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 출입 금지 해제, 근대불교의 기점 삼을 ‘중대 사건’
도성 출입 금지 해제, 근대불교의 기점 삼을 ‘중대 사건’
  • 이창윤 기자
  • 승인 2022.02.10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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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 제물포항.
1890년대 제물포항.

1. 도성 출입 금지의 전말과 해금 논의

1895년 4월 승니의 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된 것은 한국 근대 불교의 기점으로 삼을 만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조선조 배불정책으로 존재감이 없었던 불교가 그 자격을 회복하고, 민중포교라는 불교 본연의 임무와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1)

조선 초 사원전과 사원노비의 몰수와 같은 경제적인 배불은 교단 운영에 어려움을 주었다. 그와 함께 국역의 동원과 도성 안 출입을 금지하는 조치는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추락시켰다. 세종 때 실시된 도성 출입 금지의 정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제 도성 안에 출입하는 승도들은 모두 첩자(帖字)를 상고하여 선교종의 승려는 각기 그 종의 색장(色掌)이, 각 사의 임무를 맡은 승려는 각각 그 관아에서 징험하되, 한증승(汗蒸僧)과 명통사(明通寺)의 승려는 본조에 의뢰하여 모두 인신(印信)이 찍힌 첩자를 발급해 주고 성안에 머물러 숙박하지 않고 공무로 인해 출입하는 자는 금하지 말도록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2)

위의 기록에는 도성 출입을 금지하는 사실만 나타나 있지 무슨 이유에 의해 출입이 금지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 실행의 단서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이다.

“경산(京山)의 승도가 부모 친척을 보기 위해서나 시장에 매매하는 일로 도성에 들어오면 도첩을 상고하여 출입을 허락하게 하고, 먼 지방의 승려들은 그 소재관의 문빙(文憑)과 도첩을 상고하여 출입을 허락하도록 하라.”3)

세종 때 승도들의 도성 출입을 금지했던 이유는 도첩이 없는 무도첩승의 단속과 관련된 조치임을 알 수 있다.4) 조선조에 행해진 배불정책은 불교의 교세를 위축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불교계를 원천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제도 가운데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것은 국가에서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는 도첩제의 강화였다. 이런 정책은 고려 시대부터 있어 승려들의 폐단을 방지하고 불교계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활용되었다.5)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불교에 대한 억압 정책을 실시하였다. 군역과 신역이 면제되었던 출가자에게 막대한 비용을 부담시켜 출가자의 수를 제한하려 하였다. 그러자 절차를 밟지 않고 비공식적으로 승려가 된 무도첩승들이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6) 이런 불법으로 인한 승려들의 비행과 승정의 문란은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조선 왕조는 그런 무도첩승에 대한 색출 및 과죄(科罪)가 진행되면서 승려가 함부로 도성을 출입할 수 없도록 하는 법령을 내린 것이다.7) 이 법령은 숭불군주와 억불군주에 따라 부침이 있었지만 근대까지 지속되었다.

1876년 개항 이후 유입되기 시작한 서양의 문물과 사상은 조선 사회의 봉건적 성향과 폐쇄적인 신분질서를 붕괴시켰다. 대표적인 것은 유교를 중심으로 한 지배체제가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된 사회적 변화였다. 여기에 민심의 이반이 이어지면서 그 변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있던 불교가 서학을 견제할 수 있는 사상으로 인식되면서 억압을 완화하는 정책들이 실행되었다.

조선 사회에 서학이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은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그 동지들과 함께 자발적으로 신앙한 것이 시초이다. 이후 서학은 1801년 신유사옥의 참변과 1866년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순교하는 등 난관을 겪었다. 그러나 1876년 2월 일본과 병자수호조규丙子修好條規가 체결되어 문호가 개방되면서 다소 완화된 분위기가 되었다.

일본과 조약을 맺은 조선은 서양의 다른 국가와도 조약을 맺었다. 프랑스는 1886년 6월 한불수호통상조약을 조인하면서 영국과 독일처럼 자신들의 신앙을 믿어도 된다는 조항을 넣었다. 이 조약은 1887년 5월 30일 서울에서 비준되었다. 조선인에 대한 전교의 자유를 얻자 프랑스 성직자들은 위장을 벗어버리고 당당하게 조선 양반 계급의 의관이나 자신들의 신부복을 착용하고 시중을 활보하였다.8)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한 이후 그들의 왕성한 활동력에 놀란 조선의 위정자들은 서학의 전교 활동을 견제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였다. 고민 끝에 불교를 다소 완화하여 서학을 견제할 수 있도록 하였다. 1887년 7월 조선 왕실은 유점사의 각종 요역의 혁파를 시작으로,9) 1879년 표충사에 대해서는 각종 침탈을 엄금하라는 명이 내려졌으며, 1899년에는 대흥사에 대한 각종 요역을 혁파하였다.10)

왕실의 우호적인 불교관은 원찰 지정과 함께 종친과 상궁의 불량(佛糧) 희사와 불량토 기증으로 이어졌다. 1879년 고종은 대전(大殿), 곤전(坤殿), 동궁(東宮)의 탄신을 위하여 건봉사를 원당으로 정하고 교지를 내려 일체 잡역을 혁파하였다.11) 1880년 11월에는 완화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상궁 천씨 등이 화계사에 불량을 인권, 시주하였으며, 대왕대비 조 씨는 익종과 헌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화계사 명부전에 불량토를 헌납하였다. 1883년 12월 화계사 금산화상은 직접 대왕대비 조씨 등에게 관음전에 불량을 시주하도록 권하였다.12)

조선 후기 불교에 대한 인식 전환에 영향을 미친 것 가운데 하나는 갑신정변 이후 나타난 신분 타파의 경향이었다. 신분 타파는 봉건적 사회에서 근대적 시민사회로 넘어가는 중요한 척도이다. 이 같은 시대적 변화 속에 승려의 신분도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개항 이후 조선 사회에서 봉건적 신분 사회에 대한 개혁을 시도한 것은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였다.13) 그들이 내세운 개혁 정강 가운데 신분 타파에 관한 조항이 있으며, 이는 사회질서 대변화의 시작이었다.14) 이런 변화는 뒤의 갑오개혁을 기점으로 우리 사회에 일어나기 시작한 개혁의 물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계기가 되어 통치체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15)

갑오개혁은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을 겪은 조선 왕실이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진행한 제도개혁운동이다. 안으로는 갑신정변 이래 계속된 개혁의 요구와 동학혁명의 개혁안을 수용하면서 이루어졌고, 밖으로는 청국과 일본의 조선 관련 정책과 연관되어 진행되었다. 개혁은 조선 왕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에 걸쳐 전면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기존의 지배질서를 크게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894년 7월 27일 개혁을 담당할 기관으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었고, 12월 17일까지 존속하면서 41회의 회의를 통해 약 210건의 제도개혁안과 정책건의안을 의결하였다.16)

군국기무처는 즉시 실시해야 하는 주요 사항 가운데에는 승려가 도성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는 법의 폐지를 건의하였다. 이 건의가 수록된 자료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외교보고서’(1885~1913)이다. 이것은 1894년 9월 13일 동경에서 보낸 보고서였다. 내용은 8월 16일자 조선의 개혁을 전하는 것으로 군국기무처가 즉시 실시해야 하는 주요 개선 사항 18가지였다. 그 가운데 14번째가 앞에서 말한 승니의 ‘도성 출입 금지’에 대한해제이다. 이 보고서는 그 밖에도 다른 조치들을 거론하고 있으면서 아직 군국기무처가 그 일을 끝내지 않은 것으로 적고 있다.17)

이 보고서가 가지고 있는 사료적 가치는 단순히 외교관이 주둔하는 국가에서 일어난 개혁 과정을 보고한 문서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다른 사안들이 앞서기술한 군국기무처가 실행한 개혁안과 일치함을 볼 때18)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실제로 이와 유사한 기록이 황현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도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갑오경장이 시작되어 1894년 6월 27일 개혁 법안을 제정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19) 제정된 법안은 다수였으나 세세한 기록들은 피하고 17개의 조항만을 적고 있다. 앞서 살펴본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외교보고서’와는 13가지가 일치하고 있다.20) 《매천야록》에서 승니의 ‘도성 출입 금지 폐지’ 조항은 13번째에 있다.21)

두 가지 사료 가운데 앞의 보고서는 외국인이 조선의 정세를 살펴본 기록이므로 다소 틀릴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황현의 기록은 그러한 조항들이 제정될 때 생존했던 인물이었다.

이 같은 내용으로 볼 때 1894년 6월 이전 도성 출입 금지는 해제될 수 있는 여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각의에 상정되어 거의 통과를 보려는 순간 대원군의 간섭으로 거부되었다.22) 재집권한 대원군은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어 급진적 제도개혁안이 남발되는 것에 격분하였다.23) 재봉기한 동학의 간부에게 사람을 보내거나, 평양에 있는 청군에게 편지를 보내 장차 조선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친일정권을 전복시켜 달라는 부탁을 하는 등 개혁과 어긋난 행동을 하였다. 그러자 군국기무처에서는 대원군을 무시하고 국왕에게 결재를 요청하는 등 갈등이 있었다.24)이런 과정으로 볼 때 불교계의 오랜 악법이었던 도성 출입 금지의 해제는 시대적 분위기에 힘입어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던 현안이었다. 그러나 그 기회를 잃어버리고 뒤에 일본 승려가 이를 주도하고 해결함으로써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대해 경외감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주) -----

1) 김경집, 《한국근대불교사》(1998), 경서원, 113쪽.

2) 《세종실록》 권49, 세종 12년 9월 기해(己亥). “禮曹啓令僧徒出入京城者皆考帖字…公事出入者勿禁從之.”

3) 《세종실록》 권77, 세종 19년 5월 정미(丁未). “京山僧徒惑見父母族親惑因市場入京城者‥‥亦考所在官文憑及度牒亦許出入.”

4) 이봉춘, <조선 세종조의 배불정책과 그 변화>, 《한국불교문화사상사》(1992) 권상, 1249쪽.

5) 김영태, <조선 전기의 도승 및 부역승 문제>, 《불교학보》 제32집(1995),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8쪽.

6) 김영태, 위의 논문, 11쪽.

7) 이봉춘, 앞의 논문, 1249쪽.

8) 유홍렬, <개항과 신교 자유 문제>, 《한국종교》(1976), 원광대, 7~15쪽.

9) 《유점사지》(1977), 아세아문화사, 138~139쪽. 유점사의 요역 혁파는 개항 이전인 1866년 10월에도 있었다.

10) 삼보학회 편, 《한국근세불교백년사》(1994) 제3권 ‘경제본산(經濟本山)’, 72~74쪽.

11) 《건봉사지》(1977), 아세아문화사, 10쪽.

12) 삼보학회 편, 《한국근세불교백년사》(1994) 제3권 ‘경제본산’, 10~11쪽.

13) 갑신정변 이전 전국에서 야기된 민란의 대부분이 탐관오리들의 경제적 침탈과 함께 자신들의 신분적 한계에서 비롯된 봉기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민란의 의미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 민란은 민란 나름대로 봉건적 지배 체제를 변화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음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의 시대 구분상 개화기 이후에 대한 사건만을 다루고자 하는 한계성에 의해 그러한 민란의 성격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신분 타파를 생략하고자 하는 것이다.

14) 이광린, 《개화당연구》(1991), 일조각, 168~171쪽.

15) 우윤, <갑오농민전쟁>, 《한국사》 12(1994), 한길사, 191~192쪽.

16) 최덕수,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한국사》 11(1994), 한길사, 132~142쪽.

17) 서울대 인문대학 독일학연구소 역, 《한국근대사에 대한 자료》(1992), 신원문화사, 207~209쪽.

18) 유영익, 《갑오경장연구》(1990), 일조각, 229쪽.

19) 황현의 기록은 음력이므로 양력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으며 실제로는 음력 28일 발표되었다.

20) 군국기무처 개혁안은 모두 210안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개혁안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외교보고서는 물론 《매천야록》에 기록된 사안들 대부분이 보이고 있으나 ‘도성 출입 금지’ 해제에 대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개혁안 가운데 공포되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도성 출입 금지’를 해제하는 조항도 그렇게 볼 수 있다. 유영익, 앞의 책, 137쪽.

21) 황현, 《매천야록》(1955), 국사편찬위원회, 149쪽.

22)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 《이조불교》(1929), 보문관, 896쪽.

23) 유영익, 앞의 책, 43쪽.

24) 이광린, <민비와 대원군>, 《개화기연구》(1994), 일조각, 152~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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