 ‘사방불오층목탑(四方佛五層木塔)’이라고 이름 붙였다. 하지만 정식 이름이 아니다. 어느 절, 어느 곳과 인연을 맺어 이름이 붙여질지, 아니면 단원이 평생 소장하며 새로운 이름이 생길지는 모른다. ‘미완의 5층 목탑’이라고 부르는 이 목탑은 생활에 쫓겨 ‘주문제작’에 몰두해, ‘진정한 작품’을 발원하면서 태어났다.

그는 “불탑은 부처님 그 자체라고 말한다. 나무를 깎는 목수인 나는 목탑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소목장인 나는 건물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규모의 목탑을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목탑을 만들기로 결정한 후 다른 일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몇 층을 만들 건지, 어떤 형태로 만들 건지, 고심하다가 저절로 만들고 싶은 목탑의 형태가 떠올랐다. “목탑이 스스로 내 안으로 들어왔다.”고 단원은 그때를 회고한다. 목탑의 부재를 마련하면서 목탑에 새길 조각상도 저절로 떠올랐다.

단원은 자신의 목탑이 다른 탑들과는 다르길 바랐다. 탑신에 변화를 주었다. 동서남북 네 면을 기본으로 6면이나 8면이면 더 입체감이 있을 것 같았다. 면이 늘면 조각품도 그만큼 늘어나는 장점도 있었다. 과감한 탑신 변화를 시도했고, 그 결과 각 층마다 12면으로 탑을 만들었다. 부처님에 대한 최대한의 경의를 담은 탑신이 12면으로 보았고, 12보살을 모두 한 면에 모실 수 있었다. 각층의 지붕도 변화를 줬다. 평범한 일면 지붕이 아닌 각도를 주어 지붕을 변형했다. 그렇게 5층의 탑신과 지붕을 만들었다. 탑 주변은 370여 개의 촛불을 형상화해 장식했다.



고희전에 출품한 약장. 약장은 전통 고가구 중에서도 만들기 까다로운 작품으로 꼽힌다.
단원 정진호(경남무형문화재 제29호 소목장)의 '사방불5층목탑'. 높이 285㎝, 가로와 세로 모두 190㎝. 홍송, 은행나무, 유칠.

공자는 “나이 일흔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를 넘어서거나 어긋나지 않았다.”(<논어> 위정편)고 했다. 반세기 동안 나무를 깎아 짜 맞추던 소목장 정진호는 고희의 나이에 ‘5층 목탑’을 만들었다. 뜻대로 행해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나이가 코 앞 인 3, 4년 전 불현 듯 ‘목탑’ 하나를 짓고 싶었다. 내 작품 하나 만들고 싶단 오랜 염원이 ‘5층 목탑’을 탄생시켰다.

불심 깊은 불자가 아니라지만, 정진호는 불가와 인연이 오래다. 일타 스님 등 많은 스님들과 인연을 맺었고, 부처님이 앉는 자리와 고승이 앉아 법문하는 자리, 법상 등을 만들었다. 해인사의 정대불사에 사용되는 연(輦, 가마)도 그의 작품이다. ‘부처님을 등에 지고 일하면 밥은 안 굶는다’는 한 스님의 말에 법당을 조성했다. 진주 연화사 연좌대를 만들고 진주불교청년회의 ‘조직원’이 되었다고 회고하는 정진호에게 불가와의 인연은 일타 스님과의 만남으로 깊어졌다. 법상(法床)을 만들기 위해 그 유래를 물으러 간 곳이 해인사 지족암이었고, 그곳에서 일타 스님을 만났다. 법상의 유래를 연비 한 손으로 직접 써서 주신 일타 스님을 진주에서 해인사까지 먼 길을 달려 때마다 찾아뵈었다. 그때 시절을 정진호는 “갈 때는 설렜고 올 때는 벅찼다.”고 말한다. 어느 날 어떤 분이 일타 스님에게 글 한편을 부탁하는 자리에서, “니도 하나 써줄까”라는 스님의 말에 “기왕이면 큰 거로 하나 써 주이소”라고 답해 ‘’법성게‘ 10편을 받았다. 술 마시다 후배 집에 두고 온 일타 스님의 글씨를 술 깬 뒤 찾은 정진호는 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10폭의 나무병풍을 만들었다. 글씨를 복사해 병풍을 만들어야 했는데, 원본 그대로 나무에 대고 서각해 일타 스님의 원본 글씨는 사라지고 말았지만, 하나 뿐인 일타 스님의 글씨가 10폭 병풍으로 남았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목수질하는 터전이 ’단원공방(檀苑工房)‘이다. 단원은 친분 있는 의석사 스님이 지어줬다. 박달나무처럼 단단히 한 길로 가라 지워 준 ’박달나무 동산‘에서 법상을 꾸미고 법당을 만들었다. 몇 해 전 보물 옥천사 지장보살도 보관함과 시왕도 보관함을 만들었다. 시왕도는 2점이 도난당해 8점뿐이었지만 두 점이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열점을 부탁받아 만들었고, 그 사이 프랑스에 간 시왕도 1점이 환수됐다. 정진호는 “불가의 인연법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연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훨씬 많은 요인들이 얽히고설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그때를 말한다.

단원 정진호는 1952년 경북 영일군 대송면 빈농의 5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또래들이 교복입고 학교 갈 때 지게를 지고 나무하러 산에 가던 그는 열여섯 살에 가출해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눈 감아도 코 베어간다는 서울에서 중화요리 집에서 ‘철가방’을 들고 일하다가, 기술이라도 배우면 배달보다 낫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목공사에 취직했다. 목공사 취직 후 한 달 만에 더 큰 ‘공예사’로 옮겼고, 조각도를 쥐고 점차 자신이 붙자 불단 등을 제작하는 더 큰 회사로 옮겨 일했다. 본격적인 조각 일에 대한 권유가 인연 따라 일어나자 경남 진주로 가 진주시불교신도회 회장을 지낸 김동진(이조공예사) 선생을 첫 스승으로 모시고 일했다. 갑작스런 생사의 이별로 김동진 선생과의 짧았던 인연을 뒤로하고,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인 정돈산 선생 밑에서 17년 동안 일했다. 정돈산 선생은 김동진 선생의 이조공예사를 이어 운영하다 자신의 ‘의천공방’으로 바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운영했다. 정진호에게 김동진은 첫 스승이고 정돈산은 마지막 스승이다. 정진호는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이수자가 됐고, 2004년 10월 경남무형문화재 제29호 소목장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법성게 10폭 병풍(일타 스님 글씨)
법성게 10폭 병풍(일타 스님 글씨)

단원은 자신의 미래를 ‘단원소목연구회 회원’과 둘째 아들 정연오를 ‘희망’이자 ‘미래’라고 말한다. 벌써 10년 넘게 꾸준히 소목을 해 온 이들이 적지 않고, 단원소목연구회에서 세 명의 전통 목가구 이수가가 나왔다. 단원은 “무형문화재, 소목장이라는 이름의 무게감에 후세대에 전통 목가구 제작기법과 정신까지 물려줘야 한다는 책무가 생겼다.”며 “10여 년 전 소목에 관심이 있다는 한 두 명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10여 명이 공방에 드나들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이 배움이 짧고 대단한 명성도 없는 나를 꼬박꼬박 ‘선생님’이라 부르며 누추한 공방을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다.”고 말한다. 나무 구하는 일로 단원이 크게 다친 일을 계기로 대학 때부터 단원의 일을 도운 둘째 아들 연오는 “재주가 둔하고 손끝이 맵진 않지만, 그래도 지금은 전수조교”가 되었다. 단원은 “이제 일흔 고개를 넘긴 나이, 내 길을 잇는 아들과 10여 명의 단원소목연구회 회원들, 이들이 나의 희망이자 미래”라고 말한다.

단원 정진호는 끼니를 해결하려 목수가 됐지만, 내공이 탄탄하게 쌓였다. 1995년부터 단원공방을 운영하며, 작품활동을 해왔다. 1987년 제12회 불교미술전람회 동상 수상부터 거의 매년 전승공예대전, 불교미술전람회, 진주시 공예품 경진대회, 경상남도 공예품 경진대회에 꾸준히 작품을 출품해 수상했다. 전통공예명품 회원전, 진주공예인 협회전, 한국공예문화진흥원 개관기념전 등에 참가했고, 2013년 개인전에 이어 고희전이 두 번째 개인전이다. 경남도 기능경기대회 목공예 부문 심사위원, 대한민국 전승공예전 심사위원 등 다양한 공예전의 심사위원을 지냈다. 진주공예협회 회장이며, (사)한국전통공예산업진흥회 감사, (사)한국중요무형문화재보존협회 이사 등도 지냈다. 2008년 국립수목원이 진행한 전통 목가구 기록화 사업에 참여해 전통 목가구 재현과 재현 방법을 모두 기록화하는 데 참여했다. 당시 만든 삼층장 가께수리, 경상도반닫이, 황해도 반닫이가 지금도 국립수목원에 전시돼 있다.

그런 그가 고희에 작품전을 가진 것은 지난 9월 23일부터 28일까지다. 코로나19 여파에도 묵묵히 작품을 준비해 경남문화예술회관 제2전시실을 빌려 칠보공예가 지안재 전종실과 ‘소목의 멋과 은칠보공예의 공감’을 주제로 공동 전시회를 열었다.

사방불오층목탑 부재에 새겨진 조각들.
사방불오층목탑 부재에 새겨진 조각들.

“나무냄새가 너무 좋고 나이테가 만들어 낸 세월의 문양이 좋아 한평생 전통 목가구에 매료돼 살았지만, 여전히 미완의 길을 걷고 있다”는 단원 정진호는 세상모르던 10대 때부터 나무 깎는 일을 시작해 일흔 고개 정점에 수천수만 번의 톱질과 대패질로 살려낸 ‘소목의 멋’을 대중에게 선보였다. 전시회에는 사방불오층목탑 외에 법성게 10폭 병풍(일타 스님 글씨)삼층장, 삼층찬장, 약장, 통영옻칠상감이층장, 책장, 백동숭숭이반닫이, 경상도반닫이, 진주반닫이, 먹감이층애기장, 소나무이층버선농, 상감문갑사방탁자, 먹갑문갑사방탁자, 평상, 태극머릿장, 좌등 등 20여점을 내놓았다.

단원의 ‘소목의 멋’이 투영된 최고의 작품이 ‘오층 목탑’이다. 단원은 이 목탑에 우선 ‘사방불오층목탑(四方佛五層木塔)’이라고 이름 붙였다. 하지만 정식 이름이 아니다. 어느 절, 어느 곳과 인연을 맺어 이름이 붙여질지, 아니면 단원이 평생 소장하며 새로운 이름이 생길지는 모른다. ‘미완의 5층 목탑’이라고 부르는 이 목탑은 생활에 쫓겨 ‘주문제작’에 몰두해, ‘진정한 작품’을 발원하면서 태어났다.

그는 “불탑은 부처님 그 자체라고 말한다. 나무를 깎는 목수인 나는 목탑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소목장인 나는 건물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규모의 목탑을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목탑을 만들기로 결정한 후 다른 일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몇 층을 만들 건지, 어떤 형태로 만들 건지, 고심하다가 저절로 만들고 싶은 목탑의 형태가 떠올랐다. “목탑이 스스로 내 안으로 들어왔다.”고 단원은 그때를 회고한다. 목탑의 부재를 마련하면서 목탑에 새길 조각상도 저절로 떠올랐다.

단원은 자신의 목탑이 다른 탑들과는 다르길 바랐다. 탑신에 변화를 주었다. 동서남북 네 면을 기본으로 6면이나 8면이면 더 입체감이 있을 것 같았다. 면이 늘면 조각품도 그만큼 늘어나는 장점도 있었다. 과감한 탑신 변화를 시도했고, 그 결과 각 층마다 12면으로 탑을 만들었다. 부처님에 대한 최대한의 경의를 담은 탑신이 12면으로 보았고, 12보살을 모두 한 면에 모실 수 있었다. 각층의 지붕도 변화를 줬다. 평범한 일면 지붕이 아닌 각도를 주어 지붕을 변형했다. 그렇게 5층의 탑신과 지붕을 만들었다. 탑 주변은 370여 개의 촛불을 형상화해 장식했다.

고희전에 출품한 약장. 약장은 전통 고가구 중에서도 만들기 까다로운 작품으로 꼽힌다.
고희전에 출품한 약장. 약장은 전통 고가구 중에서도 만들기 까다로운 작품으로 꼽힌다.

맨 아래층(1층)에는 8대 금강역사와 비천상을 새겼다. 한 면에 두 명씩 모두 4개면에 8대 금강을 새겼고, 나머지 면에 비천상을 새겼다. 8금강이 지키고 비천들이 경배하는 2층에 12보살상을 새겼다. 탑의 정중앙 3층에는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네 분의 부처를 모시고, 각 부처마다 양 옆에 동자상(童子像)을 돋을새김했다. 또 네 분의 부처 주변(4층)에는 향, 등, 꽃, 과일, 차와 쌀 등 육법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새겼다. 그리고 마지막 5층은 불교의 상징인 ‘법륜(수레바퀴)’을 새겼고 불법승 삼보를 뜻하는 공양물을 조각했다. 4층에 육법공양을 새긴 것은 5층탑의 중심이 3층이기에 부처님을 모시기 위한 것이었다.

마지막이일지도 모를, 3년 넘는 시간을 바쳐 5층탑을 만들었다. 높이285㎝, 가로와 세로 모두 190㎝ 크기의 목탑은 세 부분으로 분리되도록 제작했다. 목탑의 특성상 내실이 마련되어 있다. 홍송과 은행나무를 썼고, 유칠(들기름으로 만든 칠)로 마감했다.

단원은 “나의 5층 목탑이 걸 맞는 이름을 얻고 인연 있는 자리에서 내 마지막 작품이 오래 오래 사람들의 눈길을 받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의 ‘사방불오층목탑’은 언제 걸 맞는 이름을 받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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