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이제, 다시 본다] 20. 2004년 신계사 복원사업
[남북불교교류 비망록이제, 다시 본다] 20. 2004년 신계사 복원사업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장
  • 승인 2022.02.07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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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금강산에 목탁 소리 켜다”

흔히 금강산이라면 내금강을 가리킨다. 휴전선 북쪽의 금강산은 내금강·외금강·해금강으로 나뉜다. 네 가지로 알려진 산 이름은 문헌적으로 열세 가지 별칭이 나온다. 자연 계통에서 상악·풍악·개골·설봉·해악으로 다섯 가지이고, 불교 계통에서 금강·기달·지달·열반·중향성·수미산으로 여섯이며, 도교 계통으로 봉래·선산 두 개의 산 이름이 쓰였다.

신라 때부터 불렀던 ‘상악’은 《삼국사기》에 처음 나온다. “산 모양이 서릿발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7세기 말, 중국 당나라에까지 알려진 금강산의 이름은 《신역화엄경》 <제보살주처품>에 처음 등장했다. 즉, “동북방 청량산 다음에 바다 가운데 금강산이 있다. 그곳에 법기보살이 거처하며 1,200명(《구역화엄경》에는 12.000명)의 권속과 더불어 머물러 있으면서 설법하고 있다.” 이로부터 금강산의 유래는 모두 이 경전을 인용하게 됐다.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산 체(體)가 살은 없고, 온통 바위로 이루어져서’ 붙인 개골산과 풍악산이라 적고, “전하기로, 중국 사람들이 또한 이르기를 ‘고려국에 나서 친히 보기를 원한다.’고 했다.”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개골·열반·풍악·기달의 다섯 가지 이름이 처음 기록됐다.

조선 초기부터 공식 기록된 금강산은 꽃과 새싹이 온산에 뒤덮이는 봄을 가리키는 산 이름이다. 녹음이 짙게 드리우는 여름에는 신선이 사는 봉래산, 가을에는 일만 이천 봉우리가 단풍으로 물들므로 풍악산, 겨울에는 나뭇잎이 떨어져 바위가 앙상하게 드러나서 개골산이라 불렀다. 산의 본 모습이 드러나는 개골산은 달리 열반산이라 불렀다.

이런 금강산에는 “일만이천 봉에 팔만구암자(八萬九庵子)가 있다.” 봉우리의 수는 비슷할지라도 일단 낭설이다. 후대에 와전된 팔방구암자(八方九庵子)는 “한 사찰을 중심으로, 여덟 방면으로 아홉 개의 암자를 둔다. 길을 낸다.”는 뜻이다. 이 전설은 600년에 백제의 관륵과 융운 대사가 내금강 도솔봉(천일대의 옛 이름)의 산허리에다 팔방구암을 짓고 ‘정양’이라 이름 붙인 데서 생겨난 말이다. 통도사와 해인사, 송광사 등 총림 사찰의 위상을 나타내는 말이 사찰 개수로 바뀐 것이다. 팔방보다는 발음상 분명하게 들리는 팔만이 민요 가락으로, 이야기로 전해지면서 생긴 일화이다.

내금강산 이야기와 달리 외금강산은 7세기 중엽 신라의 진출로부터 기록됐다. 통일신라에서 고려,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구룡연 폭포와 만물초(만물상의 옛 이름), 삼일포와 해금강, 총석정 등과 함께 나온다. 분단 이후의 기록은 2002년 12월 ‘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에 관한 의향서’ 체결로 공식화됐다. 남북불교 교류의 정점을 찍은 신계사 공동복원에 대한 뒷이야기를 알아본다.

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에 관한 의향서 체결(2002.12.22. 중국 베이징, 조불련 황병준 부위원장·한성기 국제부장과 조계종 양산 사회부장·지일 민추본 조직국장) 사진= 민추본 홈페이지.





외금강산 신계사 옛 모습(1930년 촬영) 사진=위키백과 홈페이지



외금강 신계사 복원 착공식

외금강은 주 능선이 동쪽으로 동해안과 잇닿아 있는 지역이다. 수많은 계곡과 바위 준봉들이 웅장하고 기센 모양새가 남성적인 외금강에는 만물상·구룡연·삼일포·해금강 구역이 대표적이다. 부드러운 산세로 흙산의 여성적인 서쪽 지역을 내금강이라 부르며, 만천·만폭·백운대 구역 등이 대표적인 경승지다.

외금강의 대표사찰은 신계사와 발연사 등이다. 519년 신라의 보운 조사가 개창한 신계사는 643년 신라 김유신 장군의 원찰로 중창되고, 679년 신라 왕실 지원으로 외금강의 대찰이 됐다. 그로부터 1929년 2월까지 중수와 중창을 거듭한 신계사는 전쟁이던 1951년 6월 미 공군의 폭격으로 모두 전소됐다. 통일신라 진표 율사의 ‘계림(戒林)’이라고 일컫던 발연사는 766년에 창건된 후, 1800년경 산불 화재로 전소한 절터다. 1199년 축조된 것으로, 금강산에 가장 오래된 돌다리인 발연사 홍예교가 남아 있다.

외금강산 신계사는 1825년 남경 지환 대사의 《금강산신계사사적》과 1942년 승려 김탄월의 《유점사본말사지》에도 5전 4각 1루의 10여 채 건물이 있었다. 해방 이후에는 1949년 외금강박물관 또는 금강산특수박물관으로 지정되면서 전통사찰 기능을 잃었다. 그 후 1970년대에 절터 학술조사 발굴된 신계사는 1998년 3월 14일 중국 베이징에서 남측 평불협과 북측의 조선불교도련맹은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관할 하에 ‘금강산 문화재 복원을 위한 합의서’를 체결하면서 공동복원에 대해 처음 논의됐다.

그해 11월 18일부터 금강산관광이 처음 시작되면서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은 남북한의 주요 현안이었다. 통일부가 평불협의 복원사업에 대해 유보조치를 단행하는 등 남측 내부에서도 설왕설래 됐다. 1999년 2월 23일 평양에서 현대아산 실무협의단이 북측 아태·평화위원회에 신계사 복원사업을 제안하면서 실마리가 풀렸다.

그 첫걸음은 2002년 12월 22일 중국 베이징 평양관에서 남측 조계종 서정대 총무원장을 대리한 양산 사회부장과 북측 조불련 박태화 위원장을 대리한 황병준 부위원장이 대표자 명의로 ‘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에 관한 의향서’가 협의됐다. 2003년 2월 10일 베이징 평양관에서 신계사 복원불사 서명본이 교환됐다. 같은 해 7월 9일 조계종단과 현대아산은 ‘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하고, 그해 8월 14일 조계종과 조불련은 전문을 통해 세부사항을 점검했다. ① 신계사 복원불사를 조속히 추진할 것 ② 빠른 시일 내에 실무회담을 개최할 것 ③ 서울에서의 실무회담 개최 유무에 대한 조불련 답신 ④ 신계사 복원과 관련해 유관기관의 협조는 남한의 조계종이, 북측 조불련에서 책임지고 진행한다. 또 10월 21일~25일 금강산에서 신계사 복원불사를 위한 실무회의를 가졌다. 이를 기반으로 같은 해 11월 9일~25일 남북공동 시·발굴조사 및 남북공동 지도위원회는 신계사 터에 대한 기초 시·발굴조사를 실시하고, 대웅전과 삼층탑에 대한 자료, 설계작업을 위한 기초작업을 진행했다. 또 12월 30일까지 ‘금강산 신계사 남북공동 시·발굴 보고서’를 발간했다. 한편, 그해 12월 한국불교종단협의회는 남북불교 교류를 위한 북경 연락사무소를 지정하고, 길정태를 소장에 임명했다.

조계종단과 현대아산은 2004년 1월 30일 실행계획서에 합의하고, 3월 18일 조계종단은 조불련과 팩스 전문으로 김법장 조계종 총무원장과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이 서명한 ‘금강산 신계사 복원 리행을 위한 실행계획서’에 합의했다. 같은 해 3월 23일 미산 조계종 사회부장, 현대아산 등은 조불련 심상진 서기장, 정서화 책임부원, 리의화 문화보존지도국 부국장, 한용길 평양건설건재대학 책임교수 등과 금강산 김정숙휴양소에서 실무회의를 가졌고, 그해 4월 6일 낮 12시 금강산 신계사 터에서 대웅전 착공식을 거행했다. 옛 모습 그대로의 목조건축으로 복원하기 위한 첫 삽을 떴다.



금강산 신계사 공동복원 착공식(2004.4.6.) 사진=남북불교교류 60년사 (2010년)



신계사에 목탁소리 켜다

사라진 지 54년 만에 신계사 터에서 열린 공식 법회의 목탁 소리가 커졌다. 남측의 사회와 집전으로 삼귀의에 이은 반야심경 봉독, 심상진 조불련 서기장의 개식사, 경과보고 및 봉행사, 북측 리의하 문화보존지도국 부국장의 축사, 불사 축원문 낭독, 남북불교 대표단 30명의 공동 시삽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1단계 첫 사업으로 대웅전을 그해 11월에 완공하고, 2007년 전체 복원공사를 이루기 위한 착공식에는 남측의 보선 조계종 중앙종회 부의장, 종상 불국사 주지, 학담 민추본 상임집행위원장, 조계종 미산 사회부장, 탁연 문화부장 등 75명과 조불련 황병준 부위원장, 심상련 서기장 등 검은색 장삼에 붉은색 가사를 걸친 10명과 북측 리의하 문화보존지도국 부국장, 금강산관광총회사와 안내원, 조선중앙방송 기자 등 85명이 함께했다. 황병준 조불련 부위원장은 북측 대표로 “북남 불교도들이 문화유물 보존으로 민족적 자부심을 크게 발현하는 애국적 불사를 이뤘다. 6·15 북남공동선언 실현을 위해 한마음으로 단합하자.”라는 인사말을 했다.

남북공동 복원을 위해 조계종단은 2004년 6월 19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1층 로비에서 ‘금강산신계사복원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추진위원장에 종상 불국사 주지를, 지원 집행위원장, 도각 집행위원 등을 위촉했다. 4개년 사업의 신계사 복원을 시작한 신계사 복원추진위는 12개 건물 복원에 86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고, 복원 및 발굴 불사의 실무역할을 비롯한 불사 기금 마련을 위한 대외홍보, 사업 진행을 위한 남북한 교류를 위한 행정 실무 등을 담당했다. 같은 해 8월 3일~25일까지 신계사 터 2차 발굴조사 및 석탑 해체작업과 보존처리가 이어졌다. 복원 현장 공사 준비에 이어 현장사무실도 세웠다.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신계사 3층 석탑은 장연사 터 삼층탑·정양사 삼층탑과 함께 금강산의 3대 옛 석탑으로 불린다. 이후 9월 23일 신계사에서 6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복원 불사 입재식 및 위령제 개최했다. 10월 6일~13일 공사 일정 등에 관한 금강산 실무회의를 개최했다. 그해 11월 11일에는 금강산 신계사 도감을 맡은 제정 불사 도감이 파견됐다.

2004년 11월 20일 오전 11시에 열린 신계사 대웅보전 낙성식에는 남북의 630여 명이 자리했다. 단산 김재일이 쓰고, 목우 조정훈이 새긴 대웅보전 편액 제막식으로 시작한 이 행사에는 법장 조계종 총무원장, 종산 조계종 원로의장을 비롯한 이봉조 통일부 차관, 유홍준 문화재청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프랑수아 프랑스 대사, 왁신 태국 대사 등 320여 명과 금강산관광 6주년 기념식 참관단 3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북측에서는 차금철 조불련 책임부원, 최일람 문화보존지도국 설비보존 차장, 서철민 문화보존총국 책임부원 등 10여 명이 참석했다. 김법장 조계종 총무원장은 봉행사에서 “신계사 복원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민족화합과 통일의 초석을 놓는 것이다.” 김법전 조계종 종정은 “대결과 갈등은 화해와 단결로 바뀌고 분단과 단절은 교류와 소통으로 변화하며 번뇌와 차별은 보리와 평등으로 승화되는구나.”라는 낙성식 기념 법어를 내렸다. 이때 북측에서는 별도의 메시지를 발표하지 않았다.

이날 대웅보전에 봉안된 불상을 비롯해 신계사 복원공사에 들어간 목재 70여t과 석재 125t, 기와 1만3,000여 장은 2004년 9월 17일부터 남측에서 운송한 자재들이다. 신계사 복원공사는 현지에서 건설한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모든 작업이 이뤄졌고, 금강산 신계사로 운송하여 6개월 동안 ‘조립’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때 신계사 대웅전 복원을 시작으로 금강산관광 명소가 또 하나 탄생했다.



금강산 신계사를 방문한 러시아인 신부와 신계사 주지 진각대사(2013.10.18.) 사진= Russian Orthodox의 페이스북



신계사, 근세기에서 지금까지

구한말 ‘봉오동전투’의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은 1890년부터 2년간 신계사에 머물면서 지담 대사로부터 글을 배우고, 역사 인식과 항일정신을 수련했다. 1900년대에 고승 경허 선사는 금강산을 찾아와 《금강산유산가》를 남겼다. “신계사의 문을 두드리니 외금강이 절경이다. 집선봉에 가던 구름 바람조차 흩어지고, 문필봉의 묘한 형용 석가세존을 닮았구나. 보광·보운 두 암자는 염불·간경에 알맞은 절이다.”라고 했다. 방한암 선사는 1899년 신계사 보운강당에서 《수심결》 등 경학을 닦았다. 효봉 선사는 1925년 신계사의 석두 화상으로부터 계를 받았다. 1922년 12월 용화전 등이 화재로 모두 불타버렸고, 1929년에 만세루 등 11개의 전각이 중건되었으며, 그해 신도 유경화는 180석의 토지를 신계사 미륵선원에 시주했다. 그 뒤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950년까지 대웅보전·나한전·칠성각 등의 전각들과 대웅전 앞에 석탑 1기와 공덕비가 남아 있었다. 마당에 서 있는 한 쌍의 보리수는 1947년 9월경 원산에서 옮겨 심은 나무다.

일제강점기에 유점사의 말사였던 신계사는 1949년 설치된 ‘금강산특수박물관’으로 명칭이 변경됐는데, ‘신계사특수박물관’이라 불렀다. 1951년 6월 미군 폭격으로 전소되어 절터로 남은 신계사는 이후 2004년 4월 분단 이래 최초로, 남북 공조사업으로 추진되어 대웅보전과 만세루, 최승전, 종각 등 11개 건물이 2007년 10월에 낙성됐다. 2008년부터 주지를 맡은 진각 대사와 2~3명의 부전이 머물며, 남북교류가 멈춘 다음, 2013년 10월에는 조선정교위원회 러시아 신부 일행이 방문한 바 있다.

특히 금강산 신계사는 입적한 김법장 조계종 총무원장과 황병준 조불련 부위원장 등의 비원이 서려 있는 한반도의 ‘통일바라기 사원’이다.

# 다음 편은 ‘2004년 조불련 전국신도회’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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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에 관한 의향서 체결(2002.12.22. 중국 베이징, 조불련 황병준 부위원장·한성기 국제부장과 조계종 양산 사회부장·지일 민추본 조직국장) 사진= 민추본 홈페이지.
외금강산 신계사 옛 모습(1930년 촬영) 사진=위키백과 홈페이지
외금강산 신계사 옛 모습(1930년 촬영) 사진=위키백과 홈페이지

외금강 신계사 복원 착공식

외금강은 주 능선이 동쪽으로 동해안과 잇닿아 있는 지역이다. 수많은 계곡과 바위 준봉들이 웅장하고 기센 모양새가 남성적인 외금강에는 만물상·구룡연·삼일포·해금강 구역이 대표적이다. 부드러운 산세로 흙산의 여성적인 서쪽 지역을 내금강이라 부르며, 만천·만폭·백운대 구역 등이 대표적인 경승지다.

외금강의 대표사찰은 신계사와 발연사 등이다. 519년 신라의 보운 조사가 개창한 신계사는 643년 신라 김유신 장군의 원찰로 중창되고, 679년 신라 왕실 지원으로 외금강의 대찰이 됐다. 그로부터 1929년 2월까지 중수와 중창을 거듭한 신계사는 전쟁이던 1951년 6월 미 공군의 폭격으로 모두 전소됐다. 통일신라 진표 율사의 ‘계림(戒林)’이라고 일컫던 발연사는 766년에 창건된 후, 1800년경 산불 화재로 전소한 절터다. 1199년 축조된 것으로, 금강산에 가장 오래된 돌다리인 발연사 홍예교가 남아 있다.

외금강산 신계사는 1825년 남경 지환 대사의 《금강산신계사사적》과 1942년 승려 김탄월의 《유점사본말사지》에도 5전 4각 1루의 10여 채 건물이 있었다. 해방 이후에는 1949년 외금강박물관 또는 금강산특수박물관으로 지정되면서 전통사찰 기능을 잃었다. 그 후 1970년대에 절터 학술조사 발굴된 신계사는 1998년 3월 14일 중국 베이징에서 남측 평불협과 북측의 조선불교도련맹은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관할 하에 ‘금강산 문화재 복원을 위한 합의서’를 체결하면서 공동복원에 대해 처음 논의됐다.

그해 11월 18일부터 금강산관광이 처음 시작되면서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은 남북한의 주요 현안이었다. 통일부가 평불협의 복원사업에 대해 유보조치를 단행하는 등 남측 내부에서도 설왕설래 됐다. 1999년 2월 23일 평양에서 현대아산 실무협의단이 북측 아태·평화위원회에 신계사 복원사업을 제안하면서 실마리가 풀렸다.

그 첫걸음은 2002년 12월 22일 중국 베이징 평양관에서 남측 조계종 서정대 총무원장을 대리한 양산 사회부장과 북측 조불련 박태화 위원장을 대리한 황병준 부위원장이 대표자 명의로 ‘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에 관한 의향서’가 협의됐다. 2003년 2월 10일 베이징 평양관에서 신계사 복원불사 서명본이 교환됐다. 같은 해 7월 9일 조계종단과 현대아산은 ‘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하고, 그해 8월 14일 조계종과 조불련은 전문을 통해 세부사항을 점검했다. ① 신계사 복원불사를 조속히 추진할 것 ② 빠른 시일 내에 실무회담을 개최할 것 ③ 서울에서의 실무회담 개최 유무에 대한 조불련 답신 ④ 신계사 복원과 관련해 유관기관의 협조는 남한의 조계종이, 북측 조불련에서 책임지고 진행한다. 또 10월 21일~25일 금강산에서 신계사 복원불사를 위한 실무회의를 가졌다. 이를 기반으로 같은 해 11월 9일~25일 남북공동 시·발굴조사 및 남북공동 지도위원회는 신계사 터에 대한 기초 시·발굴조사를 실시하고, 대웅전과 삼층탑에 대한 자료, 설계작업을 위한 기초작업을 진행했다. 또 12월 30일까지 ‘금강산 신계사 남북공동 시·발굴 보고서’를 발간했다. 한편, 그해 12월 한국불교종단협의회는 남북불교 교류를 위한 북경 연락사무소를 지정하고, 길정태를 소장에 임명했다.

조계종단과 현대아산은 2004년 1월 30일 실행계획서에 합의하고, 3월 18일 조계종단은 조불련과 팩스 전문으로 김법장 조계종 총무원장과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이 서명한 ‘금강산 신계사 복원 리행을 위한 실행계획서’에 합의했다. 같은 해 3월 23일 미산 조계종 사회부장, 현대아산 등은 조불련 심상진 서기장, 정서화 책임부원, 리의화 문화보존지도국 부국장, 한용길 평양건설건재대학 책임교수 등과 금강산 김정숙휴양소에서 실무회의를 가졌고, 그해 4월 6일 낮 12시 금강산 신계사 터에서 대웅전 착공식을 거행했다. 옛 모습 그대로의 목조건축으로 복원하기 위한 첫 삽을 떴다.

금강산 신계사 공동복원 착공식(2004.4.6.) 사진=남북불교교류 60년사 (2010년)
금강산 신계사 공동복원 착공식(2004.4.6.) 사진=남북불교교류 60년사 (2010년)

신계사에 목탁소리 켜다

사라진 지 54년 만에 신계사 터에서 열린 공식 법회의 목탁 소리가 커졌다. 남측의 사회와 집전으로 삼귀의에 이은 반야심경 봉독, 심상진 조불련 서기장의 개식사, 경과보고 및 봉행사, 북측 리의하 문화보존지도국 부국장의 축사, 불사 축원문 낭독, 남북불교 대표단 30명의 공동 시삽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1단계 첫 사업으로 대웅전을 그해 11월에 완공하고, 2007년 전체 복원공사를 이루기 위한 착공식에는 남측의 보선 조계종 중앙종회 부의장, 종상 불국사 주지, 학담 민추본 상임집행위원장, 조계종 미산 사회부장, 탁연 문화부장 등 75명과 조불련 황병준 부위원장, 심상련 서기장 등 검은색 장삼에 붉은색 가사를 걸친 10명과 북측 리의하 문화보존지도국 부국장, 금강산관광총회사와 안내원, 조선중앙방송 기자 등 85명이 함께했다. 황병준 조불련 부위원장은 북측 대표로 “북남 불교도들이 문화유물 보존으로 민족적 자부심을 크게 발현하는 애국적 불사를 이뤘다. 6·15 북남공동선언 실현을 위해 한마음으로 단합하자.”라는 인사말을 했다.

남북공동 복원을 위해 조계종단은 2004년 6월 19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1층 로비에서 ‘금강산신계사복원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추진위원장에 종상 불국사 주지를, 지원 집행위원장, 도각 집행위원 등을 위촉했다. 4개년 사업의 신계사 복원을 시작한 신계사 복원추진위는 12개 건물 복원에 86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고, 복원 및 발굴 불사의 실무역할을 비롯한 불사 기금 마련을 위한 대외홍보, 사업 진행을 위한 남북한 교류를 위한 행정 실무 등을 담당했다. 같은 해 8월 3일~25일까지 신계사 터 2차 발굴조사 및 석탑 해체작업과 보존처리가 이어졌다. 복원 현장 공사 준비에 이어 현장사무실도 세웠다.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신계사 3층 석탑은 장연사 터 삼층탑·정양사 삼층탑과 함께 금강산의 3대 옛 석탑으로 불린다. 이후 9월 23일 신계사에서 6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복원 불사 입재식 및 위령제 개최했다. 10월 6일~13일 공사 일정 등에 관한 금강산 실무회의를 개최했다. 그해 11월 11일에는 금강산 신계사 도감을 맡은 제정 불사 도감이 파견됐다.

2004년 11월 20일 오전 11시에 열린 신계사 대웅보전 낙성식에는 남북의 630여 명이 자리했다. 단산 김재일이 쓰고, 목우 조정훈이 새긴 대웅보전 편액 제막식으로 시작한 이 행사에는 법장 조계종 총무원장, 종산 조계종 원로의장을 비롯한 이봉조 통일부 차관, 유홍준 문화재청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프랑수아 프랑스 대사, 왁신 태국 대사 등 320여 명과 금강산관광 6주년 기념식 참관단 3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북측에서는 차금철 조불련 책임부원, 최일람 문화보존지도국 설비보존 차장, 서철민 문화보존총국 책임부원 등 10여 명이 참석했다. 김법장 조계종 총무원장은 봉행사에서 “신계사 복원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민족화합과 통일의 초석을 놓는 것이다.” 김법전 조계종 종정은 “대결과 갈등은 화해와 단결로 바뀌고 분단과 단절은 교류와 소통으로 변화하며 번뇌와 차별은 보리와 평등으로 승화되는구나.”라는 낙성식 기념 법어를 내렸다. 이때 북측에서는 별도의 메시지를 발표하지 않았다.

이날 대웅보전에 봉안된 불상을 비롯해 신계사 복원공사에 들어간 목재 70여t과 석재 125t, 기와 1만3,000여 장은 2004년 9월 17일부터 남측에서 운송한 자재들이다. 신계사 복원공사는 현지에서 건설한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모든 작업이 이뤄졌고, 금강산 신계사로 운송하여 6개월 동안 ‘조립’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때 신계사 대웅전 복원을 시작으로 금강산관광 명소가 또 하나 탄생했다.

금강산 신계사를 방문한 러시아인 신부와 신계사 주지 진각대사(2013.10.18.) 사진= Russian Orthodox의 페이스북
금강산 신계사를 방문한 러시아인 신부와 신계사 주지 진각대사(2013.10.18.) 사진= Russian Orthodox의 페이스북

신계사, 근세기에서 지금까지

구한말 ‘봉오동전투’의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은 1890년부터 2년간 신계사에 머물면서 지담 대사로부터 글을 배우고, 역사 인식과 항일정신을 수련했다. 1900년대에 고승 경허 선사는 금강산을 찾아와 《금강산유산가》를 남겼다. “신계사의 문을 두드리니 외금강이 절경이다. 집선봉에 가던 구름 바람조차 흩어지고, 문필봉의 묘한 형용 석가세존을 닮았구나. 보광·보운 두 암자는 염불·간경에 알맞은 절이다.”라고 했다. 방한암 선사는 1899년 신계사 보운강당에서 《수심결》 등 경학을 닦았다. 효봉 선사는 1925년 신계사의 석두 화상으로부터 계를 받았다. 1922년 12월 용화전 등이 화재로 모두 불타버렸고, 1929년에 만세루 등 11개의 전각이 중건되었으며, 그해 신도 유경화는 180석의 토지를 신계사 미륵선원에 시주했다. 그 뒤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950년까지 대웅보전·나한전·칠성각 등의 전각들과 대웅전 앞에 석탑 1기와 공덕비가 남아 있었다. 마당에 서 있는 한 쌍의 보리수는 1947년 9월경 원산에서 옮겨 심은 나무다.

일제강점기에 유점사의 말사였던 신계사는 1949년 설치된 ‘금강산특수박물관’으로 명칭이 변경됐는데, ‘신계사특수박물관’이라 불렀다. 1951년 6월 미군 폭격으로 전소되어 절터로 남은 신계사는 이후 2004년 4월 분단 이래 최초로, 남북 공조사업으로 추진되어 대웅보전과 만세루, 최승전, 종각 등 11개 건물이 2007년 10월에 낙성됐다. 2008년부터 주지를 맡은 진각 대사와 2~3명의 부전이 머물며, 남북교류가 멈춘 다음, 2013년 10월에는 조선정교위원회 러시아 신부 일행이 방문한 바 있다.

특히 금강산 신계사는 입적한 김법장 조계종 총무원장과 황병준 조불련 부위원장 등의 비원이 서려 있는 한반도의 ‘통일바라기 사원’이다.

# 다음 편은 ‘2004년 조불련 전국신도회’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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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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