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48. 나이테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48. 나이테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2.02.07 10: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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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온 날들

비디오 찍어 보여 주 듯

보여준다면 숨기고 싶고 잘라내고 싶은 순간이 많아

나이테에 그려진 진실처럼



#작가의 변

설 단상

1월 1일은 우리 명절이 아닌데 쉬고 설날은 ‘차이니스 뉴 이어(chinese new year)’라고 해서 흡사 남의 명절 같았다. 요즘은 루나(Lunar new year)라고 해서 다른 나라의 설날이기도 한 것을 알리긴 하지만 쇼핑몰 등에선 손님을 끌기 위한 행사로 설날을 기념하다 보니 인구가 많은 중국인 손님들 위주로 행사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인 위주라고 하는 것이 빨간 홍등을 달고, 사자 탈춤을 추거나, 음식으로는 중국 라이스 케이크와, 다른 중국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안 하는 것보다야 났겠지만 중국 일색인 설날 기념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바라보는 시각에선 그리 좋지만은 않다. 중국은 특히 레드 엔벌로프라고 빨간 봉투에 복 돈을 담아서 주기도 하는데 특히 중국인 직원들이 다른 직원들에게 돌리기도 한다.
지난 신정엔 한국 식품점에 떡국이 없었다. 미리 사놓지 않았으면 정말 떡국조차 끓여 먹기 힘든 상황이다. 요즘은 중국식품점에도 한국식품이 많고 떡국 떡이나, 고추장, 된장, 고추가루 등 기본적인 것들은 다 있지만 중국식품점에서 파는 떡국 떡은 중국에서 만든 것 같은 모양이라 선뜻 내키지 않기도 한게 사실이다.

설날과 다른 명절에도 늘 고향에 가지 못했던 난, 한국에서도 고향 친구들과 만나지 못한 것이 수십 년이 된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이 객지로 나가 있는 친구들. 그래도 명절에 한 번씩 만나서 회포를 푸는 것이 보통이지만 난 요식업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늘 명절마다 고향을 찾지 못하고 명절이 지난 다음에 가니 친구들은 다들 직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고향에 친구들조차도 이제 다시 돌아오는 일이 거의 없다. 그 친구들이나 나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가족이 고향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늘 고향에 있을 것만 같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십여 년 만에 아버지 장례가 지난 후 삼우제에 도착한 적이 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는 한국에서 하는 장례식에 가지 못하고 가슴 아파하던 날도 이젠 기억에서 희미해져 간다. 고향은 그렇게 나의 기억에서 가슴에서 멀어져 갔지만 어릴 적 고향의 모습과 친구들,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 모습은 점점 더 살아나는 것만 같다. 잊힌 기억과 잊혀졌던 기억이 새록새록 새로워지는 기억.

옆지기는 어릴 적 내가 살던 모습을 이야기하면 흡사 옛날 사람 같다며 할아버지 세대 같다고 한다.
이민 와서도 명절에 차례를 지내고 제사를 지내다, 이젠 모두 하지 않는다. 가장 주된 이유는 음식을 준비하는 아내의 불만이 주된 이유이지만 차례상을 차려도 일하러 가버린 가장과 차례를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아들이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은 절에서 합동 차례로 대신하고 있다.

내가 어릴 적 제사나 차례는 특별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특별한 날이었다.
생일 이외에 동네잔치가 아닌 다음에 가장 진수성찬을 먹을 수 있는 날이다. 특히 과자 구경하기 힘든 시골 아이가 알록달록 색이 칠해진 사탕이며, 평소에 먹지 않던 탕국 등 제사음식을 먹는 기회였다. 요즘에야 먹고 싶은 것은 언제나 먹을 수 있는 시대이지만 당시 제사나 차례가 기다려지는 것은 그런 이유도 있었다.
새해라고 새 옷을 입기도 하고, 새 양말만 얻어 신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탕국에 두부 몇 조각에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김치찌개에 남의 살이 안 들어가면 두부라도 숭숭 썰어 넣으면 맛나던 시절이었다.

캐나다 이민을 오면서 아이교육을 잘 시키고 싶다는 이유를 면접하던 영사에게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판단이 맞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민 와서도 한국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한국인으로 자랑스럽게 살 아이들을 염두에 두었는지 모르지만, 캐나다에서 적응하며 살아가는 2세가 우리와 많은 부분에서 가치관의 차이로 부딪히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옮겨 심는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이민 1세대는 희생의 세대라고 하지만 그 희생 위에 2세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 자녀들에게 의지하고 덕을 볼 생각도 그렇게 될 가능성도 거의 없다. 나 또한 20살에 고향을 떠나면서 부모님을 모시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 혼자 안간힘을 쓰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에 소홀했던 것도 사실이다. 늘 내 발등에 불이 먼저였다. 그러다. 부모님이 떠나고 나서야 나를 돌아보고 나의 미래까지 보게 된다.
부모에게서 많은 유산을 받아서 자녀들에게 아파트값처럼 비싼 람보르기니 같은 명차를 사주는 중국인들이 부럽기도 안쓰럽기도 하다. 20대에 명차를 끌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돈의 고마움을 얼마나 알까? 부모들이 자기들에게 베푸는 사랑을 얼마나 이해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천정부지로 오른 부동산값과 부동산을 소유한 부모들이 자녀들의 주택 구매에 도움을 주는 아빠 찬스, 아빠가 직업이, 지위가 좋아 자녀들에게 좋은 직장을 밀어주는 아빠 찬스, 부모가 없는 구정을 지내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얼키고설켜 맑지 않은 설을 보냈다. 아니 일하느라 정신없는 날이 설날이었다.
설날 전에 한국 식품점에서 쇼핑하면서 뒤에서 들려온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엄마, 나 내일은 떡국 먹기 싫어."

설날에 떡국도 못 얻어먹어 서운한 이민 1세대, 설날 떡국 같은 거 안 먹어도 되는 이민 2세대. 한국인은 태어나면서 1살을 먹는다. 몇 살은 한국식 나이고 몇 세는 관공서에서 쓰는 만 나이다. 딸에게 이제 한국 나이로 서른이라고 하니 싫단다. 태중에 있던 10개월도 한 살로 쳐주는 생명 존중 한국. 한 살 더 먹기 싫어 떡국 안 먹는다고 했던 기억들. 생후 백일잔치하는 한국. 물론 돌잔치도 생일치고는 거하지만, 아무튼 한국은 기념일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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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온 날들

비디오 찍어 보여 주 듯

보여준다면 숨기고 싶고 잘라내고 싶은 순간이 많아

나이테에 그려진 진실처럼

#작가의 변

설 단상

1월 1일은 우리 명절이 아닌데 쉬고 설날은 ‘차이니스 뉴 이어(chinese new year)’라고 해서 흡사 남의 명절 같았다. 요즘은 루나(Lunar new year)라고 해서 다른 나라의 설날이기도 한 것을 알리긴 하지만 쇼핑몰 등에선 손님을 끌기 위한 행사로 설날을 기념하다 보니 인구가 많은 중국인 손님들 위주로 행사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인 위주라고 하는 것이 빨간 홍등을 달고, 사자 탈춤을 추거나, 음식으로는 중국 라이스 케이크와, 다른 중국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안 하는 것보다야 났겠지만 중국 일색인 설날 기념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바라보는 시각에선 그리 좋지만은 않다. 중국은 특히 레드 엔벌로프라고 빨간 봉투에 복 돈을 담아서 주기도 하는데 특히 중국인 직원들이 다른 직원들에게 돌리기도 한다.
지난 신정엔 한국 식품점에 떡국이 없었다. 미리 사놓지 않았으면 정말 떡국조차 끓여 먹기 힘든 상황이다. 요즘은 중국식품점에도 한국식품이 많고 떡국 떡이나, 고추장, 된장, 고추가루 등 기본적인 것들은 다 있지만 중국식품점에서 파는 떡국 떡은 중국에서 만든 것 같은 모양이라 선뜻 내키지 않기도 한게 사실이다.

설날과 다른 명절에도 늘 고향에 가지 못했던 난, 한국에서도 고향 친구들과 만나지 못한 것이 수십 년이 된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이 객지로 나가 있는 친구들. 그래도 명절에 한 번씩 만나서 회포를 푸는 것이 보통이지만 난 요식업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늘 명절마다 고향을 찾지 못하고 명절이 지난 다음에 가니 친구들은 다들 직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고향에 친구들조차도 이제 다시 돌아오는 일이 거의 없다. 그 친구들이나 나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가족이 고향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늘 고향에 있을 것만 같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십여 년 만에 아버지 장례가 지난 후 삼우제에 도착한 적이 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는 한국에서 하는 장례식에 가지 못하고 가슴 아파하던 날도 이젠 기억에서 희미해져 간다. 고향은 그렇게 나의 기억에서 가슴에서 멀어져 갔지만 어릴 적 고향의 모습과 친구들,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 모습은 점점 더 살아나는 것만 같다. 잊힌 기억과 잊혀졌던 기억이 새록새록 새로워지는 기억.

옆지기는 어릴 적 내가 살던 모습을 이야기하면 흡사 옛날 사람 같다며 할아버지 세대 같다고 한다.
이민 와서도 명절에 차례를 지내고 제사를 지내다, 이젠 모두 하지 않는다. 가장 주된 이유는 음식을 준비하는 아내의 불만이 주된 이유이지만 차례상을 차려도 일하러 가버린 가장과 차례를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아들이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은 절에서 합동 차례로 대신하고 있다.

내가 어릴 적 제사나 차례는 특별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특별한 날이었다.
생일 이외에 동네잔치가 아닌 다음에 가장 진수성찬을 먹을 수 있는 날이다. 특히 과자 구경하기 힘든 시골 아이가 알록달록 색이 칠해진 사탕이며, 평소에 먹지 않던 탕국 등 제사음식을 먹는 기회였다. 요즘에야 먹고 싶은 것은 언제나 먹을 수 있는 시대이지만 당시 제사나 차례가 기다려지는 것은 그런 이유도 있었다.
새해라고 새 옷을 입기도 하고, 새 양말만 얻어 신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탕국에 두부 몇 조각에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김치찌개에 남의 살이 안 들어가면 두부라도 숭숭 썰어 넣으면 맛나던 시절이었다.

캐나다 이민을 오면서 아이교육을 잘 시키고 싶다는 이유를 면접하던 영사에게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판단이 맞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민 와서도 한국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한국인으로 자랑스럽게 살 아이들을 염두에 두었는지 모르지만, 캐나다에서 적응하며 살아가는 2세가 우리와 많은 부분에서 가치관의 차이로 부딪히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옮겨 심는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이민 1세대는 희생의 세대라고 하지만 그 희생 위에 2세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 자녀들에게 의지하고 덕을 볼 생각도 그렇게 될 가능성도 거의 없다. 나 또한 20살에 고향을 떠나면서 부모님을 모시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 혼자 안간힘을 쓰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에 소홀했던 것도 사실이다. 늘 내 발등에 불이 먼저였다. 그러다. 부모님이 떠나고 나서야 나를 돌아보고 나의 미래까지 보게 된다.
부모에게서 많은 유산을 받아서 자녀들에게 아파트값처럼 비싼 람보르기니 같은 명차를 사주는 중국인들이 부럽기도 안쓰럽기도 하다. 20대에 명차를 끌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돈의 고마움을 얼마나 알까? 부모들이 자기들에게 베푸는 사랑을 얼마나 이해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천정부지로 오른 부동산값과 부동산을 소유한 부모들이 자녀들의 주택 구매에 도움을 주는 아빠 찬스, 아빠가 직업이, 지위가 좋아 자녀들에게 좋은 직장을 밀어주는 아빠 찬스, 부모가 없는 구정을 지내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얼키고설켜 맑지 않은 설을 보냈다. 아니 일하느라 정신없는 날이 설날이었다.
설날 전에 한국 식품점에서 쇼핑하면서 뒤에서 들려온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엄마, 나 내일은 떡국 먹기 싫어."

설날에 떡국도 못 얻어먹어 서운한 이민 1세대, 설날 떡국 같은 거 안 먹어도 되는 이민 2세대. 한국인은 태어나면서 1살을 먹는다. 몇 살은 한국식 나이고 몇 세는 관공서에서 쓰는 만 나이다. 딸에게 이제 한국 나이로 서른이라고 하니 싫단다. 태중에 있던 10개월도 한 살로 쳐주는 생명 존중 한국. 한 살 더 먹기 싫어 떡국 안 먹는다고 했던 기억들. 생후 백일잔치하는 한국. 물론 돌잔치도 생일치고는 거하지만, 아무튼 한국은 기념일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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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온 날들

비디오 찍어 보여 주 듯

보여준다면 숨기고 싶고 잘라내고 싶은 순간이 많아

나이테에 그려진 진실처럼



#작가의 변

설 단상

1월 1일은 우리 명절이 아닌데 쉬고 설날은 ‘차이니스 뉴 이어(chinese new year)’라고 해서 흡사 남의 명절 같았다. 요즘은 루나(Lunar new year)라고 해서 다른 나라의 설날이기도 한 것을 알리긴 하지만 쇼핑몰 등에선 손님을 끌기 위한 행사로 설날을 기념하다 보니 인구가 많은 중국인 손님들 위주로 행사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인 위주라고 하는 것이 빨간 홍등을 달고, 사자 탈춤을 추거나, 음식으로는 중국 라이스 케이크와, 다른 중국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안 하는 것보다야 났겠지만 중국 일색인 설날 기념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바라보는 시각에선 그리 좋지만은 않다. 중국은 특히 레드 엔벌로프라고 빨간 봉투에 복 돈을 담아서 주기도 하는데 특히 중국인 직원들이 다른 직원들에게 돌리기도 한다.
지난 신정엔 한국 식품점에 떡국이 없었다. 미리 사놓지 않았으면 정말 떡국조차 끓여 먹기 힘든 상황이다. 요즘은 중국식품점에도 한국식품이 많고 떡국 떡이나, 고추장, 된장, 고추가루 등 기본적인 것들은 다 있지만 중국식품점에서 파는 떡국 떡은 중국에서 만든 것 같은 모양이라 선뜻 내키지 않기도 한게 사실이다.

설날과 다른 명절에도 늘 고향에 가지 못했던 난, 한국에서도 고향 친구들과 만나지 못한 것이 수십 년이 된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이 객지로 나가 있는 친구들. 그래도 명절에 한 번씩 만나서 회포를 푸는 것이 보통이지만 난 요식업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늘 명절마다 고향을 찾지 못하고 명절이 지난 다음에 가니 친구들은 다들 직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고향에 친구들조차도 이제 다시 돌아오는 일이 거의 없다. 그 친구들이나 나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가족이 고향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늘 고향에 있을 것만 같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십여 년 만에 아버지 장례가 지난 후 삼우제에 도착한 적이 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는 한국에서 하는 장례식에 가지 못하고 가슴 아파하던 날도 이젠 기억에서 희미해져 간다. 고향은 그렇게 나의 기억에서 가슴에서 멀어져 갔지만 어릴 적 고향의 모습과 친구들,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 모습은 점점 더 살아나는 것만 같다. 잊힌 기억과 잊혀졌던 기억이 새록새록 새로워지는 기억.

옆지기는 어릴 적 내가 살던 모습을 이야기하면 흡사 옛날 사람 같다며 할아버지 세대 같다고 한다.
이민 와서도 명절에 차례를 지내고 제사를 지내다, 이젠 모두 하지 않는다. 가장 주된 이유는 음식을 준비하는 아내의 불만이 주된 이유이지만 차례상을 차려도 일하러 가버린 가장과 차례를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아들이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은 절에서 합동 차례로 대신하고 있다.

내가 어릴 적 제사나 차례는 특별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특별한 날이었다.
생일 이외에 동네잔치가 아닌 다음에 가장 진수성찬을 먹을 수 있는 날이다. 특히 과자 구경하기 힘든 시골 아이가 알록달록 색이 칠해진 사탕이며, 평소에 먹지 않던 탕국 등 제사음식을 먹는 기회였다. 요즘에야 먹고 싶은 것은 언제나 먹을 수 있는 시대이지만 당시 제사나 차례가 기다려지는 것은 그런 이유도 있었다.
새해라고 새 옷을 입기도 하고, 새 양말만 얻어 신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탕국에 두부 몇 조각에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김치찌개에 남의 살이 안 들어가면 두부라도 숭숭 썰어 넣으면 맛나던 시절이었다.

캐나다 이민을 오면서 아이교육을 잘 시키고 싶다는 이유를 면접하던 영사에게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판단이 맞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민 와서도 한국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한국인으로 자랑스럽게 살 아이들을 염두에 두었는지 모르지만, 캐나다에서 적응하며 살아가는 2세가 우리와 많은 부분에서 가치관의 차이로 부딪히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옮겨 심는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이민 1세대는 희생의 세대라고 하지만 그 희생 위에 2세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 자녀들에게 의지하고 덕을 볼 생각도 그렇게 될 가능성도 거의 없다. 나 또한 20살에 고향을 떠나면서 부모님을 모시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 혼자 안간힘을 쓰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에 소홀했던 것도 사실이다. 늘 내 발등에 불이 먼저였다. 그러다. 부모님이 떠나고 나서야 나를 돌아보고 나의 미래까지 보게 된다.
부모에게서 많은 유산을 받아서 자녀들에게 아파트값처럼 비싼 람보르기니 같은 명차를 사주는 중국인들이 부럽기도 안쓰럽기도 하다. 20대에 명차를 끌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돈의 고마움을 얼마나 알까? 부모들이 자기들에게 베푸는 사랑을 얼마나 이해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천정부지로 오른 부동산값과 부동산을 소유한 부모들이 자녀들의 주택 구매에 도움을 주는 아빠 찬스, 아빠가 직업이, 지위가 좋아 자녀들에게 좋은 직장을 밀어주는 아빠 찬스, 부모가 없는 구정을 지내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얼키고설켜 맑지 않은 설을 보냈다. 아니 일하느라 정신없는 날이 설날이었다.
설날 전에 한국 식품점에서 쇼핑하면서 뒤에서 들려온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엄마, 나 내일은 떡국 먹기 싫어."

설날에 떡국도 못 얻어먹어 서운한 이민 1세대, 설날 떡국 같은 거 안 먹어도 되는 이민 2세대. 한국인은 태어나면서 1살을 먹는다. 몇 살은 한국식 나이고 몇 세는 관공서에서 쓰는 만 나이다. 딸에게 이제 한국 나이로 서른이라고 하니 싫단다. 태중에 있던 10개월도 한 살로 쳐주는 생명 존중 한국. 한 살 더 먹기 싫어 떡국 안 먹는다고 했던 기억들. 생후 백일잔치하는 한국. 물론 돌잔치도 생일치고는 거하지만, 아무튼 한국은 기념일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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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살고 있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학원을 다니면서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 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 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 제보 mytrea7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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