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41. 밤에 빛나는 별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41. 밤에 빛나는 별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1.12.20 10: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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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만 별이 빛나는 게 아니야

땅에도 수없이 많은 별이 별똥별처럼 빛나고 있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같은 고층 별빛도 있고

가로등 불빛처럼 졸고 있는 별도 있어.



#작가의 변

집에 돌아오니
꿈만 같던 3주의 휘슬러 호텔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생활하고 있다. 익숙했던 것에서 가끔은 떠나봐야 그 고마움을 더욱 느끼게 된다. 집에서 늘 생활하면 집이 얼마나 편안하고 아늑한 쉼의 공간인지 잊을 때가 있다. 가족이 왜 소중한지도 있을 때가 있다. 거리도 멀지 않고 주말에 쉬는 날마다 집에 와서 자고 갔지만 마음은 늘 붕 떠있는 상태였다. 안정되게 한 곳에 정착하여 생활하는 것이 아닌 여행자 같은 느낌이었다.
아침마다 눈이 쌓인 스키장을 걸어 내려오는 일은 고난의 아침을 알리는 일이었지만 밤하늘과 스키장을 발끝으로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비록 근무할 때 신는 신발 하나만 달라 가져가서 눈이 깊어 빠지면 양말 까지 다 젖어 버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휘슬러 직장생활
15분전까지 출근하라고 해서 그걸 맞추다 보면 20분전 아니 30분전까지 출근하기도 했다. 물론 커피 한 잔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좋기는 했다. 끝날 땐 제시간에 딱 맞춰 끝나기 힘든 게 문제이기도 하다. 락카는 2명이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해서 다이얼 키로 만들어 놓았는 데 이 다이얼 키를 끝내 열지 못했다.
두어 번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서 열어 달라고 했지만 더는 아침 출근 바쁜 시간에 락카 열쇄로 시간을 소비하기 싫어서 열쇄를 락카 밑 깊숙한 곳에 숨겨 두고 같이 락카를 쓰는 인도계 동료에게 락카를 열어 놓고 다니자고 했다.
어차피 락카에 귀중품을 보관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칼 셋트를 제공해 주지 않아서 다들 자기들의 칼 셋트를 사서 칼 가방을 들고 다녔다. 칼 하나에 200불 이상을 주고 셋트에 800불을 주었다는 동료도 있었다. 나도 첫 주에 쉬는 날 집에 와서 집에 있던 칼 셋트를 가지고 갔다. 그런데 칼 셋트에 많이 쓰던 칼을 찾으니 없다. 그래서 한국식품점에서 50불을 주고 도루코 칼을 하나 사가지고 가서 이거 50불짜리지만 쌍둥이 칼보다 좋지 않느냐고 자랑을 했다.

휘슬러 기숙사생활
기숙사는 처음 비디오에서 봤을 때는 레이크루이스에서 생활할 때처럼 2인 1아파트였는데, 막상 가기로 한 전날 이멜이 와서 벙커베드를 사용해야하고 4인1아파트라고 했다. 왠지 속은 느낌이 들었고 실망을 많이 했지만 이미 다 준비한 상태라서 가기로 했다. 막상 2인1실에서 생활해 보니 밤마다 코고는 소리 밖에서 밤 2시가 넘어 떠드는 소리 등에 잠을 못자고 하루에 4시간 이상을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잠도 못자고 침대에 누워 있는 것조차 고문처럼 느껴졌다. 일주일에 한 번 빨래방에 코인 라운드리를 사용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하다 보니 내려가 보면 자리가 없어 다시 올라왔다가 내려가길 반복했다. 조용한 곳을 달라고 했더니 4층 제일 꼭대기 층을 줘서 오르락 내리락,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아침 출근 때마다 쓰레기를 내다가 버렸다. 바닥청소며 욕실청소도 내가 했다.아쉬운 놈이 한다고 더러운 꼴을 못 보는 놈이 하는 것이었다. 다른 방에 동료가 신발을 신고 아파트를 들어와서 우리 습관은 실내에선 신발을 벗는다고 했더니 자긴 실내에서 실내화로 갈아 신어 상관없다고 했다. 모래가 맨발에 자꾸만 밟히니 내가 청소할 수밖에 없었다. 첫 주 쉬는 날 밴쿠버에 내려왔다고 돌아가보니 같은 방에 있던 동료가 없어졌다. 전화를 해보니 자기는 다른 곳에 취직했는데 숙소를 제공하지 않아 차에서 생활한다고 한다. 이 추운 겨울에 차에서 생활한다고….

휘슬러 직장에서 있었던 일들
휘슬러 도착 다음 날 오리엔테이션 날은 직원식당이 아닌 고급진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은 샌드위치였지만 분위기 때문에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와 같이 식사를 한 경영진의 한 명인 인사부 이사가 밥과 샐몬이 담겨진 식사를 했다. 자기는 알러지가 있어 미리 주문했다고 했다. 난 밥이 부러워서 와 밥이다 했더니 밥을 원하냐며 밥을 따로 주문해서 밥을 갔다 줬다. 샌드위치에 맨밥을 먹으면서 나도 샐몬이 든 밥을 원한 건데 하는 생각과 난 신입이고 그녀는 이사니 참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래전 한국에서 호텔 오리엔테이션 할 때 호텔 룸에서 하룻밤 묵고 수영장 등 호텔 시설을 경험한 이야기를 했더니 솔깃하게 들었다. 호텔에 근무하려면 호텔을 알아야 손님들에게 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내 말과 함께.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각 업장에서 신참을 인솔하러 왔는데 근무시간이 끝나고 와서 데리고 다니면서 유니폼을 타는 곳 주방 사무실, 락카룸 등을 소개시켜주다 보니 어두워져서야 기숙사로 돌아 올 수 있었는데 미로 같은 통로가 길을 찾기 힘들게 했다. 게다가 방향을 알려 주는 안내판이나 안내 글 같은 것도 메인 주방이라는 표시도 없었다. 결국 첫 날은 직원 출입구를 못 찾아 청소직원에게 부탁해야 했고, 두 번째 날은 출입카드가 아직 없어 다른 직원 들어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많은 호텔들이나 식당이 손님이 있는 홀은 멋지게 치장해 놓지만 직원들이 근무하는 지역은 열악하기 그지없어 이곳이 정말 오성급 호텔 맞나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냉동고는 작아서 물건들을 쌓아 놓아 뭘 찾으려면 다 꺼내고 찾아야하고 냉장고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복도에 음식을 보관하는 웜머가 있다 보니 뭘 꺼내거나 넣을 때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양보해야하고 코너에서 부딪히기 쉬우니 "코너"라고 소리쳐 외쳐야 했다.
신참이라고 일을 나한테 시켜놓고 자기는 담배 피러 간다고 나가서 20분이 지나서야 돌아오는 동료, 레시피 대로 시푸드 차우더 숲을 만들었는 데도 맛이 아니라고 농도가 묽으니, 되직하니 컴플레인을 하는 부총주방장을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사실 지금까지 주방 일을 30년을 넘게 했지만 시푸드 차우더 숲을 만들어 파는 식당이나 호텔에 근무했던 적은 없었던 듯 하다. 누가 날마다 시프드 차우더 숲을 먹는다고….
거의 날마다 식자재가 들어오면 신참인 나와 다른 신참이 정리를 해야 했는데 나 혼자 하는 날도 많았다. 30년 전 조리를 처음 배울 때 조리 헬퍼로 일하던 시절 메인키친에서 물건을 나르던 내가 떠 올랐다. 이제 은퇴할 나이가 다 되어서 이렇게 많은 물건들을 정리하는 일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냉동야채를 하나도 쓰지 않으니 생야채들과 과일, 버섯 등이 3개 카터 이상씩 잔뜩 들어왔다. 그것을 해체해서 냉장고에 정리하는 중에도 레스토랑에서 젊은 조리사들이 와서 야채를 챙겨가면서 어질러놓고 흘리고 갔다. 숲도 내가 정성들여 끓여 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저 데워 주는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소스와 숲 담당 조리사가 사골로 데미그라스를 만들고 토마토소스, 기타 베이직소스는 물론 숲을 만들어 냈다. 물론 레스토랑에서 미리 주문한 주문서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당연히 창고에서 물건을 가져 오는 것도 미리 주문해야했다. 주방엔 자리가 많지 않아 쟁여 놓을 곳이 없었다. MSG가 없는 주방, 하지만 맛을 소금과 후추로만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연히 늘 맛이 없는 음식이 되기 일쑤였고 외부에서 들여오는 음식들이 더 맛이 있었다. 단 하나 데미그라스 소스는 인정하고 싶다. 지금까지 인스턴트 팩으로 된 데미그라스에 익숙하다가 처음 조리를 하던 프라자호텔 철도 그릴의 큰 소스 통의 데미그라스를 생각나게 하는 감칠 맛을 본 것 같다.
토론토에서 온 한국인 조리사가 있어서 가금 한국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낯 선 곳에서 근무하는데 도움이 되긴 했던 것 같다.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같은 민족이라는 것에 대한 느낌. 마지막으로 근무를 마치고 아파트 퇴거 인스팩트를 마치고 버스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전화했더니 나와서 배웅하겠다고 했지만 택시가 와서 택시를 타는 바람에 성사 되진 않았다. 평소 5분이면 닿는 버스정류장까지의 택시가 40분을 넘겨서 도착했다. 일요일인데다 눈이 많이 왔고, 게다가 스키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미국 등에서 많이 몰려 들면서 주차장마다 풀이었다. 도착해서 평소 요금이 8불 정도라 20불을 내고 10불만 돌려 달라고 했더니 인도계 운전사가 무슨 소릴하는 거냐 20불도 택도 없다. 메타 꺾었으면 38불정도 나올 건데 메타를 안꺾었으니 그냥 20불만 받겠다고 했다. 내심 불쾌했지만 짐도 있고 택시를 안탔으면 버스를 타기 힘 들었을지 몰라 그래 오케 오케 하고 내렸다. 그래서 운전하면서 4탕은 뛸 수 있는 시간인데 눈이 와서 정체가 되서 한 번에 이리 오래 걸린다고 설레발을 쳤구나 싶었다. 밴쿠버도 휘슬러에서도 택시타고 기분이 좋은 적이 없다. 사기꾼들 같다는 생각이 든다. 1시간을 넘게 기다리다 5시 30분 버스를 타야 하는데 5시 22분에 다른 사람을 태우고 온 택시를 타고 간신히 버스를 탄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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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만 별이 빛나는 게 아니야

땅에도 수없이 많은 별이 별똥별처럼 빛나고 있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같은 고층 별빛도 있고

가로등 불빛처럼 졸고 있는 별도 있어.

#작가의 변

집에 돌아오니
꿈만 같던 3주의 휘슬러 호텔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생활하고 있다. 익숙했던 것에서 가끔은 떠나봐야 그 고마움을 더욱 느끼게 된다. 집에서 늘 생활하면 집이 얼마나 편안하고 아늑한 쉼의 공간인지 잊을 때가 있다. 가족이 왜 소중한지도 있을 때가 있다. 거리도 멀지 않고 주말에 쉬는 날마다 집에 와서 자고 갔지만 마음은 늘 붕 떠있는 상태였다. 안정되게 한 곳에 정착하여 생활하는 것이 아닌 여행자 같은 느낌이었다.
아침마다 눈이 쌓인 스키장을 걸어 내려오는 일은 고난의 아침을 알리는 일이었지만 밤하늘과 스키장을 발끝으로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비록 근무할 때 신는 신발 하나만 달라 가져가서 눈이 깊어 빠지면 양말 까지 다 젖어 버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휘슬러 직장생활
15분전까지 출근하라고 해서 그걸 맞추다 보면 20분전 아니 30분전까지 출근하기도 했다. 물론 커피 한 잔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좋기는 했다. 끝날 땐 제시간에 딱 맞춰 끝나기 힘든 게 문제이기도 하다. 락카는 2명이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해서 다이얼 키로 만들어 놓았는 데 이 다이얼 키를 끝내 열지 못했다.
두어 번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서 열어 달라고 했지만 더는 아침 출근 바쁜 시간에 락카 열쇄로 시간을 소비하기 싫어서 열쇄를 락카 밑 깊숙한 곳에 숨겨 두고 같이 락카를 쓰는 인도계 동료에게 락카를 열어 놓고 다니자고 했다.
어차피 락카에 귀중품을 보관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칼 셋트를 제공해 주지 않아서 다들 자기들의 칼 셋트를 사서 칼 가방을 들고 다녔다. 칼 하나에 200불 이상을 주고 셋트에 800불을 주었다는 동료도 있었다. 나도 첫 주에 쉬는 날 집에 와서 집에 있던 칼 셋트를 가지고 갔다. 그런데 칼 셋트에 많이 쓰던 칼을 찾으니 없다. 그래서 한국식품점에서 50불을 주고 도루코 칼을 하나 사가지고 가서 이거 50불짜리지만 쌍둥이 칼보다 좋지 않느냐고 자랑을 했다.

휘슬러 기숙사생활
기숙사는 처음 비디오에서 봤을 때는 레이크루이스에서 생활할 때처럼 2인 1아파트였는데, 막상 가기로 한 전날 이멜이 와서 벙커베드를 사용해야하고 4인1아파트라고 했다. 왠지 속은 느낌이 들었고 실망을 많이 했지만 이미 다 준비한 상태라서 가기로 했다. 막상 2인1실에서 생활해 보니 밤마다 코고는 소리 밖에서 밤 2시가 넘어 떠드는 소리 등에 잠을 못자고 하루에 4시간 이상을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잠도 못자고 침대에 누워 있는 것조차 고문처럼 느껴졌다. 일주일에 한 번 빨래방에 코인 라운드리를 사용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하다 보니 내려가 보면 자리가 없어 다시 올라왔다가 내려가길 반복했다. 조용한 곳을 달라고 했더니 4층 제일 꼭대기 층을 줘서 오르락 내리락,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아침 출근 때마다 쓰레기를 내다가 버렸다. 바닥청소며 욕실청소도 내가 했다.아쉬운 놈이 한다고 더러운 꼴을 못 보는 놈이 하는 것이었다. 다른 방에 동료가 신발을 신고 아파트를 들어와서 우리 습관은 실내에선 신발을 벗는다고 했더니 자긴 실내에서 실내화로 갈아 신어 상관없다고 했다. 모래가 맨발에 자꾸만 밟히니 내가 청소할 수밖에 없었다. 첫 주 쉬는 날 밴쿠버에 내려왔다고 돌아가보니 같은 방에 있던 동료가 없어졌다. 전화를 해보니 자기는 다른 곳에 취직했는데 숙소를 제공하지 않아 차에서 생활한다고 한다. 이 추운 겨울에 차에서 생활한다고….

휘슬러 직장에서 있었던 일들
휘슬러 도착 다음 날 오리엔테이션 날은 직원식당이 아닌 고급진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은 샌드위치였지만 분위기 때문에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와 같이 식사를 한 경영진의 한 명인 인사부 이사가 밥과 샐몬이 담겨진 식사를 했다. 자기는 알러지가 있어 미리 주문했다고 했다. 난 밥이 부러워서 와 밥이다 했더니 밥을 원하냐며 밥을 따로 주문해서 밥을 갔다 줬다. 샌드위치에 맨밥을 먹으면서 나도 샐몬이 든 밥을 원한 건데 하는 생각과 난 신입이고 그녀는 이사니 참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래전 한국에서 호텔 오리엔테이션 할 때 호텔 룸에서 하룻밤 묵고 수영장 등 호텔 시설을 경험한 이야기를 했더니 솔깃하게 들었다. 호텔에 근무하려면 호텔을 알아야 손님들에게 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내 말과 함께.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각 업장에서 신참을 인솔하러 왔는데 근무시간이 끝나고 와서 데리고 다니면서 유니폼을 타는 곳 주방 사무실, 락카룸 등을 소개시켜주다 보니 어두워져서야 기숙사로 돌아 올 수 있었는데 미로 같은 통로가 길을 찾기 힘들게 했다. 게다가 방향을 알려 주는 안내판이나 안내 글 같은 것도 메인 주방이라는 표시도 없었다. 결국 첫 날은 직원 출입구를 못 찾아 청소직원에게 부탁해야 했고, 두 번째 날은 출입카드가 아직 없어 다른 직원 들어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많은 호텔들이나 식당이 손님이 있는 홀은 멋지게 치장해 놓지만 직원들이 근무하는 지역은 열악하기 그지없어 이곳이 정말 오성급 호텔 맞나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냉동고는 작아서 물건들을 쌓아 놓아 뭘 찾으려면 다 꺼내고 찾아야하고 냉장고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복도에 음식을 보관하는 웜머가 있다 보니 뭘 꺼내거나 넣을 때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양보해야하고 코너에서 부딪히기 쉬우니 "코너"라고 소리쳐 외쳐야 했다.
신참이라고 일을 나한테 시켜놓고 자기는 담배 피러 간다고 나가서 20분이 지나서야 돌아오는 동료, 레시피 대로 시푸드 차우더 숲을 만들었는 데도 맛이 아니라고 농도가 묽으니, 되직하니 컴플레인을 하는 부총주방장을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사실 지금까지 주방 일을 30년을 넘게 했지만 시푸드 차우더 숲을 만들어 파는 식당이나 호텔에 근무했던 적은 없었던 듯 하다. 누가 날마다 시프드 차우더 숲을 먹는다고….
거의 날마다 식자재가 들어오면 신참인 나와 다른 신참이 정리를 해야 했는데 나 혼자 하는 날도 많았다. 30년 전 조리를 처음 배울 때 조리 헬퍼로 일하던 시절 메인키친에서 물건을 나르던 내가 떠 올랐다. 이제 은퇴할 나이가 다 되어서 이렇게 많은 물건들을 정리하는 일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냉동야채를 하나도 쓰지 않으니 생야채들과 과일, 버섯 등이 3개 카터 이상씩 잔뜩 들어왔다. 그것을 해체해서 냉장고에 정리하는 중에도 레스토랑에서 젊은 조리사들이 와서 야채를 챙겨가면서 어질러놓고 흘리고 갔다. 숲도 내가 정성들여 끓여 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저 데워 주는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소스와 숲 담당 조리사가 사골로 데미그라스를 만들고 토마토소스, 기타 베이직소스는 물론 숲을 만들어 냈다. 물론 레스토랑에서 미리 주문한 주문서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당연히 창고에서 물건을 가져 오는 것도 미리 주문해야했다. 주방엔 자리가 많지 않아 쟁여 놓을 곳이 없었다. MSG가 없는 주방, 하지만 맛을 소금과 후추로만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연히 늘 맛이 없는 음식이 되기 일쑤였고 외부에서 들여오는 음식들이 더 맛이 있었다. 단 하나 데미그라스 소스는 인정하고 싶다. 지금까지 인스턴트 팩으로 된 데미그라스에 익숙하다가 처음 조리를 하던 프라자호텔 철도 그릴의 큰 소스 통의 데미그라스를 생각나게 하는 감칠 맛을 본 것 같다.
토론토에서 온 한국인 조리사가 있어서 가금 한국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낯 선 곳에서 근무하는데 도움이 되긴 했던 것 같다.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같은 민족이라는 것에 대한 느낌. 마지막으로 근무를 마치고 아파트 퇴거 인스팩트를 마치고 버스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전화했더니 나와서 배웅하겠다고 했지만 택시가 와서 택시를 타는 바람에 성사 되진 않았다. 평소 5분이면 닿는 버스정류장까지의 택시가 40분을 넘겨서 도착했다. 일요일인데다 눈이 많이 왔고, 게다가 스키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미국 등에서 많이 몰려 들면서 주차장마다 풀이었다. 도착해서 평소 요금이 8불 정도라 20불을 내고 10불만 돌려 달라고 했더니 인도계 운전사가 무슨 소릴하는 거냐 20불도 택도 없다. 메타 꺾었으면 38불정도 나올 건데 메타를 안꺾었으니 그냥 20불만 받겠다고 했다. 내심 불쾌했지만 짐도 있고 택시를 안탔으면 버스를 타기 힘 들었을지 몰라 그래 오케 오케 하고 내렸다. 그래서 운전하면서 4탕은 뛸 수 있는 시간인데 눈이 와서 정체가 되서 한 번에 이리 오래 걸린다고 설레발을 쳤구나 싶었다. 밴쿠버도 휘슬러에서도 택시타고 기분이 좋은 적이 없다. 사기꾼들 같다는 생각이 든다. 1시간을 넘게 기다리다 5시 30분 버스를 타야 하는데 5시 22분에 다른 사람을 태우고 온 택시를 타고 간신히 버스를 탄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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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만 별이 빛나는 게 아니야

땅에도 수없이 많은 별이 별똥별처럼 빛나고 있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같은 고층 별빛도 있고

가로등 불빛처럼 졸고 있는 별도 있어.



#작가의 변

집에 돌아오니
꿈만 같던 3주의 휘슬러 호텔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생활하고 있다. 익숙했던 것에서 가끔은 떠나봐야 그 고마움을 더욱 느끼게 된다. 집에서 늘 생활하면 집이 얼마나 편안하고 아늑한 쉼의 공간인지 잊을 때가 있다. 가족이 왜 소중한지도 있을 때가 있다. 거리도 멀지 않고 주말에 쉬는 날마다 집에 와서 자고 갔지만 마음은 늘 붕 떠있는 상태였다. 안정되게 한 곳에 정착하여 생활하는 것이 아닌 여행자 같은 느낌이었다.
아침마다 눈이 쌓인 스키장을 걸어 내려오는 일은 고난의 아침을 알리는 일이었지만 밤하늘과 스키장을 발끝으로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비록 근무할 때 신는 신발 하나만 달라 가져가서 눈이 깊어 빠지면 양말 까지 다 젖어 버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휘슬러 직장생활
15분전까지 출근하라고 해서 그걸 맞추다 보면 20분전 아니 30분전까지 출근하기도 했다. 물론 커피 한 잔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좋기는 했다. 끝날 땐 제시간에 딱 맞춰 끝나기 힘든 게 문제이기도 하다. 락카는 2명이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해서 다이얼 키로 만들어 놓았는 데 이 다이얼 키를 끝내 열지 못했다.
두어 번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서 열어 달라고 했지만 더는 아침 출근 바쁜 시간에 락카 열쇄로 시간을 소비하기 싫어서 열쇄를 락카 밑 깊숙한 곳에 숨겨 두고 같이 락카를 쓰는 인도계 동료에게 락카를 열어 놓고 다니자고 했다.
어차피 락카에 귀중품을 보관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칼 셋트를 제공해 주지 않아서 다들 자기들의 칼 셋트를 사서 칼 가방을 들고 다녔다. 칼 하나에 200불 이상을 주고 셋트에 800불을 주었다는 동료도 있었다. 나도 첫 주에 쉬는 날 집에 와서 집에 있던 칼 셋트를 가지고 갔다. 그런데 칼 셋트에 많이 쓰던 칼을 찾으니 없다. 그래서 한국식품점에서 50불을 주고 도루코 칼을 하나 사가지고 가서 이거 50불짜리지만 쌍둥이 칼보다 좋지 않느냐고 자랑을 했다.

휘슬러 기숙사생활
기숙사는 처음 비디오에서 봤을 때는 레이크루이스에서 생활할 때처럼 2인 1아파트였는데, 막상 가기로 한 전날 이멜이 와서 벙커베드를 사용해야하고 4인1아파트라고 했다. 왠지 속은 느낌이 들었고 실망을 많이 했지만 이미 다 준비한 상태라서 가기로 했다. 막상 2인1실에서 생활해 보니 밤마다 코고는 소리 밖에서 밤 2시가 넘어 떠드는 소리 등에 잠을 못자고 하루에 4시간 이상을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잠도 못자고 침대에 누워 있는 것조차 고문처럼 느껴졌다. 일주일에 한 번 빨래방에 코인 라운드리를 사용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하다 보니 내려가 보면 자리가 없어 다시 올라왔다가 내려가길 반복했다. 조용한 곳을 달라고 했더니 4층 제일 꼭대기 층을 줘서 오르락 내리락,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아침 출근 때마다 쓰레기를 내다가 버렸다. 바닥청소며 욕실청소도 내가 했다.아쉬운 놈이 한다고 더러운 꼴을 못 보는 놈이 하는 것이었다. 다른 방에 동료가 신발을 신고 아파트를 들어와서 우리 습관은 실내에선 신발을 벗는다고 했더니 자긴 실내에서 실내화로 갈아 신어 상관없다고 했다. 모래가 맨발에 자꾸만 밟히니 내가 청소할 수밖에 없었다. 첫 주 쉬는 날 밴쿠버에 내려왔다고 돌아가보니 같은 방에 있던 동료가 없어졌다. 전화를 해보니 자기는 다른 곳에 취직했는데 숙소를 제공하지 않아 차에서 생활한다고 한다. 이 추운 겨울에 차에서 생활한다고….

휘슬러 직장에서 있었던 일들
휘슬러 도착 다음 날 오리엔테이션 날은 직원식당이 아닌 고급진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은 샌드위치였지만 분위기 때문에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와 같이 식사를 한 경영진의 한 명인 인사부 이사가 밥과 샐몬이 담겨진 식사를 했다. 자기는 알러지가 있어 미리 주문했다고 했다. 난 밥이 부러워서 와 밥이다 했더니 밥을 원하냐며 밥을 따로 주문해서 밥을 갔다 줬다. 샌드위치에 맨밥을 먹으면서 나도 샐몬이 든 밥을 원한 건데 하는 생각과 난 신입이고 그녀는 이사니 참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래전 한국에서 호텔 오리엔테이션 할 때 호텔 룸에서 하룻밤 묵고 수영장 등 호텔 시설을 경험한 이야기를 했더니 솔깃하게 들었다. 호텔에 근무하려면 호텔을 알아야 손님들에게 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내 말과 함께.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각 업장에서 신참을 인솔하러 왔는데 근무시간이 끝나고 와서 데리고 다니면서 유니폼을 타는 곳 주방 사무실, 락카룸 등을 소개시켜주다 보니 어두워져서야 기숙사로 돌아 올 수 있었는데 미로 같은 통로가 길을 찾기 힘들게 했다. 게다가 방향을 알려 주는 안내판이나 안내 글 같은 것도 메인 주방이라는 표시도 없었다. 결국 첫 날은 직원 출입구를 못 찾아 청소직원에게 부탁해야 했고, 두 번째 날은 출입카드가 아직 없어 다른 직원 들어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많은 호텔들이나 식당이 손님이 있는 홀은 멋지게 치장해 놓지만 직원들이 근무하는 지역은 열악하기 그지없어 이곳이 정말 오성급 호텔 맞나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냉동고는 작아서 물건들을 쌓아 놓아 뭘 찾으려면 다 꺼내고 찾아야하고 냉장고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복도에 음식을 보관하는 웜머가 있다 보니 뭘 꺼내거나 넣을 때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양보해야하고 코너에서 부딪히기 쉬우니 "코너"라고 소리쳐 외쳐야 했다.
신참이라고 일을 나한테 시켜놓고 자기는 담배 피러 간다고 나가서 20분이 지나서야 돌아오는 동료, 레시피 대로 시푸드 차우더 숲을 만들었는 데도 맛이 아니라고 농도가 묽으니, 되직하니 컴플레인을 하는 부총주방장을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사실 지금까지 주방 일을 30년을 넘게 했지만 시푸드 차우더 숲을 만들어 파는 식당이나 호텔에 근무했던 적은 없었던 듯 하다. 누가 날마다 시프드 차우더 숲을 먹는다고….
거의 날마다 식자재가 들어오면 신참인 나와 다른 신참이 정리를 해야 했는데 나 혼자 하는 날도 많았다. 30년 전 조리를 처음 배울 때 조리 헬퍼로 일하던 시절 메인키친에서 물건을 나르던 내가 떠 올랐다. 이제 은퇴할 나이가 다 되어서 이렇게 많은 물건들을 정리하는 일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냉동야채를 하나도 쓰지 않으니 생야채들과 과일, 버섯 등이 3개 카터 이상씩 잔뜩 들어왔다. 그것을 해체해서 냉장고에 정리하는 중에도 레스토랑에서 젊은 조리사들이 와서 야채를 챙겨가면서 어질러놓고 흘리고 갔다. 숲도 내가 정성들여 끓여 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저 데워 주는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소스와 숲 담당 조리사가 사골로 데미그라스를 만들고 토마토소스, 기타 베이직소스는 물론 숲을 만들어 냈다. 물론 레스토랑에서 미리 주문한 주문서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당연히 창고에서 물건을 가져 오는 것도 미리 주문해야했다. 주방엔 자리가 많지 않아 쟁여 놓을 곳이 없었다. MSG가 없는 주방, 하지만 맛을 소금과 후추로만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연히 늘 맛이 없는 음식이 되기 일쑤였고 외부에서 들여오는 음식들이 더 맛이 있었다. 단 하나 데미그라스 소스는 인정하고 싶다. 지금까지 인스턴트 팩으로 된 데미그라스에 익숙하다가 처음 조리를 하던 프라자호텔 철도 그릴의 큰 소스 통의 데미그라스를 생각나게 하는 감칠 맛을 본 것 같다.
토론토에서 온 한국인 조리사가 있어서 가금 한국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낯 선 곳에서 근무하는데 도움이 되긴 했던 것 같다.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같은 민족이라는 것에 대한 느낌. 마지막으로 근무를 마치고 아파트 퇴거 인스팩트를 마치고 버스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전화했더니 나와서 배웅하겠다고 했지만 택시가 와서 택시를 타는 바람에 성사 되진 않았다. 평소 5분이면 닿는 버스정류장까지의 택시가 40분을 넘겨서 도착했다. 일요일인데다 눈이 많이 왔고, 게다가 스키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미국 등에서 많이 몰려 들면서 주차장마다 풀이었다. 도착해서 평소 요금이 8불 정도라 20불을 내고 10불만 돌려 달라고 했더니 인도계 운전사가 무슨 소릴하는 거냐 20불도 택도 없다. 메타 꺾었으면 38불정도 나올 건데 메타를 안꺾었으니 그냥 20불만 받겠다고 했다. 내심 불쾌했지만 짐도 있고 택시를 안탔으면 버스를 타기 힘 들었을지 몰라 그래 오케 오케 하고 내렸다. 그래서 운전하면서 4탕은 뛸 수 있는 시간인데 눈이 와서 정체가 되서 한 번에 이리 오래 걸린다고 설레발을 쳤구나 싶었다. 밴쿠버도 휘슬러에서도 택시타고 기분이 좋은 적이 없다. 사기꾼들 같다는 생각이 든다. 1시간을 넘게 기다리다 5시 30분 버스를 타야 하는데 5시 22분에 다른 사람을 태우고 온 택시를 타고 간신히 버스를 탄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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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살고 있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학원을 다니면서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 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 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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